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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건축기행] 제19회 전라북도 건축문화상 소양면 행정복지센터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에 자리잡은 소양면 행정복지센터는 소양면 면소재지의 진입부에 위치하고 있어 소양의 시작과 끝이 되는 위치적 특성을 가진다. 지난 2016년 건축허가를 받아 2018년 완공됐으며 전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스페이스모 소속의 이성영 건축사가 설계를 맡아 제19회 공공부문 전라북도 건축문화상에 선정됐다. 대지주변은 농경지로 둘러싸여져 있고 대지전면에는 기존 2차로 도로가 있다. 대지 좌측의 농경지와는 3.5m레벨차이가 있고 우측은 동일레벨의 대지다. △풍류와 멋의 고장 특징 살려 소양면은 완주군 내에서도 풍류와 멋이 특징적인 행정구역이다. 기존의 원주민, 귀농귀촌인, 예술가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특히,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운영하는 풍류학교가 있다. 또한, 아원, 송광사, 위봉사, 위봉사 벗꽃길, 원등사, 위봉산성 등 다수의 전통공간과 정서적 풍요로움을 주는 장소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소양 행정복지센터는 소양의 첫인상이 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단순한 행정지원기능의 건물이라기 보다는 소양을 소개하는, 지역의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계획방향을 설정했다. 이러한 계획방향은 채와 담, 마당과 정원, 누각과 연못, 전통담장과 전통문양등의 건축적 요소로 구현하여 지역의 전통미를 담아냈다. 외부공간과 건물명도 소양루, 신교로, 해월지 등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을 차용하여 마치 소양의 축소판처럼 보이고자 하고, 외부조경은 주민으로부터 기부받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쭉 등을 식재하여 주민이 참여해 완성한 행정복지센터가 됐다. 규모는 지하1층, 지상 3층이며 일반적인 주민센터와 다르게 강당을 1층에 배치하고 외부마당과 연계하여 실내 및 실외행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외부마당은 별도 행사도 가능하도록 무대를 설치하여 공공공간이 적은 소재지의 시설적 보완도 고려헸다. 지상 2층은 면장실, 취미교실, 평생학습교실, 주민자치위원실 등이 있고, 3층은 체력단련실과 옥상정원을 둬 주변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복지시설을 설계했다. 또한, 누각과 연못, 전통담장, 전통창호의 무늬를 적용한 바닥패턴등을 설계하여 전통미를 부각시켰다. △지역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다양한 행정 업무 담당 소양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황운리에 면사무소가 설치됐으며, 1915년 소양면에 속한 우정리가 진안군 부귀면에 편입돼 9개리를 관할했다. 1935년 전주군이 완주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완주군 소양면이 됐다. 1962년 주민조직이 개편돼 9개 리가 됐다. 1982년 면사무소가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58-2로 이전됐으며, 2017년 11월 현 장소인 소양면 황운리 872-1로 이전했다. 소양면의 초대 면장 홍태현은 1946년 1월 10일에 부임해 1954년 2월 22일까지 8년 1개월 동안 소양면의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소양면 행정복지센터는 지역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다양한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주요 행정업무는 총무, 주민복지, 경제·산업으로 나누어 수행하고 있다. 총무팀에서는 공영개발, 상하수도 사업소, 환경위생, 건설교통, 관광체육, 도시개발, 일반경리, 기획감사[예산, 법무감사], 재정관리, 시설공원사업소, 주민자치센터, 행정지원, 문화예술, 선거 등 지역의 행정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주민복지팀에서는 가족관계등록, 전입신고, 기초생활보장, 보훈, 이웃돕기, 희망복지, 여성가족, 노인, 장애인, 사회·복지·일반, 교육아동복지, 보건소 등 지역사회의 복지 및 민원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산업경제팀에서는 공동체활력, 산림일반, 재난안전, 농지전반, 농업농촌식품, 기술보급, 축산일반, 민방위, 농촌지원, 일자리경제 등 지역산업의 관리와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의 거점기관으로 자리매김 2018년 6월 조직을 보면 면장을 중심으로 총무 5명, 주민복지 4명, 산업경제 3명 등 총 13명이 근무하고 있다. 관할 면적은 총 94.10㎢로, 경지 8.95㎢[전 4.22㎢, 답 4.73㎢], 임야 76.0㎢, 대지 1.36㎢, 기타 7.79㎢이다. 관할 세대 수는 총 3,035세대, 인구 수는 6,426명[남 3,354명, 여 3,072명]이다. 행정구역은 9개 리 45개 분리 77개 반으로 편성돼 있다. 관할 행정구역 내 주요기관은 7개소, 학교 6개교, 기타단체 9개소 등이 있다. 2017년 11월에 이전한 소양면 행정복지센터 신청사는 면장실, 중대본부 외에 대부분 면적을 주민 이용 시설인 북카페, 취미 교실, 평생 학습실, 체력 단련장 등으로 구성해 주민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소양면의 지역적 특색을 고려해서 외부에 한옥 누각동과 회랑, 향유마당을 조성해 지역주민의 문화 복지와 소통과 화합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소양면에서는 ‘소양면민의 날’ 행사가 개최되며, 2017년 제19회 ‘소양면민의 날’을 열고 소양농악단의 풍물놀이와 한마음 민속경기, 축하 공연, 노래 자랑 등으로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소양면 행정복지센터는 일반적인 행정, 복지 서비스 이외에도 지역주민의 문화생활과 편의를 위한 민원업무를 수행하며 지역의 거점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성영 건축사는 지난 2015년 소양면 행정복지센터 건축 설계공모에 참가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당시 풍류가 살아있고 전통과 멋이 어우러진 소양면의 지역특성을 테마로 전통미를 표현한 입면계획과 실용적인 디자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당 건축물은 빗물의 재활용·태양광설치 등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는 녹색건축물로 설계됐다. 지난 2015년 유)스페이스모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한 이성영 건축사는 지난 2002년부터 건축사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현재 대한건축사 협회, 대한건축학회 정회원이며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그동안도 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겸임교수,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위원회 위원, 전주시 공공건축가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9년 전북 건축문하상 금상을 받았고 지난 2022년에는 ‘제33회 전주시 예술상’ 건축부문 문화도시 전주를 빛낸 예술인상에 선정됐다.

