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은 인문학의 ‘표현법’…세상을 그리는 무기
△소용돌이치는 이념과 체제, 인식의 담론들
다양한 분야의 세계 석학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진단하고 있다. 대체로 인식의 대전환, 그리고 실천의 힘이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삶으로의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전제는 ‘각성’과 집단지성을 발휘한 실천의 연대라고 입을 모은다. 이 전제가 지구촌 코스모폴리탄인 우리 모두의 과제이자, 한 꾸러미로 묶인 세계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이다.
코로나19는 이른바 ‘미국을 벤치마킹해’ 발전시킨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富의 축적과 분배의 불균형 또는 양극화의 폐단)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 담론이 우리사회에 매우 거세고 거대한 이슈로 이어져 사대주의와 다를 바 없었던 이 ‘벤치마킹’의 허울에서 벗어나 우리 삶을 다시 보고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개발과 보존, 자연과 인간,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세계열강에 대한 재평가, 보호주의와 자유주의, 세계화와 반세계화, 동양과 서양, 유색인종과 백인종 등 한동안 인류의 문명과 삶, 일상을 지배했던 다양한 이념과 체제, 인식에 거대한 담론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길 바란다.
거센 비가 쏟아질수록 흙탕물은 탁해지기 마련이지만, 비가 멈춘 뒤엔 탁해진 만큼 정화가 이뤄진다. 자연의 섭리대로 이 거대한 담론의 소용돌이를 통해 인식의 변화가 이뤄지고, 이것이 보다 자연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체제를 다시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지 않을까, 낙관해본다.
사실 낙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나날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세먼지에 바이러스에, 마스크가 365일 생활필수품처럼 되어버린 저 아이들을,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받아야 하는 저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등굣길에 마주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날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이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빼앗아 갔는가, 나와 기성세대들, 그리고 그 체제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온 우리들이다. 그래서 더 통렬하게 반성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금은 힘이 없는 문화예술…생존과 의미를 포기말자
축제 속에 있으면서, 당장 올해와 내년, 멀리는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를 그리며 새로운 포지셔닝을 고민한다. 우리 사회 속에서 ‘축제’가 갖는 포지션, 그리고 이 속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 ‘나’의 포지션에 대한-. 결국은 ‘가치’에 대한 성찰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축제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 나의 일은 생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인정받고 싶은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정투쟁과 다르지 않다. 이 내적 인정투쟁이 다른 분야와의 차별이나 우월을 다투는 상대적 또는 경쟁적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안쓰럽게도 자기 검열에 가깝다.
우리 조직의 스태프들은 코로나19 속에서 한동안 이런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우리는 몇 번째 정도일까 하는 회의가 그것이다. 공연예술제인 소리축제는 예술을 지향한다. 전통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라보며 일한다. 코로나19는 안정과 경제(사회기반 유지, 생계의 개념에서)라는 가치 앞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던 다양한 가치들을 힘없이 굴복시켰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어서 다른 문화예술인들과는 매우 동떨어진 진단일 수 있다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축제를 통해 문화예술의 가치를 구현해 온 소리축제의 구성원으로서, 여러 다양한 사회적 가치와 필요에서, 현재로써는 우리에게 힘이 없음을, 그 좌절감을 털어놓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를 기반으로 수많은 축제와 공연예술제, 공연예술기관들이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소리축제 역시 그렇게 방향을 잡았다. 예술인들과 예술을 기반으로 한 단체/기관들이 지금은 이런 흐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흐름(또는 고육지책)이 코로나19 이후에도 이어질지 단시간의 현상에 그칠지는 전망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이 미디어 공연들의 효율, 가치, 의미들을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가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걸까? 생존법을 두고 의미를 따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쨌든 이 미디어 공연의 좋은 점은 이어질 것이고, 나쁜 점은 버려질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그것이 ‘변화’라는 이름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양립할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기반의 축제에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것이 이 사태가 종식된 이후에도 ‘어떤 의미’로서 회자되길 바란다.
△코로나 이후…삶과 사람을 다시 보는 문화예술의 가치
중세 흑사병이 수많은 유럽인들을 죽였으나, 르네상스의 도래를 이끌기도 했다. 이 오래된 역사를 전가의 보도처럼 마음에 품는다. 다만 이 속에는 수많은 고통과 담론의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아직 더 많은 고통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과학적 예측도 그러하다. 경쟁을 굳건한 체제나 자연의 이치처럼 믿으며 개발과 발전의 끝없는 욕망 속에서 서로를 겨누어야 했던 야수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는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코로나19는 나와 나의 직장,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생산해내고 있다고 믿었던 가치, 거기서 파생했던 나의 자부심에 ‘성찰’의 시간을 선물했다. 참으로 아픈 선물이다. 잠시 멈춘 듯 했으나, 아쉽게도(?) 우리는 어떻게든 또 가고 있다. 또 갈 수밖에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가지 못하고 멈춰선 사람들의 절망은 또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자본주의사회를 멈추지 않는 자전거에 비유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여럿이 타는 자전거 같다. 자전거를 멈추면 타고 있던 우리 모두가 넘어져 다치고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속도를 줄인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는 잠시 페달을 떼어도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동력을 나누어 생산하고 교대한다면, 빨리 가야 한다는 강박을 버린다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서로에게 휴식과 바라보기, 지혜로운 분배가 허락된다면 우리는 좀 더 관대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관대함 속에서, 고통과 가치를 나누는 연대의식 속에서, 문화예술은 사람과 삶을 새롭게 발견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문화예술은 인문학의 좀 더 역동적인 ‘표현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문학은 우리 사는 세상을 진단하고 더 좋은 세상을 그리는 무기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은 문화예술의 가치가 밀려난 듯 보이지만, 좌절하지 말자. 각성하고 성찰하며 우리 사는 세상을 새롭게 둘러보려고 노력하자. 그러다 보면 후일 더 좋은 무기로 새로운 세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르네상스도 그렇게 오지 않았을까.
오늘 2020 전주세계소리축제 프로그램발표회와 쇼케이스가 열린다. 복잡한 상념과 동행하며 뚜벅뚜벅 행사장으로 간다.
/김회경 전주세계소리축제 대외협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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