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예술가로서 행위미술 이벤트 영역을 개척해 내고, 여러 가지 형태의 신체 드로잉으로 활약해온 이건용이 군산을 떠났다. 그가 군산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산대 미술학과에 교수로 재직(1981~)하면서부터이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입체 작품 ‘신체항’은 나무 둥우리를 뿌리 채(뿌리 부분을 대략 1m 입방체의 흙과 함께) 파내어 전시장에 옮겨 놓은 작품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계를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의 전개를 논리적으로 지칭하는 행위미술 ‘이벤트’를 개척한 그는 바닥에 원을 그려 놓고 그 앞에 서서 원의 중심을 가리키며 ‘거기’, 그 원 안에 들어가서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 원 밖을 나가서는 뒤로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했던 그는 그 행위를 장소의 논리라고 불렀다.
그의 행위성에는 항상 논리성을 동반하면서 그 틀을 깨는 변칙이 동반된다. 그가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보였던 ‘달팽이 걸음’은 매끄러운 전시장 바닥에 쭈그려 앉아 백묵으로 발가락 앞에 촘촘히 가로획을 그리면서 발바닥으로 지우면서 나아가는 행위였다. 맨발로 쭈그린 자세로 무수히 그려지는 백묵 선을 지우면서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그 자세로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느 날 그는 교회를 세우는 선교를 하겠다고 기도를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그의 작업은 돈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여러 국가에 50개의 교회를 세울 예정이다. 이미 2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다. 기도 때문이었을까? 창고에 쌓아두었던 그의 작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리고 그는 군산시 교외에 근거했던 작업실을 치우고 군산을 떠났다.
그가 형편이 좋아져 지역을 떠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전북의 화단 입장에서는 큰 지주 하나를 잃은 셈이다. 그는 떠났고 이제 우리에겐 그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2015년 아시아현대미술전의 국제퍼포먼스 행사 때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 길목에 바이올린을 켜는 젊은 여성 연주자의 상의 등 쪽을 가위로 길게 잘라 다른 사람과 연결 짓던, 장난기 많고 흥미롭던 그의 모습을 쉽게 접하기 어렵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작업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그는 이제 편안하고 넉넉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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