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⑦ 운봉초등학교~밤재
4월 26일(병술)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求禮縣)에 이르니 금부도사가 먼저 와있었다.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더니, 고을 현감(이원춘)이 급히 보러 나와서 매우 정성껏 대접하였다. 금부도사(이사빈)도 와서 만났다. 내가 현감을 시켜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게 했더니, 현감이 성심을 다했다고 한다. 밤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4월 25일, 남원부를 출발한 이순신 장군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일정을 멈추고 운봉의 박산취(혹은 박롱)라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박산취라는 인물은 장군이 권율 도원수를 만나기 위해 순천으로 갔다가 다시 구례로 되돌아오는 5월 14일, 운봉의 박산취가 왔다라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이로 추측된다. 그리고 운봉에서 머무는 날, 뜻밖에 백의종군로의 동선(動線)이 바뀌게 된다. 당초 권율 도원수의 군진이 있는 경남 초계(합천)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장군의 신병을 인수해야 할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군은 호송책임자로 남원부에 머물고 있던 금부도사에게 급히 그대로 남원에 머물러 있으라는 연락을 취하는데, 이때 순천으로 가기 위해 구례로 향하자는 뜻을 전달한 듯하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국도 24호선과 비슷하게 함양을 거쳐 초계(합천)로 가려했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행로는 운봉에서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갔다가, 다시 구례로 돌아온 후, 하동-산청을 거쳐 합천으로 가는 노정으로 바뀌게 된다.
또 장군은 운봉에 머물 때, 현감인 남간(南侃)이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짤막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남간은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을 지내며 장군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 임진왜란 직전 난중일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일부 번역에 남한(南僩)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남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내는 번역에 더 마음이 닿는다. 남간은 난중잡록과 고대일록에도 자주 등장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폭염으로 달구어져 맹위를 떨치던 대기는 어느새 아침저녁의 선선한 바람에 그 기운이 한풀 꺾였고, 성미 급한 이들로부터 심심찮게 가을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8월 24일, 2주 전의 힘겨웠던 걸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운봉초등학교를 다시 찾았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마지막 답사가 되는 이번 구간은 지난 구간에 지나왔던 이백면사무소까지 다시 되돌아가서 주천면 외평마을로 이동한 후, 전남 구례로 가기 위해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를 이루는 밤재까지 약 20km를 걷게 된다. 고원지대로 벼 수확이 전국에서 가장 빠르다는 운봉 들녘은 벌써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운봉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서림공원 ~ 한국경마축산고에 이르는 농로를 지나면, 이제 여원재까지 이차선 국도24호선과 함께 걸어야 한다. 갓길이 좁아 걷기에 위험한 곳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여원재에서 여원치마애불상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서서 여원재 옛길을 따라 이백면사무소에 닿는다. 백파면과 백암면이 합쳐질 때, 글자를 짜 맞추기가 여의치 않았던 듯 이백이라는 이름을 택한 이곳은 대부분의 지역이 백두대간 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과립리 마을을 지나 효기마을로 이어지는 길 사거리에는 응령역 이정표(600m)가 서있다. 응령역은 예전 남원부 인근에 있던 동도역과 인월역 사이에 있던 역참이었는데, 현재 응령역 기념조형물의 위치는 옛길을 잇는 동선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듯하다. 효기리 마을입석 있는 곳에서 약사암 이정표를 따라 가면 충혼탑이 있는 효촌삼거리를 만난다. 백의종군로는 왼쪽으로 4차선 장백산로와 함께 이어지다가 지리산둘레길 안솔치마을 입구를 지나고 이내 주천면 외평마을에 닿는다. 이곳은 예전 남원과 구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지역으로 임진왜란기에는 왜군 침입의 길목이기도 한 곳이다. 외평마을에서 밤재에 이르는 길은 지리산둘레길 주천 외평마을~밤재 구간을 이용하여 오르게 된다. 옛길은 외평마을에서 숙성치(숙성령)를 넘어 지금의 구례군 산동면 원달리로 이어졌으나, 사유지 문제 등으로 밤재(율치栗峙)로 대체로가 나있다. 약 7km에 이르는 주천~밤재 구간은 마을길, 숲길, 임도로 이어지는데, 약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마지막 임도 구간을 걷다보니 19번국도의 차량 지나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고 사위가 조용해진다. 드디어 밤재터널 위를 지나는 모양이다. 지난 4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지나간 5박 6일 동안의 전북의 백의종군로를 걷기 위해 익산시 여산면으로 향하던 기억이 새롭다. 독자들과 함께 역사를 회고하고, 절망적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정신을 되새겨보자고 시작하였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음을 느낀다. 이윽고 밤재 이정표가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구례로 넘어간 후 불과 110여일 후인 1597년 8월 중순, 물밀 듯이 쳐들어오던 5만6천여 명의 왜군은 이곳의 고개(숙성치, 밤재, 둔산치)를 넘어 만여 명이 지키던 남원성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지나온 길 뒤로는 남원 시가지가 아득히 내려다보이고, 고개 중앙 정면으로는 왜적침략길 불망비가 서있어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밤재에서 한동안을 서성이다가 비로소 이번 구간 6시간 30분의 답사를 마치며,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140여km 답사를 종료한다. 그동안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 답사 기간 내내 함께 걸으며 큰 힘이 되어준 하동군청 김성채 학예사, 그리고 귀한 지면을 내어준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