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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가담항설] (3) 서로 다른 문화 공존하는 전주 한옥마을(상) - 경기전 '성 안' 전동성당은 '성 밖'

조선시대 전각·서양 가톨릭 성당 태조로 두고 이웃 '전국 유일'
전주부성 남측 성벽 밖이었던 전동성당⋯성 안 경기전과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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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에서 바라본 전동성당.

매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한국 대표 관광지로 부상한 전주 한옥마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을 꼽는다면 단연 ‘경기전’과 ‘전동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천주교 전주교구인 전동성당은 한옥마을 입구 태조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있다. 

전주 시민뿐 아니라 한옥마을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은 이 고풍스런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두 건물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곤 할 것이다. 조선시대 전각과 서양 가톨릭 성당이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가톨릭의 오래된 성당이 왕조의 갖은 탄압을 뚫고 조선 왕실의 태조를 모신 전각과 얼굴을 바로 맞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19세기 말 전주 한옥마을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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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 지형도.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에 남측 성벽이 지나고 있다.

△ 전주부성 성벽 있던 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절묘한 구조는 두 건물 사이를 지나는 태조로가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주부성의 남측 성벽 자리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다가동‧중앙동 일대에 있던 전주부성이 철거되기 전,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는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에서 이어지는 성벽이 지나는 길이었다. 당시 남측 성벽은 경기전∼전동성당을 거쳐 경기전 동문‧중앙초교 사거리에서 동측 성벽과 연결됐다.

오늘날과 달리 100년 전 경기전은 전주부성 안, 전동성당은 밖에 위치했으며, 두 건축물은 성벽으로 명확히 구분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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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동성당의 윤지충과 권상연 순교 기념 동상.

△ 풍남문 밖 처형터에 지어진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914년 윤지충 바오르 등이 순교한 천주교 성지인 전주부성 풍남문 인근 ‘남문처형터’에 완공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 3대 성당이라 불리는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했으며,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가 얼룩진 풍남문 성벽을 헐어 성당 주춧돌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로 그동안 조정으로부터 박해받던 국내 천주교 포교가 허용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숨어 지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전주부성 인근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천주교 전주교구는 전주부에 성당을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성당의 신축 부지로 순교자들의 영혼이 잠든 남문처형터가 선정됐다. 

 

△ 동양 유교 건축물과 서양 로마네스크 양식 공존 "전국 유일"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양에서 넘어온 천주교 포교를 승인하면서도, 경기전과 같이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전각 근처에 성당이 자리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500년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국가 질서를 유지해 온 조선 왕조 입장에서, 왕실의 창업자인 태조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서양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주부성 안에 있던 경기전과 달리 성당의 공사 부지로 선정된 남문처형터는 성 밖에 있었기에, 두 건물 사이는 성벽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이라는 장치를 공간적 구분의 명확한 기준으로 여겼다.

전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영’, 귀빈을 접대하던 ‘풍패지관’ 등 지방 핵심 기구가 모두 전주부성 안에 자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성 바깥 중간지역은 왕실 입장에선 관심 밖 ‘외지’일 뿐이었다.

덕분에 비록 경기전의 맞은편이었지만, 엄연히 성 바깥이었던 전동성당 부지는 행정의 별다른 방해 없이 1889년 성당으로 설립된 이후, 1908년부터 본격적인 성당 건립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공사가 한창인 1911년 전주부성이 철거되면서 경기전과 전동성당은 마땅한 장애물 없이 서로 마주 보게 됐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형태는 전국을 뒤져봐도 오직 전주 한옥마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조선 왕실의 위패를 모신 종묘 인근에 종로성당이 있기는 하나, 누워서 닿을 거리인 경기전‧전동성당과 달리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의 종로성당 건물도 1987년에 지어져 조선 왕조가 존재하던 19세기 말부터 신자를 받은 전동성당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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