여산 쟁목고개서 남원 밤재까지 140km
도보 답사, '난중일기' 속 상황도 소개
‘2019 시민기자가 뛴다-문화&공감’은 전북지역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이 지역 문화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담론을 만들어내는 공간입니다. 올해는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고형숙 부채문화관 기획팀장(화가)·조세훈 문화인류연구자(전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가 참여해 도내 곳곳에서 의미 깊은 지역 역사·문화 콘텐츠 등을 조명합니다. ‘문화&공감’은 오는 9월까지 매주 수요일자에 게재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북의 길을 걸어 백의종군하며 지나간 지 채 4개월도 되지 않아 호남의 보루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되었고, 그 길을 따라 왜군의 일부 세력은 충청도로 북진하기도 했다. 그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북 지역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는 일은 역사를 회고하고, 고난의 백의종군이 나라의 희망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콘텐츠다.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직접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도보로 답사해본다. 길을 걸으며 현재 길이 이어지는 상황과 <난중일기> 속 상황을 교차해 설명하고, 경유하는 지역의 이야기들을 엮을 예정이다. 난중일기>
(사)한국체육진흥회의 자료(트랙)에 의하면 백의종군로의 총 거리는 676km에 이르며, 논산과 여산의 경계인 쟁목고개에서 남원과 구례의 경계인 밤재에 이르는 5박 6일 노정 전라북도 관내의 거리는 약 140km가 된다.
연재 기사마다 25키로 내외, 소요시간 7시간 분량을 다룬다. 길 안내는 (사)한국체육진흥회의 gpx트랙을 참고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일자는 원문 그대로 음력으로 표기했으며, 번역문은 노승석의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를 인용했다. 첫 편은 여산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다음 편은 여산~삼례 구간을 연재할 예정이다. 증보>
△여산으로 들어서다
4월 21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은원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오려고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 행적이 매우 괴상하고 거짓되었다.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난중일기)
4월 1일 의금부의 옥을 나선 후, 남쪽을 향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 들르는데, 이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출옥한 장군을 보기 위하여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던 모친이 도중에 별세를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호송하던 의금부 관원의 재촉으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4월 19일 길을 나서게 되고, 공주와 논산을 거쳐 4월 21일 여산에 도착한 것이다. 백의(白衣)를 입은 죄인의 몸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룻밤을 보내는 숙소도 이렇듯 노비의 집을 찾아야만 했다. 전장에서 장병들을 지휘하며 적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모습, 갑작스런 모친의 죽음과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상황은 장군을 절망감과 무력감, 그리고 애통함으로 잠 못 이루게 하였을 것이다.
3월 하순이 시작될 즈음 시작한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도보답사는 마침 내리는 비로 인해 다음날로 미루고, 이순신 장군이 하룻밤을 머물렀던 익산시 여산면의 여산동헌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라도의 관문인 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울(京)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라고 나온다. 여산은 현재 익산군에 속한 면단위 마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익산시 낭산면, 망성면, 논산시 연무읍(황화면)을 관할하는 여산군을 이루고 있었고, 도호부로 승격된 적도 있다.
여산군의 관아였던 여산동헌은 조선말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되는데, 구조는 다소 바뀌었지만 옛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동헌 옆의 ‘백지사터’는 1868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형이 집행된 순교의 현장을 추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비가 내려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 얼굴에 종이를 덮고 있는 조형물에서 더욱 처연함이 느껴졌다.
○ 이순신 장군이 걸어온 길 ‘백의종군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왜군에 밀려 전쟁 발발 20일 만에 한양 도성이, 2달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며, 임금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전쟁의 양상은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은 배제한 채 강화협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3년 6개월여 걸쳐 진행되던 강화협상은 결렬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 침략을 명하면서 1597년 1월 전라도를 주 침공 루트로 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던 1597년 1월, ‘가등청정이 곧 부산포로 들어올 계획이니 잘 대비해서 전쟁을 미리 막아라’라는 이중간첩 요시라의 반간계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해역으로의 출전을 명한다. 하지만 장군은 출전이 불가하다는 몇 가지 이유를 장계로 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장군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고,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를 포함한 4가지 죄목으로 2월 26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형이 임박한 시점에서 판중추부사 정탁의 ‘전쟁 중에 장수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탄원(伸救箚신구차)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되고,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명받고 1597년 4월 1일 서울 의금부를 출옥하여 남대문-수원-아산-논산-여산-삼례-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구례-하동-단성-삼가를 거쳐 6월 4일 권율 도원수 군진이 있는 합천(초계)에 이르는 노정을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출옥 후 약 4개월 후인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끝나게 된다. 당초 이순신 장군은 삼남로를 통해 충남 논산에서 전북 여산으로 들어서서 삼례로 이동한 후, 통영별로를 따라 전주-남원을 거쳐 함양으로 가서, 이곳에서 합천으로 이동하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함양으로 가기 위해 운봉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을 때,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진행 방향을 바꾸어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되며, 5월 26일 다시 구례를 출발하여 경남 하동-단성-삼가를 거쳐 도원수 군진이 있는 합천(초계)에 이르는 노정이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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