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인물명 도로, 정여립로 이야기
김우영(전주교육대학교 총장) 최근 각 도시에는 인물명 도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전주에도 충경공 이정란의 충경로를 포함해서 견훤로, 정언신로, 권삼득로 그리고 정여립로가 있다. 이외에 작은 도로에도 인물명 도로들이 있다. 대체로 그 지역에 연고가 있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도로명 인물로 선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로명 인물로 선정된 사람 중에서 이정란과 정언신, 정여립의 관계가 눈에 띈다. 정여립이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대표 인물로 선정된 것 역시 흥미롭다.
정여립은 조선의 선조 시대에 24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37세에 예조좌랑, 38세에 홍문관 수찬(정5품)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이이, 성혼의 총애를 받으며 서인의 주축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파를 서인에서 동인으로 바꾸고, 동인의 영수인 이발, 정언신 등의 편에 섬으로써,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는 고향인 완주군 상관면 신리 월암 마을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가 이 지역에서 관직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귀천을 따지지 않고, 기인, 모사들과 두루 교류하고, 무술을 연마한 것은, 대동사상을 지향하는 대동계의 조직과 활동에 투영되어 있다. 진안의 죽도에 그의 서당을 열고, 매달 시회와 활쏘기 대회를 개최하면서, 아마도 왕조시대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급진적인 사상적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라는 사상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활동에 대한 고변으로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고, 임진왜란 3년 전에 시작되어 전란 직전까지 이어진, 서인에 의한 동인의 숙청으로 이해되는 기축옥사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기축옥사에서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동인 또는 정여립과 교류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옥사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의 복권은 기축옥사가 조작되었다는 동인들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대동사상과 천하공물론, 하사비군론 등 그의 사상가로서의 위치에 대한 평가에 기인한다. 단재 신채호는 그를 대동사상과 공화주의를 선구적으로 주장한 혁명적인 사상가로 평가한다. 대동계원들의 무술연마는 당시 빈번했던 왜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적인 훈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임진왜란 4년 전 전남 여수의 손죽도와 근처 지역이 왜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정여립과 대동계원들이 함께 참전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없었다. 논란이 있지만 그가 한 시대의 풍운아라는 것은 인정할 만하다. 정여립과 이종 관계인, 이정란은 정여립과 젊은 시절부터 관직에 있을 때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인척 여럿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었지만, 이를 피할 수 있었다. 정언신은 구촌 간으로 당시 우의정으로 정여립과의 관계를 부정하였지만, 종친 어른으로서 정여립과 나눈 서찰이 발각되어 파직되고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여립이 지역 사회에 미친 여파가 너무나 크지만, 한 시대의 혁명적 사상가로서 자리 매김 되어 기려지는 것은 역사의 한 흐름인 것 같다. 정여립로는 전주 중심부에서 김제 금구로 가는 길목, 박물관 부근에서 혁신도시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금구로 가는 길은 정여립의 처가이자 그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가는 길이다. 월암 마을에서 죽도로 가는 길과 함께 그의 체취가 짙게 느껴지는 길이다. /김우영(전주교육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