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 아직 흩날릴 때 매화는 피지요. 희미한 꽃, 먼저 피어야 눈에 들 수 있어 추위 속에 꽃송이 매다는 것이지요. 향으로도 색으로도 불러들일 수 없는 벌 나비, 벚나무는 온몸에 불을 질러 꼬드기는 것이지요. 선운사 동백이 춘 사월에 피는 것도 다 까닭이 있어서지요. 너 피듯 나 피지 말고, 너 돌아간 뒤 나 꽃피어 동박새 입맞춤 홀로 받겠다는 심사지요.
앵두가 꼭 앵두만 한 것은 직박구리와 약속 때문이고요. 한입에 콕 찍어 먹고 날아가달라는 것이고요. 청포도 익어가는 것도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히라는 것만은 아니지요. 단물 삼키고 씨 멀리 뱉어달라는 것이지요. 수박이 저리 둥근 것도 데굴데굴 어디든 굴러가겠다는 궁구지요. 입술인 듯 속살 붉힌 이유지요.
하지 지나고, 환한 새벽에 절로 눈 떠졌습니다. 자리 털고 일어나 발길 닿은 곳이 농협 공판장입니다. 멀리멀리 퍼져 가려는 향내 나는 과일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네요. 오늘 이곳으로 나를 이끈 내 발길은, 수박도 아닌 내가 여기로 굴러온 것은 무슨 속셈이었을까요. 꺼끄막하던 장맛비가 호박전, 감자전, 파전 부치듯이 지글거리는 것은 또 어인 까닭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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