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서점 ‘한길문고’, 계속 열리는 희망 되어주길
2012년 여름, 잡지사 인턴기자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무렵 취재수첩을 들고 군산 한길문고 앞에 섰다. 지역서점의 명맥을 이어오던 그곳이 하룻밤 사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을 급히 전해들어서였다. 침수 첫날, 소방차 두 대로도 감당이 안돼 오물수거차량까지 불렀지만 쉽지 않았다는 한길문고 이민우 대표의 말을 받아 적으며 서점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뼈대만 남은 책장들이 버려진 관처럼 쓰러져 있고, 세지도 못할 책들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널부러져 있었다. 책은 무려 10만권이라고 했다. 9년 간 쌓아온 서점의 모든 서류가 있는 컴퓨터도, 끝내 복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간 거지요.”
그의 말이 어떤 상징처럼 들려왔다.
자발적으로 모인 군산 시민들은 흙탕물 속에서 한 권 한 권 책을 건져냈다. 50일 동안 자원봉사자 2500여 명이 한길문고를 찾아 살뜰하게 정리하고 청소했다. 책을 폐지로 처분하자 손에 남은 돈은 고작 220만 원이었지만, 한길문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을 얻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날을 시민들의 힘으로 극복하고 다시 재기한 이민우 대표는 “앞으로도 작가 초청 강연과 문화행사를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시민 사회의 격려와 용기, 시민들의 한 땀 한 땀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기적임을 잊지 않고 여생을 다해 갚겠다고 말이다.
이제 그의 뒤를 이어 아내 문지영 씨가 한길문고에 더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고 있다. 2012년 첫 생일을 맞은 막내 딸 초원이는 어느덧 초등학생이 됐다.
“세 아이들의 이름이 ‘새벽’, ‘한길’, ‘초원’인데 ‘새벽에 일어나 한 길로 걸어서 넓은 초원에 이르라’는 뜻으로 아이 아빠가 지었어요. 이 말뜻이 바로 우리 서점이 지켜야할 가치라 생각하면서 하루 하루 나아가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돗자리 깔고 캠핑을 한다고?
군산 한길문고에서 독서캠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지난 6월 26일 저녁, 서점은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 분주했다. 평소엔 작가 강연회나 동아리 모임이 열리는 서점 한쪽 공간에 의자 대신 넓은 돗자리가 넉넉하게 깔렸다. 한가운데는 캠프파이어 장작 인형이 촛불과 함께 놓여 있었고 앞쪽에는 색깔별로 포장한 커다란 선물 박스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한길문고 앞에 살고 있는 군산 시민 배지영 동화작가가 마이크를 들었다.
7시가 가까워오자 엄마 손 아빠 손을 잡고 달려온 초등생 아이들이 속속 자리에 둘러앉았다. “라면 먹고 싶은 사람 이리 오세요!” 김우섭 점장이 외치자 몇몇 아이들이 동시에 일어나 긴 탁자 앞에 쪼르르 줄을 선다. “배고파요, 빨리 주세요!” “이 바나나 먹어도 돼요?” “라면이랑 짜파게티 둘 다 먹을래요!” 재촉하는 아이들 앞에 문지영 대표와 점장 손이 점점 바빠진다. 탁자에는 라면과 간식뿐 아니라 함께 온 부모님들을 위한 시원한 캔맥주와 과자도 놓여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느냐며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숨길 수 없는 어른들도 곧 열릴 캠핑을 즐길 준비가 된 듯하다. 8살 서연이와 함께 온 아빠 조용철 씨(37·수송동)는 “십년 넘게 책만 사다가 이런 행사에 참여해보는 건 처음”이라며 “코로나 때문에 먼 데 놀러 가지 못해 답답해하는 딸에게 남다른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손잡고 오게 됐다”고 말했다.
