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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을 담아 우리의 문화가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23년째 연습을 거듭하고 있는 부안의 굿쟁이가 있다."나 자신을 감시하며 떳떳하자!"는 소신 아래 "예술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자세로 하루에도 7~8시간씩 꽹과리와 함께 악을 탄다. 그가 바로 라금추(75·전북무형문화재 제7호) 명인의 전수자로 부안 농악의 맥을 잇고 있는 이상백(47·천지인 대표)씨다.사람들은 흔히 그를 실력 있는 '굿쟁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의 손이 현란하게 쇠(꽹과리) 위에서 춤을 출 때면 어느새 보는 이들의 어깨를 들썩들썩하게 만든다. 왜소한 몸에서 엄청난 에너지도 품어져 나온다.이 씨는 중학생 시절부터 레드제플린과 지미페이지처럼 밴드를 하고 싶어 기타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코미디언 남성남 선생과 인연을 맺고 프로덕션에서 일하게 됐으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석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게 된다.이후 그는 대학 동아리에서 농악과의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신입생들을 위한 동아리 탐방 당시 풍물동아리 '청산'에서 선배의 권유로 '땅 도땅 도내 땅이다 조선 땅도 내땅이다'를 치고 난 뒤 어릴 적 밴드를 하고 싶어 했던 열정이 용솟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 꽹과리를 접한 뒤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열정이 종일 나를 붙들어 맸다" 며 "그 단순한 가락을 매일 매일 치며 난 자연스럽게 풍물굿에 빠져 들었고 그 해 1학기가 끝날 무렵 청산의 상쇠가 됐고 중앙동아리 '차돌패'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고잽이 최호라는 친구와의 만남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런 그가 이제는 농악의 전문인으로 부안에서 활동 중이다. 대표를 맡고 있는 풍물단체인 '천지인'과 함께 부안 농악의 전통성을 잇고 있다. 천지인에는 지난 23년간의 열정도 담겨져 있다. 특히 이상백 풍물굿 20주년 기념공연에서는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씨와 함께 풀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대학 내 풍물 동아리를 이끌던 그가 전문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 그의 손을 거친 후배들도 수많다. 그 후배들은 부안뿐 아니라 전주와 고창, 순천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후배가 아닌 제자라고 해야 걸맞겠다.그가 똑 부러지게 한마디를 던진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판'만 깔아지면 된다"고.이 씨는 "진실된 모습을 담고 있는 풍물을 알려나가겠다. 내 스스로에 대한 교육의 끝도 없다. 하지만 쉼 없는 노력으로 부안은 물론 민족의 혼을 담아 우리의 문화가 꽃을 피워 나가는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창군 성내면 낙산리에 '윤도장 김종대 전수관'이 있다. 그 곳에는 오직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살아온 중요무형문화재 110호 윤도장 김종대씨(79)가 살고 있다. "조상이 물려준 일을 내가 이어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내 아들이 기꺼이 이어받고 있으니 고맙고 기쁠 뿐입니다. 대물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복이지요"김종대씨는 300여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윤도의 제작기술 보유자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작업으로 만드는 전통나침반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부 김권삼과 백부 김정의에 이어 아들 김희수(50)에게 전수, 4대째 윤도 제작 기법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장인이다.어렸을때 부터 손재주가 많았던 김씨는 어깨너머로 백부의 기술을 익혔지만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다니고 있을때 조카의 재능을 눈여겨 보아 왔던 백부가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연으로 11년 다니던 농협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56년 동안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윤도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대에 실용화 되어 점을 치는 기구로 사용되었다. 풍수가의 전유물이었던 윤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뱃사람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묘자리를 보는 지관의 필수품이며,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이는 생활과학 도구로 자리잡았다.윤도는 대개 크기로 종류가 나뉘어 진다. 윤도에 그어진 원이 만들어낸 한 칸을 '층'이라고 부르는데 1층부터 24층까지 그 쓰임이나 내용에 따라 종류가 구별된다. 윤도의 소재는 200년이 넘은 대추나무다. 