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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가담항설](6) 일생 바쳐 500년 역사 지켜낸 전북 선비들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었는데 못난 선비는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아침저녁 그저 지키기만 했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긴 뒤, 매일 그 곁을 지킨 한 선비가 남긴 말이다. '안에 숨겨진 보물이 있는 산'으로 불리는 내장산(해발 796m)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431년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됐던 곳이다. 일본군을 피해 내장산 깊은 산중 절벽 위 '은적암'이라는 곳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이 옮겨져 1년 간 보존된 역사가 있다. 지난 20일 오전 그날의 역사를 떠올리며 실록을 옮기던 선비와 같이 책 30권을 짊어진 채 내장산 은봉암을 향했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내장산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실록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총 8개의 다리로 이뤄진 실록길은 정읍시가 조선왕조실록 보존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자 내장산에 조성한 길이다. 지금은 반듯한 길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엔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이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1시간 남짓 수풀이 우거진 실록길을 지나 45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실록이 보관됐던 은봉암이 자리해있었다. 거친 산세 속에 파묻혀 있는 형국이라 무언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지금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된 길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을 1000여 권이 넘는 실록을 짊어진 채 올랐던 선비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땅한 길도, 운송할 수단도 없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군 피해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진 최후의 '전주사고본 실록' 기록에 '진심'이었던 조선은 개국 이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열심이었다. 실록은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와 생태계까지 당대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그런 실록의 소실을 막고자 조선 왕실은 서울의 춘추관 사고, 충주 사고, 성주 사고, 전주 사고 등 전국 4곳의 사고에 실록을 각각 나눠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 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 실록만 온전히 남게됐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는 상황에서 전주까지 일본군의 침입을 받기 전에, 실록 이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선비 손홍록, 안의 등은 여러 논의 끝에 정읍 내장산을 실록의 보관처로 결정했다. 내장산은 산세가 거칠고 험해 일본군을 피해 실록을 숨기기에 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당시 64세의 안의와 56세의 손홍록은 이미 상당한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기꺼이 실록 운반에 나섰다. 이들은 전 재산을 털어 30명의 인부를 고용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태조어진 등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총 1368권의 국가 서적을 전주에서 내장산까지 운반했다. 나이에 불문없이 실록이 담긴 60여 개의 궤짝을 짊어진 상태로. △'1호 문화재 지킴이' 실록 보존에 평생 바친 안의와 손홍록 그렇게 1592년 6월22일, 실록은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 40m 높이의 내장산 용굴암과 은적암에 옮겨졌다. 이곳은 안에서 밖은 보이지만, 반대로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전화나 통신이 없던 조선시대에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록과 함께 내장산 깊숙히 들어온 안의와 손홍록 등에겐 더더욱 그랬다. 이들은 전주에 일본군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우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매 순간 일본군의 습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의와 손홍록은 370일의 시간 동안 7평 남짓의 은적암에서 교대로 숙식하며 무더위와 혹독한 추위, 궃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실록의 곁을 지켰다. 이후 실록을 내장산에서 충청도 아산과 황해도 해주, 강화도와 묘향산 등으로 옮길 때에도, 안의와 손홍록은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실록과 항상 함께였다. 이후 1596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던 안의는 실록을 강화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안의가 사망해 일기가 끝을 맺었음에도, 손홍록은 홀로 실록 보존을 이어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해 또 다시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그는 묘향산으로 실록을 옮기고 그곳에서 당직을 섰다. 