  • 경제일반
  • 이종호
  • 2024.11.25 18:29

[팔도 건축기행] 제주도 본태박물관

본태박물관(bonte museum)은 ‘本態, 본래의 형태’란 뜻을 빌려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 2012년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에 설립됐다. 전통과 현대의 공예품을 통해 인류 공통의 아름다움을 탐색하자는 취지에서 계획된 박물관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1995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안도 다다오는 ‘제주도 대지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를 고민하며 설계를 진행했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에 자연의 숨결과 따뜻한 색감을 지닌 한국 전통공예품을 담아 담백한 목조건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본태박물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빛 등 자연적 요소를 잘 담아내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담긴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건물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동선에 있는 한국 전통 기와 돌담길과 수벽(水壁, 물이 흐르는 벽)도 박물관의 트레이드 마크다. 박물관 동선은 입구인 주차장부터 건물 내부까지 짧은 거리를 의도적으로 길게 늘여 구불구불 돌아가도록 설계됐다. 안도 다다오는 건물 외부 곳곳에 독립적인 벽체를 사용해 동선을 유도하거나 앞으로 펼쳐질 공간을 의도적을 단절시키는 등 관람객의 호기심을 유발하도록 했다. 전시관 갤러리는 개관 당시 2개에서 지금은 5개로 늘었다. 제1관은 1층에서 2층까지 복도 없이 한 공간으로 조성됐다. 박물관 고문인 이행자 여사가 30여 년간 수집한 조선시대 목공예품인 소반을 비롯해 자수, 보자기, 병풍, 도자, 장신구, 가재도구, 전통복식 등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이 전시되고 있다. 제2관은 깊은 처마 아래로 높은 홀과 주전시실이 연결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페르낭 레제,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현대미술품과 안도 다다오의 명상실을 관람할 수 있다. 제2관에서 바라보는 산방ㅇ산, 모슬봉, 단산의 풍경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제3관은 쿠사마 야요이 상설전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대표작 ‘무한거울방-영혼의 반짝임’, ‘Pumpkin’이 영구 설치됐다. 제4관은 우리나라 전통 상례를 접할 수 있도록 상여와 상여 부속품인 꼭두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제5관은 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이다.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가 펼쳐지고 있다. 건물 옥상도 서귀포 남쪽 바다를 조망하며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도록 꾸며졌다. 제1관과 제2관을 연결하는 야외 동선은 한국의 전통 담벼락과 좁은 골목, 가느다란 냇물과 작은 다리가 배치돼 차분히 걸으면서 야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됐다. 특히 건물과 건물 사이에 한국의 전통 담벼락과 좁은 골목, 가느다란 물과 작은 다리를 배치, 전시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전통적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건물 외관은 최대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맑은 유리, 전통 석재, 흙, 타일 등 최대한 자연 재료가 사용됐다. 야외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박물관 남쪽 야외 조각공원에는 문자를 이용한 인물 조각으로 유명한 자우메 플렌사의 트레이드마크인 웅크린 인물 모습을 표현한 작품 ‘Children's Soul’을 비롯해 로트르 클라인-모콰이이 ‘Gitane’,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Euphoria’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안도 다다오의 청춘’이라 불리는 ‘푸른 사과’가 야외 호수 주변에 설치됐다. 그의 세계적으로는 4번째, 한국에서는 원주 뮤지엄산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구 설치된 이 작품에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담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건축의 주 재료로 사용한다. 노출 콘크리트는 모든 색채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특성은 변화시키지 않는다. 건축에 담긴 언어를 추상화할 수 있는 소재로서 그에게 가장 적합한 재료였다.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건축 철학과 언어를 잘 담아낼 수 있으면서도 이전의 건축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노출 콘크리트를 본태박물관 설계에 반영했다.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건축계에 처음 선보인 르 코르뷔지에의 거칠고 원초적인 마감과는 달리 시각과 촉각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자신만의 노출 콘크리트를 만들었다. 최석의 물과 시멘트의 배합, 철근과 거푸집의 간격 등 그만의 방법으로 완성된 비법을 통해 완성된 노출 콘크리트는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매끄러우면서도 견고한 특징을 가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빛 빛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서 노출 콘크리트와 함께 대표적인 건축 요소다. 본태박물관에 들어서면 빛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과 빛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조각 작품 같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안도 다다오는 빛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를 선택했다. 회색의 매끈한 노출 콘크리트 표면에 비치는 빛은 자연의 빛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또 빛과 함께 생기는 그림자는 극적인 대비를 통해 공간의 입체감을 더하며 또 다른 시각적 재미를 준다. 텅 빈 방의 천장은 내부를 빛으로 채워 관람객의 사색을 이끌어내고, 어둡고 긴 통로 속 기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비은 공간과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물 본태박물관 야외에는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작은 호수를 비롯해 두 개의 건물 사이에 흐르는 좁고 긴 물길이 있다. 특히 물길과 수벽은 두 개의 전시 공간을 이동하는 통로에 조성, 관람객들이 반드시 거치도록 설계됐다. 건축 속에 담긴 자연을 온전히 느끼라는 설계자의 의도가 담겼다. 물길과 수벽 주변으로 부는 바람은 물의 움직임과 소리를 만들어내 관람객들의 청각과 촉각을 자극한다. ■안도 다다오는? 안도 다다오(1941~)는 물의 도시라 불리는 일본의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수공예 공장과 장인이 많은 지역인 외할머니 집에서 유년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이 시기를 보내며 그는 물, 바람, 빛과 같은 자연과 많은 교감을 나눈다. 대학에 진학한 후 독학과 답사를 통해 스스로 건축을 배워나갔고, 독학의 과정 중 책 속에서 만나게 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에 큰 영감과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의 우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축관과 유년 시절 물리적 환경을 통해 형성된 자연과의 관계는 안도 다다오의 일관된 건축 철학의 바탕이 됐다.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 교감을 강조한다. 노출 콘크리트와 기하학적 구조, 자연적 요소를 건축에 끌어들인 독창적인 건축 특징으로 세계적 반열에 오르게 오른다. 1994년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안도 다다오는 제주에 본태박물관 외에도 섭지코지에 있는 ‘우민 아르누보 뮤지엄’(옛 지니어스 로사이), ‘글라스하우스’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제주일보=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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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4:28