잘라진 채로 물속에 1~2년, 다시 은근한 곳에 3년 정도 놔둔 후에야 칼을 댈 수 있다. "50~60년대에는 꽤 인기가 있어 한꺼번에 100여 개씩 주문이 밀릴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해 기계로 찍어내는 나침반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나마 수요가 거의 없읍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힘든 일을 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내가 죽으면 이게 끝이 날까 염려 되어 큰 아들(희수)을 설득해 전수 장학생을 시키고, 이수자를 만들어 지금 조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김종대 어르신은 "오직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윤도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을 1996년 낙향시켜 전수자로 삼았을 때가 가장 고민스러웠고 힘든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윤도의 맥을 잇기 위한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부는 1996년에야 김종대씨를 윤도장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때부터 매월 130만원의 전승금(전수자 교수비)을 국가로 부터 지원받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돈이 되지 않는 윤도를 만들며, 맥을 이어가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살아오신 김종대 어르신이 지금보다 더 낳은 여건에서 윤도의 맥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에 위치한 장류박물관 별관에 있는 순창자수 문화센터 전시실에는 수많은 손자수 전시작품이 눈길을 끈다.한지거울, 명함집, 보석함부터 시작해 경대, 화초장, 사물함, 가리개, 병풍까지 다양한 종류의 손자수 제품이 150여점에 이른다.이 전시실을 지나 교육장에 들어서자 진지하게 손자수를 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바로 순창읍에 사는 제영옥씨(56여). 전시실의 작품이 모두 30년전부터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제씨는 매일 자수센터에 나와 교육생을 가르치고, 작품활동은 물론, 현대인이 애용할 수 있는 자수제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그야말로 천상 자수인이다.그는 어린시절 형제자매도 많고 가정형편마저 어려워 18살부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자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1년동안은 순창에서 자수를 하는게 못내 불편해서 전주에서 자수를 배웠다.이후 순창자수센터로 들어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손자수를 시작했고 날 새는지 모르고 자수를 놓고 있으면 모든 근심걱정은 사라지고 오직 작품 만들기에만 열중했다. 제씨는 이런 노력 끝에 지난 1991년에는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특선을, 1992년과 그 이듬해에는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동상을 차지하는 영예도 안았다.그러던 중 손자수가 기계자수에 밀려 점차 쇠퇴할 즈음 제씨도 결혼하고 난 후 집안일과 육아에 밀려 자수를 못하고 10년을 지냈다. 그러나 간간이 주문제작이 있어 손자수를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10년동안 보험회사를 다니면서 그녀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수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었다.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별도로 본인이 만든 자수박물관은 아니지만 순창 장류박물관 별관에 순창자수 문화센터가 지난 4월 새롭게 문을 열었고 현재 50여명의 교육생이 순창자수 기능 전수를 위해 손자수를 배우고 있다.이곳에서 제씨는 수강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자신이 40여년동안 수를 놓으며 직접 쌓은 전통자수수법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특히 제씨는 틈틈이 제작한 작품들이 지난 6월 서울중앙박물관에도 입점해 판매와 홍보를 함께 하게 됐다. 제씨는 "순창자수가 그 명맥을 잇게 된 데는 행정안전부와 순창군의 도움이 컸다. 지원이 없었다면 순창자수는 점차 사라졌을 것이다. 나에게도 수강생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중앙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돼 순창의 자수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해 준 두 기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제씨는 또 "예전에는 병풍이나 가리개, 경대 등의 작품 위주였지만 요즘은 현대 감각에 맞는 한지거울이나 목걸이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인기가 좋아 주문제작이 많은데 앞으로 이 제품들을 주종목으로 만들어 보편화된 자수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순창자수는 조선 중기 순창군수가 상감을 알현할 때 흉배의 자수솜씨를 보고 경탄한 임금이 순창자수를 진상토록 하면서 진상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를 방문하면 병풍처럼 둘러친 산봉우리에 날아갈 듯한 와가(瓦家) 한채가 눈길을 끈다.풍류를 아는 이는 발품을 들여 이곳을 올라가지만, 게으른 이는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모양새다. 당초 운서정이 위치한 산하(山下)는 멀리 경남 하동까지 뱃길을 잇는 오원강이 흐르고 있었으나, 1920년대 일제가 운암댐을 하류에 축조하면서 물길이 끊겼다.김제의 만경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정읍의 칠보발전소를 통해 전기를 생산했던 일제는 오랜 전설을 간직했던 자연환경도 바꿔논 것이다.운서정을 껴안은 이곳 사선대(四仙臺)의 전설은 아득한 옛날에 이곳 오원강가에서 4명의 선남선녀가 춤을 추고 놀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또 조선시대 전주관찰사를 지낸 이도(李道)라는 관리가 사선대의 풍광에 반해 기생을 동반, 풍류를 즐겼다는 전설도 담고있다.