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 2022 시민기자가 뛴다] 군산이라는 ‘역사도시’를 바라보는 눈
군산 이성당 빵집의 봉투에는 ‘1945’ 숫자가 적혀있다. 이성당은 올해로 개점 77주년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한 해에 가게 문을 열다니 유서가 매우 깊다. 그렇다면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이성당 빵집’이 아니라 이곳에 ‘빵집’이 개점한 시기는 언제인가? 1910년이다. 이성당이 문을 열기 전, 이 자리에는 일본인이 개업한 이즈모야(出雲屋)라는 제과점이 있었다. 광복 후 한국인이 일본인이 떠난 그 자리를 메워 제과점을 이어갔다. 한국인 누구나 즐겨먹는 단팥빵은 사실 일제가 전해준 간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성당 단팥빵을 일제잔재라고 손가락질 하거나 불매운동을 벌이는 사람은 없다. 이미 70년이란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마음속에 ‘우리의 빵’으로 충분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제잔재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은 지금을 사는 우리의 시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군산 터미널에서 곧장 뻗은 길을 따라 구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큼지막한 근대식 건물 두 개가 보인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이다. 앞 건물은 1922년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라는 일제 건축가가 지었다. 뒤 건물은 지은이는 알 수 없으나 1914년에 지었다. 최소 100년이 넘는 건축물들이다. 두 건물 모두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은행들은 군산 철도선 마지막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양 건물 옆으로는 항구 쪽으로 곧장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곳 군산 구도심 일대는 한 때 일제의 관공서, 금융기관, 민간 회사들이 밀집해 있던 군산 최고의 번화가였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일제강점기 군산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갈 부분이 있다. 문화재가 될 만큼 중요한 이 건물들이 ‘보수’가 아닌 새로 지은 것과 다름없는 ‘복원’의 과정을 겪었는가 하는 점이다. 구 조선은행은 해방 후 한국은행을 거쳐 한일은행이 인수하면서 은행으로서 기능을 한동안 이어갔으나, 1981년에 민간 개인 소유로 넘어가면서 예식장이 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나이트클럽이 되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유흥업소로 쓰이던 것이 1990년대 초에 화재가 나면서 건물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이곳은 방치되었다. 은행, 예식장, 나이트클럽, 화재 사건을 거치면서 이 건물은 사실상 모든 구조와 형태가 바뀌었다. 구 일본제18은행도 마찬가지다. 1950년에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가 이곳을 인수했고, 13년 후에 ‘대한통운주식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 때 창고로 사용했지만 군산의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쓰임새를 잃고 방치에 가까운 상태에 놓였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은 중고품 판매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 동안 이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고 방치했는가?’하는 질문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가 남긴 역사의 흔적을 ‘우리 역사’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의 유산’은 항상 한국인의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방치되어 있었다. 1995년에는 정부 주도의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총독부 철거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관공서를 중심으로 한 일제 건물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 때 군산에서도 구 군산시청, 구 군산경찰서, 구 군산국민학교가 철거되었다. 민간 소유로 있던 일제 건물들도 증축과 신축이 이루어졌다. 만약 그 때 두 은행이 옛 원형 그대로 있었다면 ‘철거 살생부’에 올라 사라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없애겠다고 했다가 지금에 와서는 문화재로 지정하겠다고 하고, 또 어떤 건물은 관광 상품으로 쓰겠다고 한다. 일제가 남긴 ‘군산’인지, 군산이 남기려고 하는 ‘일제’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남기려고 하는 ‘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시대마다 우리가 품은 시선에 따라 일제를 선별한 까닭이다. 군산이 만든 ‘일제’도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으로 곧장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고우당’이라는 일본식 숙소가 나타난다. 2012년 개장한 고우당은 다다미식 숙소, 이자카야, 일본식 연못 등이 갖추어진 복합 문화시설이다. 평범한 주택가 한 자리에 일부 옛 흔적이 남은 가옥들을 매입하고, 여기에 일반 양옥까지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주민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곳이 이제는 ‘일제의 풍경’으로 한데 묶여 다른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을 묶어보면 ‘군산의 일제’라는 주제에 있어 제작, 구입, 사용, 대여, 증여, 처분, 창작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서 생활이 안착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광이 끼어든다. ‘군산의 일제’는 근본적인 분열을 겪고 있다. 교과서에서 본 일제는 이미 군산의 일상에서 많이 떨어져 나갔다. 아픈 역사의 기록이라는 말만으로 이 모든 것을 묶어가기에는 ‘군산의 일제’가 너무 광범하다. 그것보다는 그 기록이 우리에게 혹은 그곳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가 이제는 더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떠난 후, 일제 남기기에 대한 부정과 긍정이 오가며 혼선과 마찰이 빚어낸 이 당혹스러운 고민의 지층이야말로 군산에 대해 폭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군산은 ‘교과서의 일제’ 그 이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역사도시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강석훈 국립무형유산원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