[팔도건축기행] 화성행궁에서 '화령전'을 찾아야 하는 이유

요즘은 수원 밖에서도 유명해진 화성행궁의 바로 옆엔 행궁보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화령전(사적 11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 현재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전국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과거엔 정2품(지금의 장·차관 또는 도지사) 유수가 머물고 집무하는 유수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화령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며 위상을 잃어가던 수원화성에 계속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모든 조선 임금들이 발길을 이어간 것도 화령전 때문이었다. 융건릉 능행차 길에 오른 임금들이 참배에 그치지 않고 매번 화령전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조에게 잔과 절을 올린 작헌례(酌獻禮)를 치른 것이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35호)로 지정됐을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조의 어진이 잠시 화령전을 떠나고, 병원·행사장·사무실 등 엉뚱한 목적에 쓰여 화령전이 낡거나 훼손될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과 힘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는 등 화령전 지킴이를 자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원시화성사업소 오선화 학예사는 "수원사람들에게 화령전은 곧 정조"라며 "그가 일궈낸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에 정조의 어진이 머물렀고, 지금도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령전이기에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화령전을 설명했다. 화성행궁을 방문한다면 화령전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다. △역대 임금 모두 찾고, 백성에도 경사였던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 승하 3개월 후 그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 당시 정조의 장례(국장) 절차를 총괄한 총호사 이시수의 청을 정순왕후가 받아들였다. 정조는 생전에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에 뒀는데, 나중에 정조의 묘를 현륭원 옆에 조성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조 어진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순왕후가 별도의 전각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면서 1801년 4월 29일 화령전이 세워졌다. 건립에 참여한 400명 이상 각종 장인들은 쌀이나 포목 등의 상을 받았다. 처음 화령전에서 작헌례가 치러진 건 1804년이다. 11살에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가 15살 때 첫 능행차에 나서며 아버지의 어진을 찾아 잔과 절을 올렸다. 이후 왕세자까지 데리고 화령전을 방문하는 등 순조는 9차례나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예를 갖췄다. 그 뒤로는 헌종이 1843·1846년, 철종은 1852·1855·1860년, 고종도 1868·1870년 직접 화령전을 찾는 등 정조 이후 모든 조선시대 임금들의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친제(임금이 직접 지내는 제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융건릉 능행차와 화령전 작헌례 등을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방문할 때마다 임금들은 화성행궁에서 적어도 이틀을 묵었는데, 이는 지역 백성들에게도 경사였다.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서는 '행행' 자체가 백성들의 요행을 뜻하기도 하는만큼 이 때마다 지역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이 내려졌다. △바로 인접한 이안청…온돌로 합자와 익실 관리 화령전과 같은 영전 건물은 조선시대 절기마다 선왕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어서 건축에도 각별한 격식을 갖췄는데, 화령전은 그 건축적 제도를 계승하며 고유한 특색까지 갖춘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제203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화령전은 1801년 건립 당시 정전(운한각)과 복도각, 이안청으로 구성되는 조선시대 영전 건물들의 건축제도 원형 그대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정전 실내에선 중앙에 어진을 봉안한 합자와 좌우에 갖춰진 익실의 구조를 갖추는 등 다른 영전에서 보기 어려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화령전은 정전을 중심으로 이안청과 복도각이 연결돼 있고 정전 마당엔 내삼문에서 정전 월대까지 어로가 놓인 형태로 지어졌다. 마당 북쪽 담장에 난 동문을 나서면 재실이 있고, 동문과 정전 월대 사이에도 어로가 깔려 임금이 작헌례를 거행할 때의 동선을 드러낸다. 남쪽 서문을 나가면 위치해 있는 향대청과 전사청은 제례 때마다 물과 향, 제수 등 제사 준비에 쓰인 건물이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그 밖에 변고가 있을 때 정전의 어진과 기타 서책, 기물 등을 임시로 옮겨놓기 위한 용도로 마련됐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방식은 조선초기 다른 영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령전의 이안청은 전주 경기전 등과 같이 담장 너머 별도의 구획된 영역에 위치한 게 아니라 복도각을 사이에 두고 정전과 이안청을 직접 근접하게 연결하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러 영전 가운데 화령전에서 처음 나타난 사례다. 화령전은 정전 건물 내부 평면 역시 다른 영전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나타내는데, 중앙에 합자를 두는 건 전주 경기전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좌우에 익실을 마련해 서책이나 관련 기물을 보관한 것은 색다른 특징이다. 특히 중앙 합자는 물론 좌우 익실의 바닥에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하도록 했다. 이 온돌은 1872년(고종 9년) 왕명에 의해 마루로 고쳐졌으나, 건물 좌우 측면과 후면의 아궁이는 존치해 당시 정전에 온돌이 쓰인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화령전 지키는 첫걸음, 가치 제대로 아는 것" 이처럼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를 지켜내며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드높인 화령전은 숱한 외력에 자칫 훼손될 뻔한 위기를 한 두번 겪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화령전을 직접 지켜냈다. 화령전 안에 처음 봉안된 정조의 어진이 1908년 당시 정부 정책에 따라 덕수궁으로 옮겨진 이후 불에 타 사라지고, 다시 그린 어진을 2004년 모시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조의 어진이 떠난 화령전을 가장 먼저 멋대로 사용한 건 일제였다. 자신들의 근대문명 선전을 위한 병원(자혜의원)을 1910년 화령전에서 운영했다. 1915년엔 작약회란 조직이 화령전을 꽃놀이 장소로 사용했고 곡예단과 기생들의 공연 장소, 물건 판매장으로 이후 쓰였으며 나중엔 영화 상영과 피로연 등 각종 행사장 목적에도 활용됐다. 그렇게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화령전이 엉뚱한 목적으로 쓰이며 건물이 낡고 일부 훼손되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수원시민들이 직접 화령전 지키기에 나섰다. 보수 규모는 작았으나 1934년 수원 유지들로 이뤄진 수원보승회가 건물을 직접 수리했고, 1936년엔 추녀와 지붕을 고쳤는데 당시 수리 공사를 위한 도면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해방 후엔 화령전이 무당의 숙소로, 마당은 밭으로 쓰이자 1949년엔 주변 신풍동 마을 주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엔 수원시와 화성군의 예산 및 자재 지원도 이뤄졌고 지역 대목수들도 공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다른 목적으로 활용된 화령전은 1963년에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며 보존 근거가 마련됐으며,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수원성 복원보수정화사업에 따른 대대적 보수가 진행됐다. 이후 1992년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정조의 어진이 80여 년만에 다시 화령전에 봉안됐고, 이후 2004년 다시 그려진 어진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화령전의 높은 가치를 지키는 첫걸음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5년 전 화령전의 보물 지정을 가장 반긴 것도 다름아닌 시민들이었다. 과거 화령전 수직관원들이 5일마다 어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수원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한번 향을 피워 어진을 보살폈던 것처럼 수원시민은 물론 국민들이 다함께 정조가 영원히 머물 화령전을 지켜야 할 것이다. /경인일보=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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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9 15:11