지난 90년 초 국민관광지로 본격 개발되기 이전에는 전주와의 거리가 가깝고 산수가 어우러진 탓에 시민들의 쉼터로 인기를 끌던 곳이었다.수량이 풍부해 어반수반(漁半水半)으로 알려진 사선대 오원강에서는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천렵지로도 유명했다.덩달아 산마루에 걸친 운서정도 여름철이면 이 일대 유명인사와 토호세력의 만남의 장으로 이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의 운서정은 당초 구한말 임실의 부호인 김해김씨 가문의 김승희가 부친 김양근의 유덕을 추모키 위해 지었다.1928년 당시 6년간에 걸쳐 쌀 300석을 들여 지은 이곳은 정면의 길이가 5칸(1칸은 약 210㎝)에 이르고 측면은 4칸 규모로 아담하게 건축됐다.운서정이란 편액은 당시 김제 사람인 심농 조기석(1876~1957)이 쓴 글씨로서 그의 자취는 전주 덕진공원의 취향정과 청학루 등지에 남아있다.또 주변의 풍경이 수려한 탓에 운서정 아래에는 동재와 서재를 지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고 숙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정자의 특징이다.반면 이곳은 1905년 한일합방후 이 지역의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세상을 한탄한 곳으로도 알려져 망국의 한이 서렸다는 말도 전해진다.이후에 운서정은 단순한 쉼터로 활용됐으나 지난 1990년 6월 지방문화재 제 135호로 지정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됐다.특히 이곳은 아득한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이뤘던 곳으로, 양국이 영토를 늘리기 위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는 학설도 제기됐다.이는 10여년전 운서정 인근에서 성미산성의 흔적이 다양하게 발굴됨에 따라 임실군이 복원사업을 추진, 새로운 볼거리로 제공될 전망이다.
고철로 작품을 만들어 환경을 생각하는 귀농인이 화제다.진안 용담면 와룡리에서 용담가든을 리모델링해 '청산에 살어리랏다'란 간판을 걸고 커피숍을 운영하는 이웅휘(60)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 작가는 석재 및 주물 작품이 아닌 폐철재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어 오고 있다. 7년 여란 세월동안 총 120여점의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이 작가는 형상적인 작품보다 메시지가 담겨 있는 작품활동을 고집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환경이 내재되어 있다. 세밀한 작업을 통해 손수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가 제작한 거의 모든 작품(101점)이 용담댐 광장에 전시된 것이다. 120점의 작품 모두를 전시하지 않는 것은 101개의 작품 전시는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00개의 작품이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면, 101개의 작품은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여 설명했다.이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시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 매진할 뜻을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그는 "주물로 만든 작품이 70점이 있다. 그 작품들을 철로 만드는 작업을 할 것"이라며 "이는 새로운 시작이며 다시 한발을 내딛는 사명, 또 다른 시작 그리고 출발점에서 만족치 않고, 환경에 대한 조각을 계속할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이 작가는 7년전 진안으로 내려오기 전 경기도 양평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76년부터 시작된 유학생활기간동안 13~14개 국가를 돌아다니며 작품활동을 했던 게 그 밑거름이 됐다.이를 토대로 수도권에서 30여 년 동안 석재 및 주물, 그리고 나무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활동해 왔다.이후 낯선 귀농생활은 또 다른 도전이었고, 고뇌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외로움은 작품을 만드는 세계로 끌어들였고, 수 많은 작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는 "보이는 것을 만드는 것은 쉽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많은 고뇌를 하고 있음을 내비쳤다.이 작가의 집에는 구두와 군화를 화분화 한 작품이 입구에 놓여 있고, 마당에는 무수한 작품들이 자리를 잡고, 건물 뒤편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고물 철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김제시내에서 금산사 방면으로 약 10여분(차량) 가다보면 봉남면사무소를 지나 제방이 나오는데 우측방향으로 약 5분정도(차량)가게 되면 천연기념물 제280호인 느티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다.천연기념물 제280호인 김제 행촌 동령마을 느티나무는 높이 15m·흉고둘레 8.8m, 수령은 약 600년쯤으로 추정되며, 지난 1982년 11월4일 천연기념물보호수로 지정됐다.행촌 동령마을 느티나무는 김제시 봉남면 행촌리 동령마을 북쪽 끝에 자리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서 조상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와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도 높다.