이렇듯 실록 보존에 평생을 바친 안의와 손홍록은 공로를 인정받아 고향인 정읍 칠보면의 남천사에 배향됐다. 이에 대해 매년 6월 22일 내장산에서 '문화재지킴이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정읍문화원 관계자는 "만약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태조부터 명종대까지의 조선 초중기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번 문화재지킴이의 날을 맞아 우리 역사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한 선조들의 희생과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6.21 18:02

[전북 가담항설](5) 전북경찰 75명 vs 빨치산 2500명 '격전'

호국‧보훈의 달인 6월 1일, 낮 12시쯤 정읍시에 있는 칠보수력발전소를 찾았다. 뜨거운 햇살이 발전소의 면면을 화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흔히 칠보발전소라고 불리는 이곳은 1945년 첫 발전을 시작한 남한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다. 이날 발전소 뒷산에 오르자 15m에 육박하는 거대한 탑이 그 위용을 뽐냈다. 인근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을 노인들에게 탑의 유래를 물었다. 탑의 정체는 오래전, 발전소를 지키다 전사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었다. 칠보면의 역사와 함께한 이들에게 칠보발전소는 단순 송전 시설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간직한 장소였다. 한적한 시골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 오래된 발전소가 과거 6.25전쟁 당시 전황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전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남한 전력 끊고자 칠보발전소 포위한 빨치산 북한의 남침으로 개전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에 놓여 있었다. 전방의 국군과 유엔군은 100만 중공군에 밀려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는 등 후퇴를 거듭했고, 후방에선 공산주의 비정규군인 일명 '빨치산'이 군경을 교란하며 주요 국가 시설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빨치산이 우선적으로 노렸던 것은 정읍 칠보발전소였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전력 공급을 책임지는 국가 1급 시설이었다. 이곳이 마비되면, 남한 지역은 전력 공급이 완전히 끊긴 채 어둠 속에서 적군에 맞서야 할 형국이었다. 1951년 1월 10일, 빨치산 전북도당은 2500여 명의 대부대를 총동원, 칠보발전소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칠보발전소를 지키는 병력은 45명의 경비부대가 전부였다. 신속한 병력 지원이 없으면 칠보발전소가 빨치산의 수중으로 넘어갈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방의 국군은 물밑 듯이 쏟아지는 중공군을 막느라 지원 병력을 차출할 여력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칠보발전소를 구할 부대는 전북 경찰뿐이었다. 결국 차일혁 경무관(당시 총경)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105명만이 급히 소집돼 칠보발전소 탈환 작전에 나서게 됐다. 이마저도 피난민을 지원하느라 이동 차량이 없어 30명의 대원을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 “1대 30” 극적인 칠보발전소 탈환 이제 2500명에 달하는 빨치산과 맞서 싸울 경찰 병력은 75명으로 줄어들었다. 칠보발전소를 구하기 위해선 1명의 경찰이 30명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차일혁 경무관은 기지를 발휘했다. 발전소로 향하는 경사진 모퉁이 길을 이용해 일종의 기만전술을 쓰기로 한 것이다. 차 경무관은 4대의 차량을 빨치산들이 잘 보이지 않는 구부러진 곳에 세운 뒤, 1대씩 전조등을 켠 채 출발시켜 수십 차례 순회했다. 이를 본 빨치산은 경찰이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오인해 포위를 풀고 발전소 내부로 후퇴했다. 이 틈을 노린 차 경무관은 부대를 이끌고 인근 칠보지서에 진입, 고립된 칠보면민을 구출했다. 차 경무관의 기만전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출한 면민들을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한 채 칠보초교로 모이게 했고, 그 방면으로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유도했다. 그리곤 박격포를 앞세워 발전소 정문으로 기습 돌격, 칠보발전소와 인근 9개 능선 고지를 모두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기쁨도 잠시, 대병력이 온 줄 알았던 빨치산은 경찰 병력이 극소수라는 점을 알게 되자, 발전소를 향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차일혁 부대는 탄환이 떨어져 전멸 직전에 몰렸지만, 죽음을 각오한 몇몇 대원이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해 실탄을 보급하는 등 분전 끝에 발전소를 사수해냈다. 이날 전투로 사살한 빨치산이 68명에 노획한 군수 물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 아군은 12명이 희생됐다. 75명이 2500명을 격퇴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승리였다. 그러나 빨치산은 엄연히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이므로, 이들에 맞선 전북 경찰의 노력은 전방에서의 굵직한 전투에 밀려 오늘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북 군경전몰유족회 관계자는 "전방의 국군을 대신해 수많은 지역 경찰과 학도병이 후방의 빨치산에 맞서 지역 사회를 지켰다"며 "이들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6.04 16:25