[팔도건축기행] 후당 김인호와 대구건축

일제강점기와 해방, 6, 25동란의 폐허를 지나고서 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건축을, 80년대 올림픽을 맞아서 우리의 현대건축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급변의 시간 속에서 겨우 남겨진 근대건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는 현대건축과 아울러 불국사 조영 계획, 영남제일문, 경주화랑 연수원등을 설계하며 전통건축 고찰 논문들을 남긴 대학교수(청구대학)였다. 그의 건축에는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실험적 표현들이 내재하며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일률적인 설계로 정형화하지 않았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구의 건축 수준이 높고 가장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자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후당 김인호 선생(대아건축)이 활동했던 그 시절이었다. 대구의 건축가이면서도 서울 잠실야구장을 비롯, 대전 충무체육관, 원주 치악체육관 등 전국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즈음에 이곳 시설들을 설계한 별들이 연이어서 떨어졌다. ‘잠실종합경기장’ 설계자 김수근은 86년 6월(55세)에, ‘올림픽 기념조형물’ 설계자 김중업은 88년 5월(66세)에, ‘잠실야구장’ 설계자 김인호는 88년 7월(56세)에 타계하였지만 짧은 생에 굵은 작품들을 남겼다. 30여 년을 시민과 함께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증개축하여 ‘대구 콘서트하우스’로 재탄생한 과거 ‘대구시민회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질지도 모를 ‘경북체육관(현, 대구체육관)’ 건축을 조명해 본다. ◆대구문화예술회관- 30년 세월과 공간의 건축 서울 세종문화회관(1978년)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각 지역 도시에 건립된 문화예술회관은 그 도시 위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건축이었다. 1990년에 건립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30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도시의 안식처이다. 광장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전시동, 왼편으로 공연 동이 낮은 산자락처럼 펼쳐진다. 육각형 연속패턴 평면의 전시동은 화강석 바위처럼 중첩되어 이어진다. 전시동 로비의 조경 공간은 행사 시 다목적공간으로 바뀌었고 전시장 아래위 트인 공간은 탱화 등 대형작품을 배려했다 한다. 당시의 설계개요에서 말하고 있다. 전시동 평면 흐름은 농악의 상모 이미지와 외부 공간 축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아리랑 흐름으로 구성, 외양은 대구의 상징 목련 꽃잎을, 공연 동 지붕은 박사(薄紗) 고깔의 승무를 연상하는 디자인이라 말한다. 당시의 현상공모 설계 공공 건축들은 전통적 요소의 건축 표현이 필수적이라 할 만큼 한국적 주체사상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정관서 발주자의 분위기이기도 했고 다양한 건축 어휘를 경험하지 못한 과도기적 건축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인호 선생은 공사 기간 중 작고하여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광장 마당은 대구예술인 장(제2대 대구 예총회장)을 치르고 그를 떠나보내는 마당이 되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후당 김인호 건축전(2020년 11월)’이 이곳에서 열렸고, 선생의 뜻을 기려 창의적 젊은 건축가를 선정하는 ‘후당건축상’이 27년을 맞고 있다. ◆대구시민회관의 재탄생 (현, 대구 콘서트하우스)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시민회관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 경제 정치가 담긴 건축이었다. 특히 대구역과 광장에 인접하여 근현대 대구의 도시변천사를 지켜본 건축의 장소였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 행사는 물론 국경일 기념식, 시상식, 반공 궐기대회, 미인선발대회까지 열리던 다목적 건축이었고, 부속건물에는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바로 이곳은 ‘대구방송국’과 ‘KG’홀이 있었던 사라진 기억의 공간이었다. 1975년 건립된 대구시민회관은 대구역 서편, 도시 정면을 향한 웅장한 처마와 지붕 곡선, 열주(列柱), 주두(柱頭) 등 전통적 요소를 세련되게 표현한 건축이다. 세워진 지 38년 후. 시민회관은 4여 년의 증개축 공사를 마치고 2013년 콘서트 전문 홀로 재개관했다. 시대적 노후 건축을 철거치 않고 건축적 가치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과거 건축의 디테일과 구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첨단 콘서트홀로 재탄생했다. 과거 시민회관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전면 무대막이 설치되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건축방식이었다. 콘서트하우스는 최고의 음향을 위해 무대와 객석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슈박스 방식으로 대구가 자랑하는 시립오케스트라의 주 무대인 콘서트홀로 변신하였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문학관, 대구근대역사관, 창조경제캠퍼스‘와 함께 도시 근대건축의 재생은 근대 골목과 건축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서 도시문화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다행히도 도시의 여백을 존중하는 광장 공간이 중심이다. 공연이 있는 밤이면 내부 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처마 곡선 실루엣이 우아하며 문화예술의 불빛이 도심 광장을 밝히는 밤이 아름다운 건축이다. ◆경북체육관 (현, 대구체육관)- 재생과 철거의 갈림길 1971년 개관 당시의 ’경북체육관‘은 1981년 행정 개편으로 ’대구체육관‘이 되었고, 당시 공사비(37억)의 70%는 시민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과거 오리온스 농구팀을 거쳐 지금은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농구팀의 홈구장이다. 1966년 전국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당시 대형체육관 설계는 고난도 첨단구조의 건축적 실험이요 모험이었다. 양쪽 초대형 기둥이 지탱하는 지붕구조의 전체적 외형은 신라 화랑의 투구 형상으로 의미화한다. 동서남북 출입구는 사찰의 일주문을, 저층부 노출 구조는 대들보와 서까래 추녀 곡선의 한국 전통 조형으로 형상화하고 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상승하는 경사면과 지붕 수평 수직 구성은 기운생동(氣運生動) 하는 힘의 건축이다. 특히 체육관 내부 천장을 구성하는 3차원적 기하학 곡선은 시간을 초월한 건축미학이다. 당시 공사 현장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었던 마지막 공사가설 기둥 제거 시에는 붕괴 위험 우려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때 선생이 직접 나섰다. 대형구조물이 제자리를 찾을 때 내는 굉음과 공포의 순간을 몸소 감당하며 설계자의 책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50년을 넘긴 체육관은 기능과 구조의 노후화, 교통 접근성으로 재생이냐? 철거냐? 갈림길에 서 있다. 바로인근 구, 경상북도청(현, 대구시 산격청사)과 아울러 향후 보존과 지속 가능 건축을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최상대 전,대구경북건축가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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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5 15:22