수령이 마을의 역사보다 오래됐다고 전해져 처음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느티나무와 관련,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느티나무가 잎을 푸르고 넓게 피우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잎 모양이 좋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또한 느티나무 옆에 약 30㎝정도의 칠성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여러개 있었는데 그 바위 높이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마을에 역적이 태어날 뻔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마을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당산나무라고 부르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으로 취급 하며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느티나무에 동아줄을 감아 놓고 평안과 소원성취를 비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정월보름날이면 나무줄기에 동아줄을 매어 놓고 모든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하며 마을의 행운을 비는 습속이 있다.백덕규 김제시 학예연구사는 "김제에서 당산나무에 대해 당산제를 지내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면서 "당산제는 매년 음역 1월3일 오시(午時)에 행촌리 동령마을 북쪽 끝에 있는 당산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부락제이다"고 말했다.동령마을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老巨樹)로서, 수령 못지 않게 크기도 웅대하여 높이는 15m, 둘레는 지면으로 부터 1m높이에서 10m정도 되며,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 또한 425㎡나 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느티나무 북서쪽 가지는 몇 년 전에 어린이의 불장난으로 불타고 없어져 아쉬움을 주고 있다.백덕규 학예연구사는 "지난 1982년 11월4일 천연기념물 제280호로 지정된 행촌 동령마을 느티나무는 현재 김제시가 관리 하고 있으며, 관리면적은 4569㎡정도 된다"면서 "느티나무 옆에 익산대(益山坮)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근래에는 반월대(半月坮)로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는 "행촌 동령마을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 " 느티나무는 낙엽 활엽 교목으로, 홍주수·정자나무·귀목 등으로 불리며,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시베리아, 일본 등지에서 자생한다"고 덧붙였다.
"우리처럼 나이 먹었는데도 전국 어디서나 환영해주니 얼마나 기뻐. 앞으로 힘닿는데까지 공연해 사람들한테 전통의 소리, 우리 고유의 소리를 계속 들려주고 싶어"완주군 고산면 창포체험마을 다듬이할머니연주단은 이미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명물이다.예전에는 시골마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으나 어느 때부턴가 희귀해진 다듬이 소리를 살려 옛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조상의 자랑스런 무형의 유물을 이어가고 있다.2006년 6월 창단된 다듬이할머니연주단은 평균 나이 70대 후반으로 다듬이 경력 55년 이상씩이다.김달례 단장이 83세로 가장 많고 김정순(82), 김복순(79), 유애식박순덕김순례(75), 임종숙(73), 장충자(71) 할머니 등 8명으로 구성돼 있다.다듬이 돌은 차돌로 만들어져 청아한 소리를 내고 방망이는 박달나무다. 다른 나무는 오래가지 못하고 쪼개진다.이들은 옷감의 재질과 두께에 따라 4가지의 다른 소리를 낸다.김달례임종숙 할머니는 사대부 등 지체높은 양반들의 옷감인 명주를 두들겨 꽹가리소리 비슷한 소리를 낸다.선비 등 중간계층이 주로 입던 강닥목은 유애식장충자 할머니가, 광목은 김복순박순덕 할머니가 맡고 있다. 강닥목은 장구소리, 광목은 징소리가 난다.김정순김순례 할머니는 머슴농민 등 하층민들이 입던, 두껍고 질긴 무명을 두들겨 북소리를 내고 있다.처음엔 6명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 2명이 늘었다. 질병 등 결원에 대비했으나 할머니들은 아파서 공연을 못한 적이 없다.김정순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돈주고도 못다니는 곳을 구경을 하고 다니고 맛있는 것 많이 먹어보니 너무나 행복하다"면서 "몸이 안좋다가도 다듬이를 연습하고 공연하면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난다"고 말했다.다듬이연주단의 활약은 눈부시다.전국에서 초청받아 공연을 다니고 있고 방송은 무한지대큐, 세상의 아침, 아침마당, 영상에세이, 언제나 청춘, 투데이 전북, 6시 내고향, 공감 특별한 세상, 리빙쇼 등 숱하게 출연했다. 일본미국의 유명 방송에도 소개된 바 있다. 쉐라톤워커힐 호텔팰리스 호텔 등 유명 호텔과 예술의 전당에서도 공연을 가졌다.2009년 3월 24일에는 SBS 강호동의 스타킹에 출연해 방청객과 시청자를 감동시켰다.평소 주무대는 완주 고산 창포체험마을로 마을을 찾는 체험객에게 공연을 아끼지 않는다.다듬이연주단은 지금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피아니스트 임동창 선생을 단장으로 하는 다듬이특화사업단이 만들어져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꾸밀 계획이다.이제까지 다듬이를 두들기는 소리만을 관객에게 선사했으나 앞으로는 빨래를 수거해 빨래터에서 방망이로 두들기고, 행궈서 말리고, 다듬이돌에 놓고 두들기는 과정을 스토리로 담아낼 예정이다. 더욱 재미있어질 것으로 기대된다.지난 2월부터는 창포체험마을의 50~70대 여성 15명이 다듬이를 전수받고 있다. 이들은 각자 집에서 맹연습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실력을 가다듬고 있다.