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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

현실은 변화를 겪으며 요동친다. 이 변화는 감각적이고, 수량적이며, 실체적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예전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변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그 사이 농업 인구는 소멸하거나 소수화되고, 디지털 뇌를 장착한 새로운 문명인이 몰려왔다.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한 후기 탈산업사회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자기 착취를 일삼고 피로라는 만성적 질병에 찌들어간다.

이 변화를 긴 시간 단위로 조망하면, 도로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살림 규모는 커졌고, 명목상 가계 수입은 늘었다. 해외여행이 늘고, 집값은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음식점이나 음식 맛은 짜거나 달게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 변화의 품목이다. 짜고 단맛에 대한 선호가 일반화된 탓이라고 추측하지만 음식 맛이 왜 이토록 달고 짜게 되었는지 그 균일화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 수가 없다. 과거와 견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신문 구독자가 준 대신 스마트 폰,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색감이 화려하고, 촬영기법은 세련되었으며, 내용은 더 잔혹해졌다. 잔혹 범죄가 늘어난 현실을 머금은 탓일 테다. 하지만 피가 튀기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고문받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어느 사회에나 청년들은 사회의 최전선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고 실감한다. 이들이 사회 변화의 촉매이자 발화점이 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4·19혁명’ 세대, 일본 ‘전공투’ 세대, 프랑스 ‘68혁명’ 세대, 반문화·반전운동을 이끈 미국 ‘히피’ 세대의 중심은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청년세대는 취업절벽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곤경 속에서 ‘스펙 경쟁’을 하느라 제 존재 역량을 다 쏟는다. 이들은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에 분노로 들끓지만 불안과 강박을 안고 ‘생존 게임’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릴 뿐이다. 올해도 수능이 끝나고 50만명이 넘는 청년이 현실의 최전선으로 몰려나오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루저’라고 불리는 소득 하위집단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할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청년세대는 다른 취향과 감성, 시대정신, 마음가짐을 가진 개별자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청년을 한 묶음으로 호명하는 움직임은 늘 있어온 일이다. 라이프스타일의 특이점을 끄집어내 청년세대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는 미디어의 작명술은 감탄할 만하다. 그 작명술에 따르면 ‘88만원 세대’가 몰려왔다 빠져나가더니, ‘90년대생’이 오고, 지금은 ‘MZ세대’가 몰려온다. ‘MZ세대’가 물러난 자리를 또 새로운 청년세대가 채울 것이다. 과연 부쩍 척박해진 노동시장에서 구직 활동을 펼치는 오늘의 청년은 누구인가? 당신이 오늘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만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건설노동이나 배달노동을 하는 이 청년은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기성세대라면 그들은 당신의 딸과 아들이고, 혹은 동생이거나 조카일 것이다.

‘서바이벌’이 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현실은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TV에서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끄는 현상도 살아남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 청년세대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한다. ‘지옥’에서의 살아남음은 더 이상 가망 없을까? 우리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나는 청년세대에게 가느다란 희망이 될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자 한다. 시인은 “백번이나 망설이고,/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고 노래한다. 우리 앞에 무슨 시간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수정과 결단의 시간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현실을 혁신하려는 실존적 각성과 함께 행동에 나설 동기만 있다면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언제나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결단을 내리기엔 가장 빠른 시간이다. 청년 세대여, 포기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 지금은 “감히 한번 해볼까? 천지를 뒤흔들어볼까?”라고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할 순간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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