[전북 가담항설] (4)'콩쥐팥쥐' 고향은 - 전주성 서문 밖 30리 '완주 앵곡마을'

전북엔 도민 사이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전래동화가 곳곳에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전래동화를 꼽자면, 단연 ‘콩쥐팥쥐전’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권선징악형 전래동화라 할 수 있는 콩쥐팥쥐전은 전북에서 탄생한 향토 동화다. 그러나 콩쥐팥쥐전은 알아도 그 유래의 배경이 전북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도민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어린이에겐 다소 잔혹한 콩쥐팥쥐전의 결말도 여러 이야기가 뒤섞여 중구난방식으로 세간에 떠돌고 있기까지 하다. 이에 도내 한 작은 마을에서 탄생한 전북의 이야기, 콩쥐팥쥐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해 자세히 파헤쳐본다. △콩쥐‧팥쥐의 고향은 어디? ‘전주성 서문 30리 밖 최만춘 댁’. 콩쥐팥쥐전에서 밝힌 주인공 콩쥐와 팥쥐의 집 주소다. 물론 콩쥐와 팥쥐 모두 실존 인물은 아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콩쥐팥쥐전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 분포를 보이던 관련 설화를 1914년 대창서원에서 각색해 출판한 고전소설이기 때문이다. 콩쥐팥쥐전의 배경인 ‘전주성 서문 밖 30리’는 오늘날 완주군 이서면과 김제시 금구면 일대를 지칭한다. 인근 도로 명칭도 ‘콩쥐팥쥐로’인 만큼 이곳 지역과 콩쥐팥쥐의 연관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완주군과 김제시는 지난 2005년부터 지역에 남아있는 콩쥐팥쥐 관련 명칭을 근거로 서로 ‘콩쥐팥쥐의 본고장’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완주군은 이서면 앵곡마을, 김제시는 금구면 둔산마을이 '콩쥐팥쥐의 고향'이라고 각각 주장했다. 실제로 완주군 앵곡마을과 김제시 둔산마을은 거리상 200m 떨어진 이웃 마을이기에 두 마을의 주장 모두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췄지만, 학계는 여러 고문헌 등을 근거로 완주군의 손을 들어줬다. 콩쥐팥쥐전의 배경인 ‘전주성 서문 밖 30리’의 정확한 위치는 완주군 이서면과 정확히 들어 맞으며, 이곳에 '콩죽이 팥죽이' 등 관련 지명이 상당수 남아있는 점을 고려했다는 설명이다. △“어린이 동화맞아?” 콩쥐를 죽인 팥쥐를 처단해 계모 배 씨에게 먹인 원님 완주군 앵곡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콩쥐팥쥐전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전주성 서문 밖에 사는 최만춘은 아내 조씨에게서 콩쥐라는 딸을 두었다. 이후 아내 조 씨가 세상을 떠나자, 최만춘은 팥쥐라는 딸을 가진 배 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배 씨는 친자식인 팥쥐만을 총애하면서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시련을 주는 등 콩쥐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착한 콩쥐는 여러 동물의 도움을 받아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고, 선녀가 준 꽃신의 인연으로 고을 원님과 혼인까지 하게 된다. 이후 콩쥐를 괴롭히던 팥쥐와 계모는 벌을 받고, 콩쥐는 원님과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콩쥐팥쥐전은 이처럼 아름다운 묘사만이 가득한 동화는 아니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소 어린이가 받아들이기에는 잔혹한 부분이 내포돼있기 때문이다. 실제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대창서원판 ‘콩쥐팥쥐전’의 결말 부분에 따르면, 팥쥐는 원님과 혼인한 콩쥐를 연못에 빠트려 익사시키고 자신이 콩쥐 행세를 하며 원님을 속인다. 이후 부활한 콩쥐에 의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원님은 팥쥐를 거열형(사지를 밧줄에 묶어 수레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한 뒤, 그 시체를 젓갈로 담가 계모 배 씨에게 보낸다. 이에 배 씨는 극도로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즉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콩쥐팥쥐전의 결말은 오늘날 받아들이기엔 잔혹한 부분이 농후해 시중에 유통되는 어린이용 동화나 책에서는 ‘팥쥐와 계모 배 씨가 죄를 뉘우치고 콩쥐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형식으로 순화돼 출판되는 경우가 많다. 콩쥐팥쥐전의 본고장인 앵곡마을에 남아있는 이야기 속에서도 이 같은 잔혹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역 전래동화 활용한 관광 콘텐츠 마련 앞서 콩쥐팥쥐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한 완주군은 콩쥐팥쥐를 완주 대표 브랜드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콩쥐팥쥐 살림집과 외갓집, 연못 등을 재현한 테마마을 조성과 함께 군립 도서관의 명칭을 '콩쥐팥쥐도서관‘으로 짓는 등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지자체 차원에서의 노력에도, 여전히 전래동화 콘텐츠를 통한 관광 효과는 미비한 실정이다. 현재 콩쥐팥쥐마을의 방문객이 하루 평균 100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이곳을 단순 캠핑장이나 숙박시설로 알고 찾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남원시 아영면에 조성된 '흥부마을'도 마찬가지다. 전래동화 '흥부전'의 본고장인 이곳 역시 관련 테마마을을 조성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관광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콩쥐팥쥐마을 관계자는 "방문객을 상대로 자체적으로 이곳이 콩쥐팥쥐 본고장임을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앞으로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전래동화를 접목한 다양한 관광 문화콘텐츠 마련에 힘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5.11 15:37

