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니까, 어언 15년 전 일이다.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을 키우던 친구들이 뭉쳐서 모처럼 여름 여행을 떠났다. 숙소에서 꼬마들이 물놀이를 하는 동안 엄마들은 수박을 쪼개리라! 아이들이 첨벙거리며 놀 수 있는 야트막한 계곡이 있는 펜션을 예약하고 우리는 한 계절의 추억을 장만할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그날 물놀이를 하지 못했다. 폭우 뒤끝이라서 아이들이 첨벙거릴 예정이었던 야트막한 계곡은 지옥같은 굉음을 내는 폭포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놀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 계곡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였다. 여름 내내 이 날을 기다렸는데! 비싼 돈을 주고 이 곳을 예약했는데! 바위에 앉아서 발을 담그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늘이 개어서 햇빛마저 슬쩍슬쩍 오가는데, 우리에게 설마 정말로 TV에서 보듯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만큼 위태로운 장면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가 계곡물에 살짝 발을 담그자마자 슬리퍼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졌다. 구명조끼를 챙겨입은 서너 명의 꼬마들을 돌려세운 것은 내가 슬리퍼 한짝을 희생시킨 다음이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일어날 뻔했던 비극을 틀어막았으니 우리는 그 날 행운의 돌봄을 받았다. 하지만 철없었던 나는 슬리퍼 한짝을 분실한 것마저도 꽤나 아깝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이전까지 익숙했던 ‘집중호우’나 ‘호우경보’라는 표현을 넘어선 ‘극한호우’라는 표현을 처음 듣고 어리둥절했던 그 주에 나는 4개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첫 강연 장소였던 서울 동작구로 향하면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이해한 1인이 되었다. 폭우 속에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나는 정말로 산사태가 일어나지나 않을지 두려워했다. 그날 동작구에는 극한호우의 경보기준을 가뿐히 뛰어넘는 시간당 76.5mm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본격 극한호우가 한반도를 강타했던 기간에, 나는 호우의 중심지였던 대전과 전북을 오가며 나머지 3개의 강연을 소화했다. 가족의 여름여행 삼아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오자고 신나게 세웠던 모든 계획들을 떠올릴 틈도 없이, 엄청난 폭우로 눈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한가롭게 강변 산책로에 서있었을 나무들은 싯누런 강물에 퐁당 잠겼고 저지대 통로의 통행을 제한해 교통혼란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연신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날렸다.
어딜 가나 물웅덩이와 손상된 도로와 교통통제와 앞유리창이 보이지 않는 폭우의 연속이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골목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노란 가로대가 서있었고 차를 돌이킬 때마다 강연장소까지 도착 예정 시간은 큰 폭으로 푹푹 늘어났다. 폭우와 정체에 시달리는 도로에서 남편과 나는 다시 신혼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열정적으로 싸웠다. 남편은 이런 폭우 속에 무리하게 운전해서 가느니 조금 비가 멎을 때까지 휴게소나 식당에서 멈추어 기다리는게 낫겠다고 했고, 나는 정체된 장마전선 속에서 비가 멎을 리 없으니 지금 힘들더라도 달려서 비구름을 벗어나는게 낫겠다고 주장했다. 위험과 안전에 대한 여러 상식과 의견들이 있었으나 당장 우리 눈앞에 놓인 것은 ‘지금 저 길로 들어설 것인가’의 선택, 또 선택, 또다시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이 옳은지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또다시 행운의 도움을 받아, 폭우가 내내 함께한 이틀 동안 마지막 강연에 10분 늦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그 10분의 지연도 청중들의 너그러움으로 넉넉히 이해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앞창을 두드리는 극한 호우 속에서 비극을 알리는 뉴스를 들었다. 지난 3일간 우리를 돌려세운 수많은 노란 가로대들이 떠올랐고, 내가 행운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실은 많은 사람들의 묵묵한 보살핌이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 보살핌의 연결고리가 빠진 틈에 기어이 비극은 일어나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겪으신 유가족들에게 애통한 마음을 전한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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