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古河) 최승범 선생님 영전에
고하 선생님. 어제부터 는개비가 온 누리를 아리잠직 뿌옇게 적시고 있습니다. 지상의 사물들이 너나없이 오랜만에 포근한 기분에 젖습니다. 마치 살아생전 선생님의 조곤조곤 따스한 어조의 세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너무 그럴 것은 없고”라며 불편한 세상사를 중용의 미덕으로 다스리는 모범을 보이셨지요. 특히 자신에게 엄격하고 철저했던 삶의 자세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전공필수였지요. 사람과의 관계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 잡는 시범을 몸소 보이셨지요. 이 풍진 세상을 허위허위 살아나가는 과객들에게 “줏대의 정신”을 강조하셨지요. 흔들고 흔들리는 본질을 지닌 세상에서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주체가 정신을 단단하게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요. 선생님. 이게 바로 지조와 절개를 숭상하는 매운 선비정신임을 다시 가슴 속 깊이 새깁니다.
선생님은 몸소 실천하신 그러한 삶의 지혜와 강령을 시조와 수필을 통해 설파하셨습니다. 바지런한 시인의 연찬은 여리시 오신 당신을 비롯하여 30여권에 이르는 시조집으로 발표되었지요. 그래요. 시집에는 내면에 살랑이는 미풍과 여유낙낙 담소를 즐기는 늘 푸른 소나무의 문학정신이 숨 쉬고 있지요. 그 선비의 문학정신은 세속에 함몰하지 않고 고결한 삶의 자세를 초지일관 유지하려는 긴장감으로 표명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선생님은 일상의 소박한 행복과 자족적 삶의 자세를 낭차짐하게 시조로 승화하셨지요.
선생님은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를 지닌 훌륭한 수필가이기도 합니다. 소박한 전통음식을 고아한 예술의 경지로 묘파한 풍미산책을 비롯하여 30여권에 이르는 수필집을 출간하셨지요. 선생님은 수필을 통해 전통에 대한 애정, 고전정신의 현대적 실천궁행, 한국적 자연의 본질 규명, 한국의 고유한 맛, 멋, 소리, 빛깔과의 교감, 선인들의 삶의 지혜 등을 맛깔나게 기록하였지요. 담담하고 정갈한 세상 읽기의 문체가 새삼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부박한 현대에 과거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은근한 전통의 안정감을 접목시키고자 한 것이지요. 물질과 욕망 중심의 자본주의적 삶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황폐를 극복하고 정서적으로 풍윤한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지요. 결국 선생님은 온고지신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균형 잡힌 선비 학자의 전범으로 돋을새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을 이정표 삼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시인, 작가, 학자들이 유유자적 뒤따르며 신작로를 닦겠습니다.
고하 선생님. 그래도 오늘 겨울치곤 푸근한 날씨입니다. 마치 잔잔하고 고요하고 정감어린 선생님 품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허허 아쉬운 듯, 허전한 듯, 남겨둘 줄도 알아야지” 선생님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립니다. 그립습니다. 선생님 이제 이승의 맑고 춥고 높았던 삶의 책장 덜퍽 덮으시고 훌훌 평화롭게 극락왕생하시길 바랍니다. 고하 선생님.
제자 양병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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