[전북 가담항설] (3) 서로 다른 문화 공존하는 전주 한옥마을(하)- 근대 한‧일 건축물 공생

전주 한옥마을은 25만㎡ 부지에 700채가 넘는 한옥이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 한옥촌이지만, 그 명성과 규모에 비해 정작 역사는 100년이 채 안 된다. 수백 년간 형성돼 오늘에 이른 서울 북촌과 경주 한옥마을과 비교하면 무척 짧은 편이다. 이로 인해 전주 한옥마을에서 전통 한옥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658채의 한옥은 대부분 유리로 만든 창문과 여닫이문, 화장실까지 실내에 갖춘 근대 한옥에 가깝다. 특히, 태조로를 중심으로 경기전 방면엔 일제시대 공공 기관으로 쓰이거나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일본식 가옥의 모습도 남아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 한옥촌이라기보다는, 근대 한옥과 일본식 가옥이 공존하는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일본 상인 피해 형성된 전주 한옥마을 본래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중앙동‧다가동 일대엔 1388년 축성된 이후 500년 넘게 전주의 중심지로서 기능한 전주부성이 존재했다. 당시 전주의 도심이라 할 수 있는 전주부성 안에 거주하려면 신분이 높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양반층이어야 했고, 자연스레 성문 밖 중간지역은 상인이나 천민 등 서민계층으로 채워지게 됐다. 이러한 거주 형태가 무너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1911년 일제가 '폐성령'을 실시해 풍남문을 제외한 전주부성 성곽을 모두 철거하자, 서문 밖 전주천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부성 중심 상권 일대로 거주지를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났고, 1930년대에 이르자 전주부성 안이었던 중앙동·다가동 일대는 이곳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들이 지은 일본식 가옥이 가득차게 됐다. 반대로 점차 풍남문 밖 교동·풍남동 일대엔 일본인에 대한 반발로 뭉친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옥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팔작지붕이 늘어선 곡선 형태의 한옥’이 가득 찬 전주 한옥마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 한옥마을의 정체성·진정성 고려한 정책 필요 기존 전주부성 안에 살던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한 대립의식으로 성 밖에 새로운 한옥촌을 형성하자 성곽이 있던 태조로를 중심으로 양 집단의 거주 형태가 나뉘게 됐다. 실제로 오늘날 경기전 인근 가옥 일부는 내부 가운데 자리에 복도가 놓이는 등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기법을 보여주며, 2층 가옥에 한국식 기와지붕을 얹어놓기만 한 혼합 가옥 형태다. 게다가 경기전 동문 방향엔 1927년부터 일제시대 경찰서장의 관저 등 일본식 공공 기관 건물도 남아 있다. 반면, 전동성당에서 전주향교 인근의 가옥들은 일본식 건축기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서울 북촌과 비슷한 형태의 단층집으로 구성된 한옥이다. 사실상 전주 한옥마을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본식 가옥과 한옥 수백여 채가 공존해 역사적·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복합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이 형성한 한옥촌은 일본인이 남긴 일본식 가옥에 밀려 관광객의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다.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는 경기전 인근은 연일 수많은 방문객으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는 반면, 근대 한옥촌이 형성된 전동성당∼전주천 인근은 발길이 끊겨 대부분 임대나 매매 현수막이 걸려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는 전동성당 방면 단층 가옥이 관광 상품으로서 관광객의 이목을 끌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각종 문화시설이나 먹거리 점포 등이 일식 가옥이 혼재된 경기전 방면에 밀집된 탓이다. 이에 대해 전북대학교 한옥건축학과 한 교수는 "한옥마을은 그저 박제된 전통 마을이 아닌, 근현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을 추구해온 삶의 터전"이라며 "한옥 뿐만 아니라 일본식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된 복합 공간으로서 한옥마을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고루 살린 정책을 지자체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5.02 15:45

[전북 가담항설] (3) 서로 다른 문화 공존하는 전주 한옥마을(상) - 경기전 '성 안' 전동성당은 '성 밖'