[팔도 건축기행] (15) 마산 양덕성당

마산 양덕성당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의 거장 고(故)김수근 건축가의 종교 건축 서막을 연 공간이자 불광동성당,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마산역에서 도보 7분. 잠깐 걷다보면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건물 사이 위치해 있는 양덕성당을 발견할 수 있다. 마산 양덕성당은 45년여 세월 동안 도민들과 시대를 함께 살아오면서 어떤 이에게는 평안과 위로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아도,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공간,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되뇌인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건축학적 미학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지난주 종교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건축물의 가치를 발하고 있는 양덕성당을 다녀왔다. ◇45년 지역민 삶과 애환 스민 곳=1970년대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됐다. 노동집약산업인 섬유, 의류, 봉제, 전자 등 일본기업들을 유치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양덕동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가까워 가난한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일에 지친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와 복지, 교육 등이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박기홍(Josef Platzer) 양덕성당 주임신부는 마산교구로부터 허락을 얻고 고향인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가톨릭여성회관을 지었다. 가톨릭여성회관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사문제 상담부터 인간다운 삶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최소한의 복지를 위한 주거 지원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산교구가 양덕동에 본당을 신설하기로 하고 박기홍 신부를 본당신부로 임명했다. 그는 임시성당을 가톨릭여성회관 안에 두고 회관 강당에서 미사를 하며 본 성당 설계를 계획했다. 이때 그는 회관 길 건너편에 새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김수근에게 마산자유수출무역지역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성당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2001년에 나온 '양덕성당 25년사'를 보면 박 신부의 부지 매입 당시 일화가 나온다. 그는 "부지를 사고 며칠 후 성당 근처에 마산역이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며 "한 주 만에 땅값이 두 배로 치솟았고, 일 년 뒤에는 열 배로 뛰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제시한 성당의 기본 성격은 '화해와 축제의 인간공동체를 위한 공간'이었다. 김수근은 20대 중반의 수습 건축가 승효상을 책임 디자이너로 지목하면서 양덕성당 건축을 함께 했다. 박 신부는 29차례 서울과 마산을 기차로 오가면서 성당 건축 설계를 위해 소통했다고 한다. 이 같은 소통을 바탕으로 약 9개월 동안 설계가 이뤄졌고 1978년 11월 26일 착공, 1년 뒤인 1979년 11월 25일 마산 양덕성당이 헌당됐다. 이후 일본 건축잡지를 통해 전세계에 양덕성당이 알려지게 되면서 김수근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양덕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승효상은 훗날 한 에세이에서 양덕성당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담아냈다.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듯한 한 젊은 여성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후 다시 나왔을 때 밝은 얼굴로 바뀌어 있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공간이 이 여성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제게 부과된 사명을 조금이나마 행한 듯하여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김수근 종교건축의 서막=양덕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건물외관의 붉은색 벽돌 향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다른 질감을 내고 있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하단부는 깬 벽돌을 사용해 거칠고 강한 질감으로 마치 석재를 쌓아 올린 느낌을 통해 기단이 튼튼해 보이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또 바로 서있지 않고 기울어진 느낌으로 설계돼있다. 반면 상단부에는 깔끔하게 마감된 벽돌을 써서 솟은 느낌을 주면서 하단부와 분명하게 분리시키고 있다. 여기에 6개의 면으로 분할한 벽면들을 각각 달리 처리해 자유로운 형태를 가진 단위 공간들을 조합해나가면서 원형 느낌의 성당을 갖추고 있다. 김수근이 양덕성당의 이미지를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성당의 하단부를 비스듬한 매스로 처리해 건물이 바위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성당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성당의 중심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건물을 감싸는듯한 꽃잎 형상이 나타난다. 지붕 역시 원래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보수 등의 이유로 현재는 금속패널로 덮여 있다. 벽돌과 철제의 이질감과 함께 설계자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원형을 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내부로 들어가 본다. 신성한 공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성당으로의 접근은 긴 램프(경사로)를 통해 한층 높은 곳에서 이뤄진다. 그 외 나머지 회합실, 부속건물 등 나머지는 지상에서 접근하도록 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걸까. 마음을 가다듬고 경사로를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십자가를 눈높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 현재는 십자가가 처마에 가려 있지만 예전에는 시원하게 볼 수 있었다. 십자가 양 옆으로 세워진 기둥은 마치 십자가를 쥐고 기도하고 있는 손을 연상케 한다. 성당에 들어가면 절제된 빛에 의해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측창과 천창에서 미세하게 스며드는 빛이 내부의 종교 건축 특유의 엄숙함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정을 올려다 보면 내부의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상부의 볼트형식으로 연결되면서 조형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천장 사이 사이 만들어져 있는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중심에 있는 십자가에 집중된다. 좁은 공간이지만 회중과 회랑 공간의 높낮이를 활용해서 섬세하고도 다양하게 공간 분리를 해냈다. 성당에 또하나 나있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보면 성당 뒤뜰이 나온다. 성전 뒤뜰에는 익명의 신자가 기증한 한복 입은 성모자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물 주변에 계속 이어지는 동선들을 통해 성당 주변을 산책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거친 붉은 벽돌바닥과 틈새에 번져 있는 이끼에서 지나온 시간을 유추하며 상념에 젖는다. 양덕성당에 들러 각기 다른 시각으로 건축물의 가치를 누려보길 바란다. 경남신문=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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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2 14:19

