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48) 삶과 詩가 질박하면서도 올곧았던 서래봉 시인, 박찬
박찬 시인 시인은 1948년 11월 4일, 전북 정읍시 장명동 7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규, 어머니 정혜상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시인이 태어난 마을은 박 씨 집성촌으로 향교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이어진 동네로 수도곶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황산 기슭에는 대숲 바람이 일렁거렸고 고개를 들면 내장산 서래봉이 바라다보이는 곳이었다.
시인은 정읍동초등학교, 정읍중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의 최전방 양구에서 ROTC 육군 중위로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시계산업을 하는 ㈜미광에 입사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시계 유통에 관여했다. 1978년에는 경성고의 교사 김매심 씨와 6개월 정도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1979년에는 갓 태어난 첫딸의 이름을 딴 주식회사 세의를 세울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그러나 1026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등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거치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는 화곡동 산동네로 전셋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시인에게 화곡동 시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를 배우기 위해서 동아일보 문화센터에서 시 공부를 시작했고, 수강생들과 함께 〈동강시〉동인회를 구성하여 창작 의욕을 불태웠다. 1983년 시 전문지 『시문학』에 6개월여에 걸쳐 추천 완료되었다. 그의 첫 시집 《수도곶 이야기》에서는 시인에게 각인된 유소년기의 원체험을 서정적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 후, 실업자 시절 쓴 화곡동 연작시는 소박했던 달동네의 삶이 잘 그려졌다. 업가 業家가 업자 業者가 되어 돌아오던 날
아내는 배가 아팠다.
딱총 사건 이후 경제는 낙엽처럼 떨어져 가
주머니 속엔 부스러진 잎사귀만 가득
멋쩍게 대문을 들어서는 내게
핼쑥한 얼굴로 멋쩍게 맞다가 아내는 배가 아팠다.
초여름 낮의 길고 긴 병실 앞에서
오락가락 풋내나는 담배만 맥없이 사루고
공주가 더 예쁘죠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한 귀에서 한 귀로 바람처럼 스쳐 간다
병실 창밖으로 공을 굴리는 아이들
시간도 소리 없이 굴러가고
잠을 깬 아내의 충혈된 눈에서도
소리 없이 굴러내리는 것
괜찮아 나는 딸이 훨씬 좋으니까
-나의 참말에 손을 내미는 아내야
나는 안다. 당신의 배보다 지금은 당신의 가슴이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화곡동 1-반전 反轉」 전문 시인은 5년간의 실업자 생활을 마감하고 1885년에 《스포츠서울》 창간 기자로 입사하면서 새로운 삶을 펼친다. 그는 문학 담당의 베테랑 기자가 되었으며, 스포츠 신문으로는 보기 드물게 〈시가 있는 수요일〉이라는 지면을 만들어서 독자들과 시로 소통하였다. 시인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를 답사하였다. 내 젊은 날의 슬픔은,
짐짓, 인생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
다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것 세상모르고 살아온 어느 불혹의 밤
불현듯 떠오르는 그 밤의 강
출렁이는 빛 물결에서 꿈결처럼 보았네 산은 산,
그 안에 담겼을 이치를, 온갖 은유를
그러나 비유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안개 속에서 커 보이던 나무 하나,
안개 걷히자 앙상한 뼈만 남아 죽어 있네
-「밤의 강가에서 」 전문 이 여행은 망막한 광야와 폐허와 모래바람 속에서 원초적 그리움과 우리네 삶의 본디를 생각하게 하였다. 구름과 연기처럼 마음의 행로를 따라 구름처럼 연기처럼 떠돌면서 시인은 삶과 존재의 본질을 궁구하였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질박하고 올곧게 살아가는 시인에게 간암이라는 복병은 참으로 냉혹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였고, 희끗희끗해져 가는 머리카락 한 자락을 초록으로 물들인 초록 머리를 애교스럽게 꾸미고 살았다 한다. 간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달 만에 통증이 심해져서야 입원한 그는 마지막 순간에 숨을 모아 사랑하는 딸 세의야, 세연아 사랑해라는 입 모양을 지으며 숨을 놓았다고 한다. 이제,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저 나무를 자를 수는 없다.
곱게 자라는 풀들을 파헤칠 수는 없다
살아서 힘겹게 내 자리를 마련했듯
지금 펄펄 살아서 꽃 피우는 나무와 풀들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썩어 없어질 육신은 불살라
산에 들에 강에 뿌리고, 고시레
새들이, 고기들이 섭취한 배설물로
자연스레 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둥둥 떠도는 흰 구름으로, 연기로
나의 흔적을 지워나가야 한다. -박찬 「화장(火葬)」의 전문 시인은 병원에 가기 전에 두 딸을 불러 엄마 외롭게 하지 마라. 아빠 마이너스통장 정리 좀 부탁하고 말러의 교향곡을 들려주렴. 사랑해 라고 마지막 당부를 했다. 2007년 『시인시각』 봄호에는 누가 봐도 절명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 「소리를 찾아서 서래봉 가는 길」을 남겼다.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 못 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 박찬 시인 평전을 쓴 이경철은 시인은 병중에도 병마와 싸우지 않고, 그 비극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삶과 문학을 갈무리했다. 채움보다는 비움, 팽팽한 긴장의 대칭보다는 느슨한 비대칭의 구도,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삶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는 인식을 생활철학으로 내면화했다라고 평가했다. 박찬 시인은 『수도곶 이야기』(1985)와 『그리운 잠』(1989), 『화염길』(1995) 등 세 권의 시집과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2008)을 남겼다. 참고 : 이경철 『시인 박찬 평전』(2021, 계간문예)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