매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한국 대표 관광지로 부상한 전주 한옥마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을 꼽는다면 단연 ‘경기전’과 ‘전동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천주교 전주교구인 전동성당은 한옥마을 입구 태조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있다. 전주 시민뿐 아니라 한옥마을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은 이 고풍스런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두 건물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곤 할 것이다. 조선시대 전각과 서양 가톨릭 성당이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가톨릭의 오래된 성당이 왕조의 갖은 탄압을 뚫고 조선 왕실의 태조를 모신 전각과 얼굴을 바로 맞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19세기 말 전주 한옥마을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 전주부성 성벽 있던 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절묘한 구조는 두 건물 사이를 지나는 태조로가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주부성의 남측 성벽 자리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다가동‧중앙동 일대에 있던 전주부성이 철거되기 전,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는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에서 이어지는 성벽이 지나는 길이었다. 당시 남측 성벽은 경기전∼전동성당을 거쳐 경기전 동문‧중앙초교 사거리에서 동측 성벽과 연결됐다. 오늘날과 달리 100년 전 경기전은 전주부성 안, 전동성당은 밖에 위치했으며, 두 건축물은 성벽으로 명확히 구분돼 있었던 것이다. △ 풍남문 밖 처형터에 지어진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914년 윤지충 바오르 등이 순교한 천주교 성지인 전주부성 풍남문 인근 ‘남문처형터’에 완공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 3대 성당이라 불리는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했으며,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가 얼룩진 풍남문 성벽을 헐어 성당 주춧돌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로 그동안 조정으로부터 박해받던 국내 천주교 포교가 허용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숨어 지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전주부성 인근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천주교 전주교구는 전주부에 성당을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성당의 신축 부지로 순교자들의 영혼이 잠든 남문처형터가 선정됐다. △ 동양 유교 건축물과 서양 로마네스크 양식 공존 "전국 유일"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양에서 넘어온 천주교 포교를 승인하면서도, 경기전과 같이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전각 근처에 성당이 자리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500년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국가 질서를 유지해 온 조선 왕조 입장에서, 왕실의 창업자인 태조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서양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주부성 안에 있던 경기전과 달리 성당의 공사 부지로 선정된 남문처형터는 성 밖에 있었기에, 두 건물 사이는 성벽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이라는 장치를 공간적 구분의 명확한 기준으로 여겼다. 전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영’, 귀빈을 접대하던 ‘풍패지관’ 등 지방 핵심 기구가 모두 전주부성 안에 자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성 바깥 중간지역은 왕실 입장에선 관심 밖 ‘외지’일 뿐이었다. 덕분에 비록 경기전의 맞은편이었지만, 엄연히 성 바깥이었던 전동성당 부지는 행정의 별다른 방해 없이 1889년 성당으로 설립된 이후, 1908년부터 본격적인 성당 건립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공사가 한창인 1911년 전주부성이 철거되면서 경기전과 전동성당은 마땅한 장애물 없이 서로 마주 보게 됐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형태는 전국을 뒤져봐도 오직 전주 한옥마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조선 왕실의 위패를 모신 종묘 인근에 종로성당이 있기는 하나, 누워서 닿을 거리인 경기전‧전동성당과 달리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의 종로성당 건물도 1987년에 지어져 조선 왕조가 존재하던 19세기 말부터 신자를 받은 전동성당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24 17:15

[전북 가담항설] (2) 지금은 꽃동산, 100년 전엔 동학농민군 피 물든 '완산칠봉'

