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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건축기행] 용인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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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은 한국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 서품을 받았던 중국 상해의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다.  경인일보=임열수기자 

 

건축은 사람들의 여러 생활을 담기 위한 수단이다. 어떤 목적을 갖는 가에 따라 건축에 들어가는 기술과 구조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건축물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철학에 따라 여러 형태를 띄게 된다. 건축은 사람들의 생활을 담는 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과 닮는다.

한국지방신문협회는 공동으로 대한민국 각 지역의 건축물을 조명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팔도건축기행’은 지역의 랜드마크에서부터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건축물까지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해 건축물에 담긴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살펴본다.┃편집자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42번 국도를 달리다,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지쉬운 작은 골목길은 산자락에 다다라서야 끝이 나는데, 그 곳에 누군가 숨겨놓은 듯 작고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산으로 둘러쌓인 고즈넉한 공간 위로 들어선 새하얀 외벽의 건물. 회색의 지붕 위로 삐친 작은 십자가와 ‘天主堂(천주당)’이라는 한자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오는 이들을 반겨주는 이 곳은 ‘은이성지 김가항성당’이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687번지. 숨겨진 동네라는 뜻으로 ‘은이隱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곳에 들어선 김가항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주요 성지에 위치하면서 중국 원나라 때인 17세기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16년에 섰으면서 천주교의 주요 성지, 해외의 옛 건축형식을 하고 있는 김가항 성당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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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등 상해 김가항 성당 당시의 것 그대로 사용한 성당 내부. 경인일보=임열수기자 

■김가항 성당의 구조와 역사

김가항 성당은 중국 원대인 숭전년간(1628년~1644년) 중국 상해 황포강 건너 김 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김가항’이라 이름 붙은 곳에 큰 주택을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중국 남경교구에 속했던 김가항 성당은 1845년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러던 것이 푸동 경제특구 개발이 한창이던 2000년 상해인민정부가 김가항 성당을 철거하기로 하면서 긴박한 이전작업이 진행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김가항 성당은 원래 건축 부재 그대로 중국 상해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용인 남곡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성당 구조로 보자면, 중국 목구조의 대량식, 평면 T자형을 띄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6칸, 모두 296.89㎡로 소박한 모습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면에 맛배지붕의 합각면에 3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측면으로는 매 칸 마다 1개의 아치창이 나 있고 벽은 모두 벽돌 벽 위에 몰탈로 마감했다.

중국의 회색기와로 마감된 지붕 마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붕가구형식은 전통적인 중국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대량식 기둥을 세우고 그 상부에 대들보를 올린 다음 다시 대공(동자주)를 세워 가구를 구성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한국의 건축물과 차이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종축의 기둥간격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수 차례의 증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 기둥의 간격이 다르고 건축 부재도 달라 성당이 지나온 역사를 상상케 한다.

은이·골배마실성지 박경훈 요셉 전담신부는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봤던 김가항 성당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복원됐다”며 “풀 한 포기에도 김대건 신부의 얼이 있는 은이성지에 김가항 성당이 다시 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을 관통한 역사의 장면들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은 조선 내 천주교 교세 확장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인 만큼 한국 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용인 남곡리에 자리 잡은 김가항 성당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주 1개 등은 상해 김가항 성당 당시의 것 그대로 사용된 것이어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현장을 기억하는 유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천주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김가항 성당은 격변하던 19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목격자라고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1872년 대성당이 별도로 지어지면서 김가항 성당은 잠시 학교로 사용됐지만, 1937년 일본군의 포화로 대성당이 붕괴돼 다시 성당으로 사용됐다.

이후 1948년 대성당이 다시 섰지만 이마저도 이듬해 중국 국민당 정부군에 의해 폭파되면서 김가항 성당이 성당으로서 유지됐다. 중국 문화명기인 1966년에서 1976년에는 철공소로 사용되다가 1987년에서야 본당으로 회복됐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김가항 성당의 역사는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혼란과 고통을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김가항 성당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3년 한중수교로 인해 한국 신자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떠오르면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도 김가항 성당의 우여곡절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도시화로 철거 위기를 맞으며 당시 누구도 생각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2000년 7월 상해정부의 푸동 개발정책에 따라 철거계획이 통보됐고, 2001년 3월 25일 마지막 미사를 끝으로 철거절차에 들어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뜻을 가진 이들이 힘을 합해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부터 순교 전까지 생활하고 사목활동을 했던 은이성지로 이전을 결정했다.

이 역시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은이성지는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교우촌이었던 마을이 초토화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밭이 됐으며, 또 공장이 들어서 상해에서 어렵게 확보한 김가항 성당의 부재를 10여년 간이나 보관만 해야 했다.

2013년 가까스로 공장 이전 합의가 성사되면서 김가항 성당은 지금의 은이성지에 자리를 잡게 됐다.

소박해 보이는 이 건축물이 헤쳐온 험난했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김가항 성당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떠한 어려움도 당신을 흔들 수 없다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참고=김대건 신부와 은이성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최근 동양인으로 처음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성상이 설치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1827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용인 골배마실로 피난을 온 소년 김대건은 은이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에 의해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 아버지가 순교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서품을 받았으며, 다시 1845년 은이로 돌아와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1846년 6월 체포돼 9월 16일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신념을 실천한 인물로 종교를 떠나 위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경인일보=김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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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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