창포체험마을 배인자사무장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세가지가 간난아이 울음소리, 아이들 글 읽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라고 예부터 전해온다"면서 "다듬이 연주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원시 금지면에 '복숭아 농사의 명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최근 현장을 찾았다. 금지면사무소에서 차량으로 5분정도 거리에 위치한 안흥농장에 들어섰으나,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와 노지 복숭아 나무가 눈에 띌 뿐,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농장주 안흥섭(55) 씨는 "농사 짓는 게 신문에 날 정도는 아니다"면서 쑥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 주위에서는 왜 이 사람을 복숭아 농사의 명인이라고 했을까? 안흥농장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특유의 복숭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수확이 한창인 그 곳에서 안흥섭 씨가 복숭아의 명인으로 불리는 까닭을 차츰 알게 됐다. 그는 30년동안 '복숭아 인생'을 걸었다. 어떻게 하면 명품 복숭아를 생산할 수 있을까,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등은 안 씨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남원지역 최초의 복숭아 비닐하우스 재배다. 2001년 비닐하우스를 시작할 당시 착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만, 안 씨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각오로 그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안 씨의 비닐하우스 복숭아는 현재 서울 가락동시장 등지에서 2.5㎏ 당 4만원에서 5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일반 노지에서 재배한 것 보다 34배 가량 가격이 높다. 노지 복숭아 보다 12개월 가량 수확이 빠른데다 당도가 높기 때문이다. 30년 세월동안 안 씨의 내공이 복숭아 명성으로 그대로 쌓아진 것이다.물론 천혜의 자연조건이 그의 명성에 힘을 보탠 것은 사실이다. 적당한 일조량과 온도, 배수가 잘되는 토질 등은 당도높은 복숭아 생산에 제격이다. 그렇지만 주위에서는 그 외에 또다른 게 있다고 말한다. 바로 품질좋고 당도높은 복숭아를 생산해 내려는 안흥섭 씨의 성실함과 노력이다.이런 이유로 그는 농업인의 날에 우수농업인상(2009년), 새농민상(2010년)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안 씨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서울 자동차부품 가게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뭘 해야할지 고민했어요.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복숭아 농사를 30년째 짓고 있지만,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남원으로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복숭아 농사를 권하고 싶어요.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현재 노지(3만3058㎡)와 비닐하우스(7934㎡)에서 연간 3억원 이상의 조수익(순소득 1억원 이상)을 올리고 있다. 금지면사무소는 "남원에서 복숭아 하면 안흥섭 씨가 떠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면서 그를 부농의 표본이라고 언급했다.박노정 금지면장은 여기에 한가지를 더 귀뜸해주었다. "안흥섭 씨는 틈나는 대로 마을경로당 등지에 쌀과 부식을 내놓고 과일이 생산되면 어르신을 대접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음도 명품이라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정읍지역 노인 어르신들이 가장 허물없이 대해주고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노인어르신들의 아픔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들' 대표 박만복단장(53)이 주인공이다.박만복단장이 경로당에 자선공연을 하는 날은 노인 어르신들이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며 세월의 시름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정읍시 산내면 출신인 박만복씨는 현재 정읍 샘고을시장에서 '만복이네 젓갈집'을 운영하고 있다.지난 1996년부터 이곳 샘고을시장에 터를 잡은 박만복단장의 젊은 시절은 아픔의 연속이었다. 전주에서 사업을 하던중 96년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부도처리 되며 39세의 젊은 나이에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당시 갈곳이 없어 이벤트 업체를 따라 1년정도 함께 다녔습니다. 오늘날 무대에서 모습들은 당시에 새겼던 마음과 자세에 따른것입니다".사업실패로 1톤차량을 이용해 시골마을까지 돌며 새우젓 행상을 하던 박단장은 3년여만에 가게를 얻을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박 단장은 낮에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밤에는 부인 이석희씨와 함께 시골 노인당을 돌며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위안공연를 지속했다.행상을 하다 알게된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뜻있고 보람된 일을 찾아 실천해야겠다는 각오로 중고노래방 기계를 구입, 만담과 노래, 각설이, 품바, 웃음치료까지 1인 4역을 소화했다.주로 노인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기 때문에 말보다는 재미있는 분장으로 보여줘야 효과가 있어 부인과 함께 공연에 활용되는 의상을 다양하게 준비한다."