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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0. 남원명당과 황희 그리고 광한루

고지도 속의 지형과 황균비의 묘 그리고 마을입구 안내석.
고지도 속의 지형과 황균비의 묘 그리고 마을입구 안내석.

“명당(明堂)”은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생기게 한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한다. 풍수에서 최고의 묏자리인 음택명당으로 유명한 곳이 남원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에 있다. 그 명당을 홍곡단풍(鴻鵠摶風)이라 하는데 이는 커다란 기러기나 고니가 날개로 바람을 어우르는 형세로 영웅호걸이 천하에 웅지를 편다는 터이다. 바로 그 묏자리에 든 주인은 다름 아닌 황희의 할아버지인 황균비이다.

풍수에서는 명당에 든 뒤에 태어난 자손이 가장 큰 혜택을 받는다 했는데 할아버지 묘소인 그 명당 덕이었을까. 황희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청백리라 칭송받았고, 그의 아들 황수신도 세조시기 영의정까지 올라 부자가 재상이 되었으니 조상의 덕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그 명당을 황희의 아버지인 황군서에게 점지해준 사람은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로 땅속의 기운까지 꿰뚫어 본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 터에 얽힌 풍수설화도 특별하다. 원래 그 명당은 나옹선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소개해주기로 한 것이었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터의 혈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고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큰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 나옹선사를 대신해 돈을 변제해 주고 봉변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황군서였다. 그에 대한 답례로 점지받은 터는 정면에 문필봉이 들어차고 그 주변의 산들이 층을 이루며 묘를 향해 절을 하는 형상으로 큰 인물이 나올 명당이었다.

명당을 잡아준 나옹선사는 “이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후손은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되고 집안에 재상이 둘이 나올 것이요. 다만, 가난할 상이라 부국지세의 터인 숙호형(宿虎形)을 하나 더 잡아 줄 터이니 다른 조상의 묏자리로 쓰시오. 그리고 명심할 것이 있소. 이 운을 차지하려면 묘를 쓴 다음 빨리 남원을 떠나 송악(개성)에 가서 살아야 하오”라고 당부를 한다. 그 조언대로 황군서는 부친의 묘를 점지해준 자리에 이장하고, 순창 동계면 숙호형의 자리에 모친의 묘를 쓰고 남원을 떠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으로 가서 황희(1363-1452년)를 얻게 된다.

 

황희 정승 표준영정, 옥동서원 봉안.
황희 정승 표준영정, 옥동서원 봉안.

본래 황희의 선조들은 장수 황씨로 장수에서 살다가 고려 명종 때 난을 피해 남원으로 와 연을 맺으며 번성한 가문이었다. 그러한 터전인 남원을 떠나 고려 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직에 오른다. 그러다 고려가 멸망한 뒤 은거에 들어갔으나 조선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출사하여 태조, 태종, 세종까지 세 분의 임금을 모시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벼슬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격인 영의정을 87세에도 지내며 90세까지 장수했으니 황희는 조선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영의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뇌물을 받았다고 상소를 받기도 했으며 좌천과 파직을 받으며 굴곡진 벼슬살이를 했다. 그 중 태종의 복심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은 황희였지만 남원으로 유배를 갈 수밖에 없던 사건이 있었다.

 

황희의 유배에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황희의 유배에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바로, 세종의 즉위를 반대했던 것이다. 1416년(태종 16)에 태종이 황희를 불러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자, 황희는 “세자는 가볍게 바꿀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에 왕이 진노하며 황희를 좌천시켰고 세자가 폐위되자 파직시켜 교하(현 파주)로 유배를 보냈다. 정작 성군이 될 임금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대한 황희와 그런 그를 상왕인 태종의 청을 받아 다시 불러들여 오랫동안 영의정으로 곁에 두었던 세종과의 관계가 각별하다.

태종은 교하로 유배 보낸 황희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지를 다시 정해 보내야 한다는 대신들의 청을 따랐지만, 그의 연고가 있는 남원으로 가서 노모를 모시고 처자식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황희는 남원에 오자마자 조부 황균비의 묘소를 찾았다고 전해지지만, 남원에서의 유배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황희의 생질인 오치선에게 황희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는 것과 1442년 2월의 “남원에 있는 황희를 돌아오게 하다”란 남원에서의 유배가 끝남을 알리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남아있다. 황희가 남원에 머무른 시간은 4년이 채 안되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으로 남원의 상징이 된 것이 있다. 바로 광한루(廣寒樓)이다.

 

광한루의 옛 모습.
광한루의 옛 모습.

보물 제281호인 광한루는 1419년 황희가 지은 누각인 ‘광통루(廣通樓)’에서 유래되었다. 광통루는 황희의 6대조 할아버지인 황감평의 서실이 있던 옛터에 지은 것으로 황희의 아들인 황수신이 지은 「누정기」에 전해진다. 광한루는 선조들의 사상과 손길이 깃든 일대의 정원을 포함하여 ‘광한루원’이란 이름으로 문화재(명승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지나온 세월의 흔적과 수많은 사연이 얽혀있다. 황희가 유배 시기 자연을 벗 삼아 지내온 광통루는 1444년 전라감사였던 정인지에 의해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인 ‘광한청허부’라는 의미로 광한루라 개칭되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수와 증축을 수없이 거치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누각마루는 재판소로, 누각 아래는 감옥으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가치로 남은 광한루는 올해로 건립 600주년이 되었다. 황희의 광통루를 이은 광한루를 많은 선조들이 사랑했으며 춘향이의 사랑이야기까지 덧입혀진 오늘날의 광한루원은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끄는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명당의 기운을 후손에게 전해준 땅은 그 힘을 지역에 굳건하게 전해주고 있다.

명당은 베푸는 덕을 쌓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황희 부친의 덕행으로 점지된 남원명당이 유능한 재상을 탄생시켜 우리 역사의 주춧돌이 되었고, 그가 지은 정자는 지역 자산의 기원이 되어 빛나고 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곳에서 풍류를 즐긴 선조들의 걸음을 따라 그 길한 기운이 서린 남원명당을 찾고 광한루의 600년 세월을 축하하며, 각박한 세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덕을 쌓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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