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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출신 과거급제 어려워”

<이재난고> 확인 통해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 과거 차별 가능성 제기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이 과거에서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학술대회를 통해 제기됐다.

전북대 이재연구소가 지난 25일 교내 인문사회관에서 ‘이재 황윤석의 西行日曆과 科擧’를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는 황윤석이 전라도민이라는 이유로 과거제도에서 차별받았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연구소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인 경화사족과 교유를 확대하고, 서울에서 만난 실학자들을 통해 서학을 익혀 조정에서 인정받으려고 했던 사실을 2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재난고> 를 통해 확인했다. 조선후기 농업경제와 화폐유통에 대해서도 살폈다.

이 과정에서 <이재난고> 등 여러 저서에 대한 번역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문종 이재연구소장(전북대 사학과 교수)은 “이재 황윤석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관찬사서에 나오지 않은 조선시대 생활상과 경제양태 등을 연구하기 위해 기록 전반에 대한 번역을 진행해야 한다”며 “ <이재난고> 를 국가지정 문화재(보물)로 신청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제도와 황윤석

황윤석은 <이재난고> 에 1752년~1785년 총 15차례에 걸쳐 과거시험을 치른 경험을 상세하게 남겼다. 이 기록에는 관찬사서인 <조선왕조실록> 과 <승정원일기> , <일성록> 에 나오지 않은 과거의 종류가 나온다. 황윤석이 참가했던 과거, 소식만 들은 과거, 자격이 되지 않아 참가할 수 없는 과거 등 다양하다.

당시 수험생의 입장도 자세히 담고 있다. 황윤석은 과거를 치르기 전 출제자인 지배층(왕)의 출제의도를 정확하게 알려고 했다. 그해 새롭게 도입된 국가운영정책, 정치환경, 왕의 지식계층 관리 정책 등 다양하다.

김승룡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임금이 출제하는 ‘책문’을 잘 쓰기 위해선 정치·사회 현안을 대하는 왕의 태도를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며 “황윤석은 매일 왕의 동향과 발언, 인사정책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황윤석 같은 향촌 지식인이 완벽이 동향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면 벌열집안(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경력이 많은 집안) 후손들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동향을 알기가 용이했다.

 

전라도 차별 의식

<이재난고> 에는 전라도 인재들이 중앙정부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유영옥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18세기에 이르러 경(京)·향(鄕)의 경계가 확연해졌다”며 “이런 추세 속에서 호남은 서울 근기뿐만 아니라 호서나 영남보다 차별받았던 땅”이라고 설명했다.

송만오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도 “당시는 개인의 능력보다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고 부연했다.

실제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들의 문과 점유율 평균은 대략 6.7%로 경상도나 충청도에 비해 낮았다. 송 교수는 “전라도 출신이 문과에 급제하긴 어려웠다”며 “남원은 3.8년 만에 한 명, 전주는 5.2년 만에 한 명 정도 배출됐으며, 특히 황윤석의 고향인 흥덕(고창)에서는 71.7년 만에 한 명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황윤석은 소과엔 합격했지만 바로 관직엔 진출하진 못했다. 게다가 고관으로 향하는 문과의 벽은 평생 넘지 못했다.

 

경화사족과 교유관계

황윤석은 이조판서 정흥순과 전직 이조판서 서지수의 도움으로 어렵게 장릉참봉직(종 9품)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과 급제자가 아니어서 중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다. 결국 경화사족과의 교유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전라도 출신인 그의 입장에선 이들과의 관계가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루트였다.

<이재난고> 에는 황윤석이 교유했던 인물 18명이 거론돼 있다. 조정·정경순·홍봉환·홍계익·김상익 등 고위관료다.

다만 교유에는 원칙이 있었다. 유 교수는 “공과 사의 구분, 자신을 지키려는 지조, 선친이 맺은 교유의 연장을 계속 고수했다”며 “자존감을 지키고 올곧은 선비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화사족 역시 박학군자로 유명한 황윤석을 만나보려 했다”고 부연했다.

 

서학 수용과 사회경제 상황

<이재난고> 에 있는 ‘서행일력’에 따르면, 황윤석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토대로 수학과 유클리드 기하학, 마테오리치의 산수역법 등 서학을 접하고 익혔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도 서학 정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당시 명망 있는 인물인 홍대용과 이덕무를 통해서는 서양의 천문역법을 배웠다.

천기철 부산대 연구교수는 “황윤석은 박학으로 명망을 얻어 영조에게 인정을 받았다”며 “1783년 호남의 문학극망지사(文學極望之士)로 추천돼 외국에 갈 기회까지 얻었으나, 모친 상중이라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이재난고> 는 18세기 사회경제적 상황도 드러낸다. 황윤석은 집안이 가진 토지면적과 농업 경영 형태(지주-전호제), 동전과 같은 화폐지출 내역, 고리대, 노비들의 태업 등 당시 경제문제를 기록했다.

이정수 동서대 일본어학과 교수는 “이재난고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보를 제공한다”며 “학술서적 시장, 지방재정의 운영, 가정경제의 운영, 산송, 하급관료와 수령의 생활 등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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