혼자서 여러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에 공연 중간에 밖에 나와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각설이 공연을 해야할때는 초청한 각설이가 길을 찾지 못해 마중나가야 한다며 밖으로 나와 각설이 분장으로 갈아입고 들어가 공연을 하는 식이었는데 어르신들은 진짜 각설이가 온것으로 생각하시더라고요"박단장의 무료 자선공연이 지속되면서 점차 소문이 나고 이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들'이라는 회원30여명의 봉사단체로 확대됐다.회원들도 다양한 경력에 노래자랑 수상자등이 모여 지금은 2시간정도 소화할수 있는 공연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다.지난2009년에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는등 나름대로 유명세를 얻으며 25인승 자체 버스까지 구입해 무료공연 지역을 확대하여 나가고 있다.특히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박단장은 병원 입원 환자들을 위한 웃음치료 특강도 자주 갖고 있다. 환자들이 웃음을 통해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을 유지시키는것이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지론을 갖고있다."5년전 뇌출혈로 쓰러져 몸에 마비가 왔던 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웃음치료가 중요하다는것을 터득했다"고 설명했다. 명실상부한 자선 봉사단체로 자리매김한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들'은 월5회 정기공연은 물론 정읍의 450여개 경로당에서 공연을 펼쳤으며 그외 초청을 받는곳은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지난해 11월1일에는 소록도 한센병원에서 공연 초청이 있어 다양한 먹거리를 직접 준비해 전달하고 공연을 갖기도 했다."노인 어르신들이 정말 너무들 좋아하시고 만복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분들이 없을정도로 다녔는데 지난 14년간의 생활이 정말 뜻있고 인생에 있어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박만복단장의 공연은 내일도 지속된다.
전북일보가 제62주년 창간기념일을 맞아 '우리고장 명인 명물'코너를 신설합니다. 크게 유명하지 않아도 제 자리를 지키며 땀흘리는 사람들, 널리 알려지지 않았어도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 우리고장의 자랑거리 등을 매주 한 차례씩 담아내려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1962년 군산 '한국농촌위생원 개정병원'에 입사한 이래 지난 50년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을 돌보며 줄곧 병원에서 근무해 온 홍인표(73·사진) 씨. 홍 씨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현재 동군산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조무사로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들을 돌보며 오는 21일 병원 근무 만 50주년을 맞는 군산에서 가장 오랜 병원근무 경력자이다.홍 씨가 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 제대 후 군산 개정면에서 우리나라 '예방의학의 선구자'이자 '의료보험 창시자'인 고 쌍천 이영춘 박사(1903~1980)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당시 살던 집이 개정병원과 이웃한 인연으로 이 박사로부터 "봉사정신이 남다르니 병원 근무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고 23세이 나이에 병원 문을 들어섰다.이후 이 박사와 함께 의료실무 지식을 쌓아가며 병원근무를 하던 홍 씨는 1973년 이 박사가 추진하던 현재 건강보험 전신격인 '옥구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설립을 위해 개정면을 비롯한 옥구군 일대를 자전거로 돌아다니며 호구조사를 실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중동바람이 한창이던 1978년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SNOS해군기지 배후시설 의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쌍천 이 박사와의 인연으로 1980년 개정병원으로 돌아왔다.존경하던 쌍천 이영춘 박사가 세상을 뜨면서 다시 정우개발 사우디 현장, 삼성건설 이라크 현장을 거쳐 대우·동아의 리비아 현장 등 해외건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렸다.홍 씨는1992년 동아건설 싸리르 플랜트 현장에서 3만시간 무재해 기록 달성을 표창까지 받으며 귀국해 군산 누가정형외과를 시작으로 한사랑병원과 하나병원을 거쳐 현재 동군산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하고 있다.홍씨가 지난 50년동안 국내·외에서 쌓은 수많은 경험은 다른 직원들에게 산 교육이 되고 있으며 환자들이 필요한 것을 먼저 알아내 처리해 주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홍인표 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력을 높이 사주는 이성규 이사장 등 동군산병원 측의 배려가 있었기에 50년을 맞게 됐다"며 "사무장을 해도 된다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급박한 환자들이 회복해 웃음짓는 모습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어 계속 현장근무를 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배리어프리, 공공디자인에서 인권을 찾다] ⑦ 포용적 교통수단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 배리어프리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