​전국적인 꽃놀이 명소로 소문나면서 매년 2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전주 ‘완산칠봉 꽃동산’. 지난 주말에도 만개한 봄꽃을 즐기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이곳을 찾아 완연한 봄의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120여 년 전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고, 수백 수천의 민초들이 지배층의 수탈에 맞서 목숨을 바쳤던 처절한 항쟁의 현장이었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핀 꽃동산의 이면에는 이들의 한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은 얼마나 될까. 완산동에 터를 잡고 오래 살아온 주민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학농민군이 완산칠봉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894년 4월 완산칠봉에서 벌어졌던 민초들의 항쟁 현장을 되짚어봤다. △전주화약에 가려진 ‘완산전투’ 완산전투는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산칠봉에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진압을 위해 한양에서 파견된 조선 중앙군인 경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다. 그러나 완산전투는 '전주화약'에 가려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이 접하는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 이후 별 어려움 없이 조정과 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완산전투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1894년 4월28일부터 5월3일까지 8일간 완산칠봉 등지에서 경군에 맞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 한양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부대가 전주성에 도착해 포위를 시작했다. 전주성을 포위한 경군의 규모는 1500명이었으며, 이들은 서양식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 등을 갖춘 조선 최정예 신식 군대였다. 홍계훈은 부대를 세 군데로 나눠 각각 오늘날 신흥고등학교 인근 다가산 황학대와 한옥마을 오목대, 그리고 완산칠봉 등지에 배치했다. 이후 평지성인 전주성을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크루프 야포를 동원한 포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임진왜란 당시에나 쓰이던 ‘화승총’·‘천보총’ 등을 다루던 동학농민군에게 500m 밖에서 날라오는 경군의 포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경군이 쏜 포탄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 떨어지기도 하는 등 전주성 곳곳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포위망을 뚫고자 공세를 감행했고, 이내 완산칠봉을 중심으로 양측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3만 명에 달하는 동학군은 천보총과 갑주를 갖춘 기병을 앞세워 공세를 퍼부었으나, 언덕 위에서 동학군을 내려다보며 조준 사격할 수 있는 경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을 총탄으로부터 지켜주던 장태(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이어 붙인 방어구) 역시 언덕 지형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경군은 당대 최신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진지마저 구축한 상태였고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압도적인 화망에 밀려 패퇴했다. 전투 직후 홍계훈이 조정에 올린 ‘양호초토등록’에 따르면 8일간 세 번의 교전 끝에 완산칠봉 산자락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해 경군은 전사자 1명과 부상자 2명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무관심 속 잊혀진 동학농민군 발자취 완산전투는 당시 전주성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 됐던 것을 감안한다면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이 수세에 몰린 전투였으며 청일 양국의 파병으로 인해 당황한 조선 조정이 급하게 전주화약을 체결해 마무리 지었고, 이에 묻힌 면이 있다. 현재 완산칠봉에 있는 완산전투 기념 시설은 관련 내용을 기술한 ‘동학전적비’가 유일하다. 해당 비석은 80년대 건립된 이후 오랫동안 관리 기관 없이 방치되다 보니 부식이 심하게 이뤄져 육안으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지난 1991년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기념해 민간단체가 건립한 ‘전주성입성비’의 경우 기념비 하단에 새겨진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교리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울 보(輔)’가 ‘보전할 보(保)’로 잘못 새겨져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현재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9년 전주시가 건립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인 ‘녹두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인근 꽃동산을 찾은 연 평균 수십 만 명의 관광객에 비해 방문 인원이 현저히 적은 실정이다. 사실상 관련 지식이 없다면, 완산칠봉을 찾은 방문객이 이곳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셈이다. 이에 대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완산칠봉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사한 수많은 농민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역사적 현장이지만 유해 발굴을 위한 기본적인 학술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완산전투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지자체와 관련단체가 관심을 가지고 완산칠봉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13 16:04

[전북 가담항설] (1) 모악산에 김일성의 시조묘가 존재한다?