[팔도 건축기행]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의 위엄 간직한 전라감영

전북의 대표 관광지인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한 전주 풍남문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전라감영은 이곳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있다. 전라도의 심장부였던 전라감영은 경상감영과 충청감영과는 달리 한 번도 이동을 하지 않았고 평양감영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전라감사 집무실 선화당과 250년 회화나무 전라감영 입구에는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로 진을 옮긴 후 임금께 올리는 장계에 썼던 이 말의 뜻은 전라도는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전라도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말이다. 전라도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역이었는지 알려주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비석이다. 내삼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전라감사가 집무실로 쓰던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선화당이란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뜻이니 이곳은 전라감영의 심장이자 조정의 파견 관리소였다. 감사는 이곳에서 행정·사법·군사의 업무를 보았다. 선화당 앞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는 가석이 있고 오른쪽(서편)에는 폐석이 자리하고 있다. 가석은 죄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 역할을 한 표석이다. 선화당 오른쪽 방에는 전주 역사박물관에서 고증한 전라감영의 옛 모습이 디지털 영상과 배우의 음성으로 복원돼 있다. 특히 이 곳 선화당에는 회화나무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라감영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현존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수령이 250년 된 이 나무는 전라감영의 역사와 함께해 온 덕분에 복원 과정에서 선화당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82년에는 보호수로 지정돼 꾸준히 관리 받고 있다. 전라감영은 '야경 맛집'으로 통하는데, 전주에서 저녁에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루해가 저문 저녁에는 감영 담벼락을 따라 걸으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과 함께 운치 있는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다. 한옥마을과도 가까워 걸어서 가볍게 다녀오기 좋은데, 근처의 음식점과 카페에 앉아 '전라감영 뷰'를 즐길 수도 있다.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총괄했던 ‘전라감영’ 전라감영은 전라도를 총괄하는 지방통치관서로 조선왕조 500여 년 내내 전주에 자리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울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눠 각각 감영을 설치했다. 8도 관찰사 아래 목·군·현이라는 요즘의 시·군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졌으며, 2년 임기 동안 관할 지역을 순찰하던 제도인 순력체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던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전주성 내 중앙동 옛 도청사와 경찰청 자리에 한강 이남에서 최대의 전라감영을 설치하고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호남지역을 전라감사가 총괄하는 행정기관이었다. 전라감영은 감사가 집무하는 포정문,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선화당, 감사의 주거 공간인 연신당,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 내아, 감사가 친히 나가 농정을 관람하던 관풍각, 내삼문 등 40여 채의 웅장한 규모였다. 당시 전주는 행정의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된 자리로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그 밖에도 부채를 제작해 임금에게 진상했던 선자청과 나라에 공물로 바칠 종이를 만들던 지소, 책을 만들던 인출 방과 함께 대사습놀이와 관련된 통인청도 있었다. 이렇듯 전주는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총체적인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전주 중앙동에 위치했던 전라감영이었다. 그러나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청 행정업무 공간으로 사용됐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도청(道廳)으로 사용됐다.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도청사의 부속 건물 용도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에 화재로 소실돼 옛 모습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지난 2005년 전북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전라감영 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전라감영 복원사업은 10여년 간의 논의 끝에 지난 2011년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전라감영 복원 통합추진위원회’에서 복원하기로 최종 결정됐으며 지난 2015년부터 철거작업이 진행되며 본격화 됐다. △‘전북 자존시대 회복 의미’ 갖는 전라감영 복원 전주시는 10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20년 전라감영 동편 부지를 복원한 1단계 사업을 마쳤다. 전라감영 복원은 40여년 계속된 낙후와 침체의 어두운 질곡에서 벗어나 전라감영의 옛 영광을 바탕으로 전라북도 자존시대를 회복해 전북의 미래를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전주시는 2030년까지 총사업비 1200억 원을 투입해 감영의 나머지 서편과 남편 부지를 확보해 전체 복원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계획이다. 이후 시는 전북도로부터 도유지인 서편부지를 확보해 광장으로 정비하고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과 3D 스캔을 진행하는 등 전체 복원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남편 부지는 국유지인 전주 완산경찰서 용지와 사유지가 혼재해 있어 확보를 위한 후속 절차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라감영 전체 복원의 최대 관건인 완산경찰서 이전은 지난 2009년 전라감영 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전주시도 전라감영 전체 복원 계획이 가시화된 직후, 완산경찰서와 구체적 논의를 시도 했지만 이전할 부지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계획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와 예산 확보는 전라감영 전체 복원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지만 이들 중 어느 쪽도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예산 확보도 국비 지원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가지정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전라감영은 현재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는 지난 전라감영 동편 복원 사업비 모두를 도·시비로 충당했다. 그야말로 영화롭던 조선시대 3대 도시의 옛 성세가 완전 복원되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처음 실현된 곳 전라감영은 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의 전주화약을 끌어낸 곳이다. 130년 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조선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이를 수용한 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전봉준과 선화당에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후 전라도 일대에 동학농민군 자치조직인 집강소를 설치했고,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감독하기 위한 대도소가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 세워졌다. 선화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상징적인 곳이 된 것이다. 전주화약이후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했고 관군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일본이 조선 궁궐을 침범하고 이를 이유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농민들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재봉기하게 됐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당시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죽창을 든 동학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산이 되고 흰옷 입은 동학농민군들이 일어서면 백산이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학 농민군의 수는 최대 20만에 달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다 패퇴하고,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하게 된다. 이후 태인 전투에서도 패배해 전봉준이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처형됐다.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이 좌절됐지만 전주화약을 계기로 갑오개혁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큰 의미를 가진다.

  • 경제일반
  • 이종호
  • 2024.07.08 19:24

[팔도 건축기행]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유리의 강(Glass River)을 만들자.” 현장을 방문한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여수 망마산과 장도를 직접 걷고, 행정선에 올라 바다에서 현장을 바라본 후 떠오른 콘셉트 디자인을 거침 없이 그려냈다. 망마산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폭 21m와 길이 152m에 달하는 푸른 유리 지붕(Glass River)은 GS칼텍스 예울마루(이하 예울마루)의 상징이 됐다. 산과 바다와 섬이 만나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그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건축물은 서로 순응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자연과 하나 된 친환경 건축 예울마루는 시민 삶의 질 향상과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개최 도시에 걸맞는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을 위해 GS칼텍스가 여수시와 함께 여수시 망마산과 장도 일원의 약 70만㎡(21만여 평) 부지 위에 조성한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2007년 여수 시민 대표와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성 사업은 2021년 망마산 전망대 및 산책로 조성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10여년의 대장정이 마무리 돼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1단계인 망마산 기슭의 주공연장은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맞춰 개관했고, 예술가들의 창작스튜디오와 전시장, 카페, 교육실 등으로 이루어진 2단계 예술의 섬 장도 사업은 2019년 완공됐다. 프랑스국립도서관(미테랑 도서관), 독일 베를린 올핌픽 수영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공연장을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로 불린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을 지향하는 그는 특정 건축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환경과 조화를 고려한 독창적인 설계로 이름이 높다. 특히 주요 시설물을 땅속으로 집어 넣는 것이 특징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화여대 이화캠퍼스 센터(ECC)가 대표적이다. 페로는 예울마루를 설계하며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하나의 큰 산책로’(Promenade)를 염두에 뒀다. 망마산 정상 전망대부터 공연장, 진섬다리, 바다 건너 장도 전시장까지 그가 구성한 산책길은 약 2㎞에 달한다. 흐르는 강물을 형상화한 유리 지붕(Glass River), 환경 친화(Eco friendly)적 건물은 그가 자연과 공존을 꾀한 또 하나의 콘셉트였다. 산의 경사면을 최대 40m 깊이로 파내고 지은 예울마루는 주변 환경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망마산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의 주요 공간을 지하에 배치, 바깥으로는 유리 지붕만 드러나는 형상이다. 유리 지붕은 대지의 경사에 맞게 6개의 경사면으로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자연스러운 경관을 연출했으며 능선에 맞춰 화강암 계단(Stone River)을 설치했다. 예울마루는 문화예술의 너울이 가득 넘치고 전통가옥의 마루처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더불어 ‘마루’에는 산 꼭대기, 하늘이라는 뜻도 담겨 있어 예울마루의 푸른 유리 지붕을 ‘하늘에서 흐르는 강’이라고도 부른다. 유리 지붕 아래 땅 속에는 가로 200m, 높이 7층 규모의 건물(연면적 2만5145㎥)이 감춰져 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대극장(1021석), 무대 변형이 자유로운 소극장(302석), 광(光) 천장 시스템을 도입해 자연채광에 가까운 밝은 분위기에서 작품 감상이 가능한 3개의 전시실, 리허설룸, 카페 등이 주 공간이다. 예울마루 4층 매표소 앞 광장에서 바라보는 여수 바다와 장도의 모습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더불어 지난 2022년 개통된 선소대교의 야경까지 어우러지면 저녁 공연 관람을 마치고 나온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진다. 예울마루는 친환경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지붕에 설치된 태양전지 시스템을 통해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 건물에 필요한 일부 수요을 담당하고 있으며 경사지형을 활용한 열미로(熱迷路) 시스템을 운영하고 화장실 용수와 조경 용수로 우수(雨水)를 재활용하고 있다. 또 태양광 및 LED를 이용한 조명을 진입계단, 바닥분수, 외부 데크 등에 모두 50개를 설치, 에너지 절감 효과를 얻고 있다. ◇‘예술의 섬’ 장도 예울마루에서 나와 바로 앞 장도로 향하는 여정은 색다른 경험이다. 조수 간만의 차로 하루에 두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다리를 지나야 하는 터라 ‘물 때’를 확인하는 게 필수다. 섬 전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이자 예술가들의 창작 기지, 시민들의 힐링 쉼터인 장도의 관문 진섬다리는 총 길이 330m로 기존 석축교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도록 설계됐다. 지난 2019년 5월 개관한 ‘예울마루 장도’는 입주 작가들의 장도 창작스튜디오, 장도전시관, 다도해 정원, 해안 산책로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핵심 공간은 산의 능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하에 파묻듯이 세워진 장도전시관으로 도미니크 페로가 콘셉트 디자인을 맡았다. 지하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얼핏 이화여대 ECC 건물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푸른 잔디밭을 지나 회색 담벼락의 지하로 내려가는 나직한 경사로에서 만나는 건 길다란 직육면체 형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공간이 펼쳐진다. 1,465㎡ 규모의 전시관은 바다가 보이는 전시실을 비롯해 바다 전망과 해송, 피아노 연주가 어우러지는 아트카페, 교육실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중앙홀 천장에 설치돼 인테리어 효과를 극대화하는 아트리움을 통해 관람객들은 낮에는 로비를 통해 들어오는 채광을, 밤에는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조명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장도는 원래 다섯 가구 주민들이 거주하던 섬이었다. 섬 주민의 집터에는 역사성을 살려 작가 작업실, 안내센터 등 다섯 동의 건물을 조성했고 주기적으로 오픈 스튜디오도 진행한다. 다단계식으로 조성된 다도해 정원에는 남해안에 자생하는 나무와 야생화가 식재돼 있으며 장도 해안선을 따라 바다 경관을 조명하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에서는 최병수 작가 등이 제작한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 공연, 교육이 어우러진 예술 요람 예울마루는 GS칼텍스가 지자체, 지역사회와 함께 일구어온 대표적인 사회공헌 활동으로 꼽힌다. GS칼텍스는 지금까지 예울마루 조성과 운영에 1500억원을 지원했다. 1987년 건립된 여수시민회관이 유일한 문화시설이었던 여수에서 수준 높은 공연과 전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예울마루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였다. 뮤지컬 ‘맘마이아’, ‘시카고’와 조성진, 정경화, 임윤찬, 서울시향 등 클래식 연주자의 무대를 포함해 오페라, 발레,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공연됐고 라이프 사진전, 한국근현대 미술걸작전 등 화제의 전시도 열렸다. 그밖에 예술아카데미,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등도 꾸준히 열고 있다. 지금까지 예울마루 공연, 전시, 교육 이용객은 총 129만 명에 달하며 최근 핫 플레이스로 꼽히는 장도에는 156만 명이 다녀갔다. 예울마루는 2023년 한국관광공사 공모 ‘코리아 유니크 베뉴 52선’에 전남에서 유일하게 선정됐으며 2012년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 레저개발 부문 최우수상(2012), 한국메세나 대상 대통령상(2013)도 수상했다. 광주일보=김미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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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4 14:26

