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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울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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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내 고향은 김제 시내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봉남이다. 봉남은 그전에는 접주리接舟里라고 했다. 삼국시대 저수지 벽골제 수문을 열면 배가 그곳까지 닿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는 후문이다. 그만큼 마을 주변엔 온통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대학 시절 방학 때 고향 집에 놀러 온 강원도 친구가 이렇게 너른 들판은 난생처음이라며 탄성을 연발했을 정도다. 이제는 고향에서 산 것보다 타향살이가 더 오랜지라 고향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 소환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뇌리에 깊이 각인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인 마흔둘에 혼자가 되셨다. 아버지가 금광을 하던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자 화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남편을 잃었다. 당시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집달리’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심지어 괘종시계에까지 빨간딱지를 붙이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엄마는 틈만 나면 내 손을 잡고 어느새 종적을 감춰버린 이웃 동네 아버지 친구 집을 찾아갔다. 이어 그 집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마당 한가운데로 달려가 쓰러져 그 아저씨 이름을 부르며 제발 빚 좀 갚아달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땅을 치며 우시던 엄마를 말리며 나도 큰소리로 따라 울곤 했다.

나는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아저씨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언젠가 그 집에 들렀다가 여느 때와는 달리 인기척이 없자, 그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그 아저씨가 야밤에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부턴 그 집에 발길을 뚝 끊었다. 집안 곳곳에 즐비하던 빨간딱지가 사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채권자들에게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엄마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이리라. 그 뒤 엄마는 얼마간 있던 논을 부쳐 엄청난 빚을 갚으면서 우리 6남매를 키우시느라 정말 치열하게 사셨다. 과부라고 놀리며 윗논 물꼬를 터주지 않는 동네 아저씨와 한바탕하고 오셔서 나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유난히도 무덥던 2004년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 마치시고 너른 들판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홀로 집에 가시다가 동백꽃 떨어지듯 길가에 푹 쓰러져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홀몸으로 우리 6남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새도 없이 불현듯. 아마 엄마는 이제 지상에서의 임무가 끝났으니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전에 얼른 조용히 사라질 때가 되었다고 결심하신 듯하다. 일요일이라 곱게 화장도 하시고, 옷도 깨끗하게 차려입으신 채, 평소엔 교회에서 점심 식사 후 동네 어르신들과 교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시던 분이, 아무리 말려도 손사래를 치시며 혼자 걸어가시다가 훌쩍 먼 길을 떠나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일찍이 선산 밭 한 귀퉁이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시고, 그 옆에 당신 가묘를 만들어 놓으신 다음, 내게 가끔 장롱에서 미리 마련해두신 삼베 수의를 꺼내 보이시면서 당신이 세상 떠나시면 입혀달라고 당부하셨다. 지금 엄마는 바로 그 수의를 입으시고 그 가묘에 누워계신다. 난 엄마 삼우제 때 무덤 앞에서 굳게 다짐했다. 설 명절과 생신 등 생전에 엄마를 뵈러 오던 날은 꼭 오겠다고. 하지만 그 다짐은 공수표가 된 지 이미 오래. 겨우 기일에나 찾아뵐 뿐, 전주에 특강이 있을 때도 잠시 생각은 해도 엄마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때마다 내 귓가에 그리운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이구 참말로! 썩을 놈!”.

△김원익 소장은 신화연구가로 저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1, 2〉, 〈브랜드로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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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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