전북은 고대 마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천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그만큼 전북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탄생한 수많은 이야기가 지역 곳곳에 담겨 오늘날까지 도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담항설(街談巷說)'은 거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뜻한다. 전북에 살거나 여행하면서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과연 사실일까'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획보도에서는 그런 '오래된 소문' 중 특히 젊은 층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소문의 진실' 을 짚어본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김일성의 시조 묘가 있는 전주는 폭격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빈번해지는 요즈음 전주 시민의 입에 간간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김일성의 시조 묘'에 대한 이야기는 청소년부터 6·25 전쟁을 겪은 노인까지, 전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북한이 핵 쏠 징후가 보이면 무조건 전주로 피난 가야 한다'는 게시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과연 김일성의 시조 묘가 전주에 있고, 이러한 이유로 전주는 북한의 무력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모악산 현장을 가봤다. △ 김일성의 시조 묘가 있는 모악산 전주와 김제, 완주에 걸쳐 있는 모악산.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어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이곳 모악산은 북한 김정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전주 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는 곳이다. 북한의 무소속대변지 ‘통일신보’는 김일성 일가의 본관은 전주 김씨이며, 그의 시조 김태서가 1254년 고려 고종 41년에 일족을 데리고 전주에 정착했다고 지난 1999년 3월6일자를 통해 밝혔다.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에도 김일성의 조상이 전주에 살다 살길을 찾아 이북 지역으로 이주했고 증조부인 김응우 대부터 만경대에 정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일성 일가에겐 만경대뿐만 아니라 전주도 태생적 뿌리가 되는 관심 지역이었던 셈이다. 북한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가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특집에 따르면 지난 2000년 6월15일 환송오찬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신이 '전주 김씨'라고 밝혔으며, 그해 8월에는 방북한 언론사 대표 중 장영배 당시 전주MBC 사장에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에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전북경찰청은 김 위원장의 방문을 가정해 전주 김씨 시조 묘 주변에서 경호 훈련을 했으며 완주군은 모악산 입구와 시조 묘에 이르는 구역을 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전주 김씨 종친회는 김일성 일가와의 연관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전주 김씨 종친회 관계자는 "족보에 김일성 일가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고 했다. 1915년 편찬된 전주 김씨 대동보가 6·25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고, 이때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양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돼 전주 김씨와의 연관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 반공 정서를 고려해 전주 김씨 가문에서 김일성 일가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 한 것으로도 본다. △6·25 전쟁 당시 전주서 민간인 학살한 북한군 전주 김씨 종친회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회고록 등을 근거로 '김일성 일가의 본관이 전주 김씨' 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무력 공격에 대한 위험이 제기될 때마다 “전주 김씨 시조 묘가 있는 모악산 일대의 전주와 완주는 무사할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막연한 입소문과 달리 정작 북한군은 6·25전쟁 당시 전주를 점령한 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 후 한 달여 만에 전주를 점령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도내 우익 인사를 전주형무소(옛 전주교화소)에 수감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 900여 명에 우익 인사까지 모두 104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한군은 9월 28일 퇴각을 앞두고 전주형무소 재소자 500여 명을 공산주의 체제에 반하는 반동분자로 분류해 사살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며, 지난 2019년부터 전주시를 중심으로 유해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유해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전주대학교 한 교수는 “지난 2019년 9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조사를 마무리하고 희생자 293명의 유해를 수습해 봉안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북한군의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례로 볼 때 '김일성 시조 묘가 있는 전주는 폭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는 믿기 어렵다. 그런 비극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북한의 무력도발이 현실화된다면 전주와 완주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대북 군사 안보전문가인 북한대학원대학교 김동엽 교수는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기지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전주가 북한의 정밀타격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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