[팔도 건축기행]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

충남 아산 인주면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은 도 지정문화재 144호로 12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아홉 번째, 대전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됐다. 사계절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성당은 신도뿐만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은 명소로 주변에는 350년이 넘는 국가보호수 4그루와 그에 버금가는 고목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풍경에 깊이를 더한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며 '미남이시네요', '태극기 휘날리며', '아이리스2' 등 지금까지 약 70여 편이 촬영됐다. △공세리 성당의 시작 공세리 성당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공세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Emile Pierre Devise, 1871-1933)가 1897년 다시 공세지로 부임해왔을 때 성당 건립을 위해 대지를 매입한 사실을 '구한국외교문서'의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드비즈 신부와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을 통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성당 건립을 시작, 1899년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완공해 합덕 본당의 퀴트리에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개최했다. 준공된 성당은 '한옥 성당'으로 성당으로서의 집회 기능을 충족하면서 우리나라 토착 문화를 그대로 전승했다. 사제관과 연결된 'ㅁ'자 평면형으로 흙벽과 기와지붕, 마룻바닥 외관 등 한옥 목조건물 모습으로 알려졌다. 드비즈 신부는 이후 기존 본당이 증가한 신자를 수용하기에 협소해지자 새롭게 서양식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해 1922년 10월 8일 충청도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완공했다. △에밀 드비즈 신부 드비즈 신부의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 이름은 성일론이다. 1871년 프랑스 남부 출신으로 1890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1894년 신품을 받아 사제가 돼 조선 선교의 사명을 받아 일본을 거쳐 같은 해 10월 인천항구를 통해 입국했다. 그는 공세리 초대, 3대 주임신부로서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직하다 1932년 병이 깊어져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933년 고향에서 사망했다. 건축, 예술, 의술에 관심을 가졌던 신부는 '이명래 고약'으로 발전한 '성일론 고약'을 만들어 종기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드비즈 신부가 지은 공세리 성당은 이후 합덕성당(1929), 예산성당(1934), 공주 중동성당(1936) 등 다른 성당의 건축 모델이 됐다.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공세리성당박물관에는 프랑스에 있는 그의 묘지석을 재현해 놓았다. 또 신부의 손자가 기증한 금장(金裝) '드비즈 서간집'과 묘에서 직접 가져온 흙을 전시해 추모하고 있다. △천주교 순교 성지 한국 천주교회는 신유, 기해, 병오, 병인 등 4대 박해 동안 만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공세리 성당은 이 중 32위의 순교자 현양비와 현양탑이 있는 천주교 순교 성지이자 솔뫼성지까지 잇는 천주교 순례길의 시작 구간으로 의미가 크다. 32위 순교자에는 신유박해 때 아산 최초로 순교한 하 발바라가 있으며 병인박해 때 걸매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의서(사바), 박원서(마르코), 박익서(세례명 미상)를 비롯해 부부 순교자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삼 부자(父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등이 포함됐다. 하 발바라를 제외한 순교자 대부분은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끌려가 고문, 옥사, 참형으로 순교한다. 하 발바라는 1825년 전교하다 체포돼 해미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심문과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1835년 고문 후유증으로 아산에서 숨을 거둬 첫 순교자라 한다. △공세리 성당의 모습과 변천사 공세리 성당은 1922년 준공 당시 고딕 형식으로 트란셉트(세로로 길쭉한 구조인 성당에서 예배를 진행하기 위해 제단 앞을 가로로 길게 만든 공간)가 없는 긴 凸자형의 평면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3랑식 장방형 성당은 종탑부, 신자석, 제단부, 제의실로 구성됐다. 1971년 증축 과정에서 트란셉트 부분을 추가해 T자형 평면이 됐다. 이 과정에서 제단은 배면부로 밀려나 트란셉트를 둔 대규모 평면으로 확장되고 회중석(성당 내부에서 성당 정면과 제단 사이에 있는 공간)은 총 6칸으로 확장, 내부 기둥까지 철거해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첨두 아치와 외벽을 지탱하는 반 아치형 석조구조물(플라잉 버트레스) 등 고딕 양식의 주요 장식적 요소를 배제해 비교적 간략하게 표현한 한국식 조적식(벽돌) 고딕성당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특히 다양한 장식 벽돌을 사용해 시각적 미감을 일으켜 서울 명동성당과 비슷한 모습이다. 성당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파사드)은 비교적 1922년 건물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적색 벽돌과 회색 벽돌을 사용한 면은 고딕형식 성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 출입구 내부 천장은 반원형 아치 형태로 된 천장구조로 각 공간마다 회색 벽돌처럼 표현한 목재 갈빗대 모양의 뼈대(리브)가 있으며 측랑 부분은 평천장으로 마감해 목재판을 그대로 노출 시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제관은 지붕 경사면에 돌출한 작은 지붕이 있는 창문(도머창)을 둔 당시 서양식 사제관 건축의 전형이다. 2층 규모의 벽돌 건물로 정면이 팔(八)자 계단으로 2층을 오를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으며 계단 아래에 1층 입구를 뒀다. 대전일보=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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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0 14:22