독서캠프 참여자 16명은 5개 팀으로 나눠 각각 팀명을 정했다. 사회자인 배지영 작가가 퀴즈를 내면 손을 번쩍 들며 팀명을 외쳐야 하는데 문제를 내기 무섭게 “쌍둥이팀!” “감자팀!”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은 시종일관 넘치는 에너지로 주저 없이 퀴즈를 풀어나갔다. 책을 읽어야 맞출 수 있는 제목이나 작가 이름을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도 한치 망설임 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이곳만의 대체할 수 없는 생동감을 느꼈다.
2시간 가까이 동네서점에서 돗자리를 깔고 부모님과 둘러앉아 동화작가와 함께 독서 퀴즈를 풀며 발랄하고도 진지한 저녁을 보낸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한길문고가 준 색다른 서점의 모습을 끝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게 된다고? 가능해?’ 바라보면서도 어쩐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지만, 한길문고라 가능한 풍경은 이것뿐 아니었다.
△엉덩이로 책 읽기, 들어보셨나요?
‘1시간 동안 앉아서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을 드립니다’
2018년 크리스마스, 한길문고에서는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라는 기발한 독서 행사가 열렸다. 서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1시간 동안 책 읽는 어린이는 2018년 최저시급 7,530원에 해당하는 한길문고 상품권을 받을 수 있는 이 행사에 서점은 북새통을 이뤘다. 읽을 책은 준비해온 아이들이 빽빽이 서점에 앉아 잠자코 책을 읽고 있는 한길문고의 현장 사진을 보면 어쩐지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된다. 5분도 앉아 있기 힘든 어린이들이 1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라니.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다’ ‘누가 생각해냈을까’하며 궁금증은 물론, 오래된 동네서점이 이렇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행사를 열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 서점인과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2018년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작은 서점 지원사업’에 선정된 한길문고는 창작활동이 활발하고 아이디어가 뜨거운 군산 출신 작가이지 군산 시민 배지영 작가를 상주작가로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며 단조롭던 문학 행사에 남다른 감각과 개성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점은 작가의 아이디어와 콘텐츠를 수혈 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행사에 따른 대관료를 지원받을 수 있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고, 작가는 문학 관련 일자리를 얻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데다 창작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서로 윈윈하는 지점이 많다.
좋아하는 서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는 배지영 작가는 서점에서 상주작가로 활동하는 것에 관해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을 서점에서 언제든 만나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자 활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한길문고에서 독서캠프가 열린 날,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한 어린이가 배지영 작가를 알아보고 엄마와 함께 책을 사서 직접 사인을 받기도 했다.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서점의 뾰족한 비결, 작가라는 동반자와 함께하며 시너지효과를 퍼뜨리는 중이다.
△한길문고가 계속 지역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
고금자 씨(74·문화동)는 “한길문고에서 열리는 작가 강연회와 문화행사에 재작년부터 꾸준히 참여하면서 삶의 질이 3배는 높아진 것 같다”면서 “서점에 누구보다 실버세대가 많아야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구태의연하게 늙지 않으려면 동네서점에 자주 머무르며 생을 돌아보고 현재를 사유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서점에 오면 직접 책을 만질 수 있고, 마음에 들면 펼쳐볼 수 있고, 그러면서 생각지도 못한 책을 만나 사서 오는 ‘예외성’이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상근 씨(61·나운동)도 “존재만으로 자연스럽게 독서 문화를 이끌고 있는 한길문고는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서점이자 감동적인 장소”라며 “역경을 견디고 담담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는 한길문고에 계속 힘을 실어주는 방법은 자주 찾아 책을 사보고 스스로 변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지영 대표는 “처음에는 책이 좋아서 서점을 열었다면 이제는 서점이라는 공간 자체가 좋아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며 “동네 서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어쩌면 투쟁이라는 말에 비유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서점의 이유와 가치를 알고 찾아와주는 시민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 잊지 못하는 서점이 있다. 한길문고가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키며 계속 열리는 희망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임주아 시인·물결서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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