[팔도 건축기행]KT&G 상상마당 춘천(옛 춘천시어린이회관)

춘천시의 서쪽을 둘러싼 의암호. 그 수변을 거닐다 보면 ‘종이비행기’를 닮은 멋스러운 건축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자태가 ‘나비모양’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두 세번 고쳐봐도 나비보다는 비상을 준비하고 있는 종이비행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KT&G 상상마당 춘천(이하 상상마당 춘천)’이다. 옛 이름은 춘천시어린이회관, 그 전에는 강원도어린이회관으로 불리던 장소다. 지금은 공연장과 스튜디오, 연습실 등으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 가운데 한 곳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지만 1980년 개관 당시에는 거의 유일한 문화공간 역할을 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탁월한 입지 야트막한 동산(삼천동생태공원)을 등지고 의암호를 앞마당처럼 거느린 대지 위에 건물을 쌓아 올렸으니, ‘상상마당 춘천’ 은 지세(地勢)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도 감탄사를 절로 뱉을 정도의 입지다. 더군다나 의암호를 퍼내거나 메우지 않는 이상 근처에 딱히 건물 들어설 공간이 없고, 의암호 바로 다음 순서가 산이고 그다음도 산이기에 스카이라인이 44년전, 건물이 들어설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니 아름다운 풍광이 변함없이 흐르고 또, 펼쳐짐은 물론이다. 춘천시 도심에서 살짝 외진 곳에 있어 접근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곳에 처음 닿았을 때의 느낌은 그러한 작은 번거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다. 상상마당 춘천에 다다르는 길은 두가지 있다. 강원국악예술회관 쪽에서 완만한 경사의 언덕 끝을 목적지로 정하고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춘천 MBC를 지나 숲길을 건너 야외공연장을 계단삼아 품에 안기는 방법이 그 것이다. 설계도 상에서 전자가 중앙 출입구로 들어오는 것이고 후자는 말하자면 부출입구, 후문으로의 입장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16번 버스를 타고 상상마당입구 정거장에서 내려 강원국악예술회관을 스쳐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춘천 MBC와 춘천지구 전적 기념관 사이 광장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후문’으로 통과할 것을 추천한다. 특히 그 시간이 어스름 때라면 더 좋다. 숲길 마지막 코너를 지나치는 순간 붉게 번지는 낙조를 배경으로, 조명에 달궈진 건물의 환상적인 모습과 조우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김수근 작품 ‘상상마당 춘천’ 의 설계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의 로렌초’라고 극찬한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맡아 진행한 것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가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을 후원, 문화예술을 꽃피게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당시 타임은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수근을 한국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인물로 지목, 헌사를 보낸 것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발상지인 피렌체 건물이 온통 붉은색 테라코타 지붕으로 뒤덮인 모습과 김수근 건축물의 특징을 연관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김수근이 남긴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상상마당 춘천은 다행스럽게도(?) 쉬이 헐어내지 못하고 개관 때의 모습을 아직까지 지켜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스르륵, 붉은 벽돌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흔적 만으로도 건축학도들은 이 건물이 김수근의 설계로 완성된 건물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공간사옥을 비롯해 마산 양덕성당과 샘터사옥, 한국해외개발공사 사옥(이상 1977), 지방행정회관(1979), 아르코예술극장(1981)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에서 김수근 건축의 실마리를 손쉽게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건물들은 적벽돌을 주요 건축재료로 활용한 것은 물론, 건물 벽면에 튀어 나온 돌출벽돌 그리고 건물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 창(窓) 등이 특징적으로 눈길을 멈추게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상상마당 춘천’ 건물의 중앙 필로티 공간처럼 건물 사이의 마당같은 역할, 마치 교차로의 개념을 이식해 놓은 것 같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도 그의 건축물에서 발견되는 상당히 이채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 “호숫가에 피어나는 끝없는 동심세계”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상상마당 춘천’이 리모델링 전, ‘강원도 어린이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준공된 것은 1980년 5월5일(아직 건물에 머릿돌이 남아있다) 어린이 날이었다. 물론 개관일은 5월24일 토요일이었지만 준공일을 어린이날에 맞추고 건물명 자체에 ‘어린이’가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목적이 있는 건물이라는 점에 이견을 달기는 힘들 듯 하다. 여기에 당시 춘천과 원주시에서 열린 ‘제9회 전국소년체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이 추진된 점 등 설계에 있어서 ‘어린이’를 중심 요소로 감안해야 하는 이유는 여럿 있었다. 그것은 건물의 효율적 이용보다는 ‘효용’에 더 큰 가치를 둔 건축철학이 필요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상마당 춘천’에는 아직도 어린이를 염두에 둔 요소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김수근은 건물 설계를 하면서 ‘재미있게 만든다’에 방점을 찍었다고 밝혔다. 그는 개관 당시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처음 설계를 의뢰 받았을 때 어린이와 공간이라니 좋은 테마이구나 싶어 재미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났죠. 왜냐하면 나 자신도 어린이와 마찬가지니까요.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집안에 아늑하게 숨어있다 나오면 햇빛이 옆으로 비쳐들어오다가 지붕에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 오면 탁 트여 구름다리 같은데서 호수와 산이 보이는 공간상의 해프닝을 테마로 삼았어요.” 김수근은 어린이는 바로 노는 사람이라는 개념이고, 그런 어린이의 본질을 제대로 발산시킬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이 건축물의 개념을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개관 당시 어린이회관을 표현하는 슬로건은 ‘호숫가에 피어나는 끝없는 동심세계’였다. ■곳곳이 포인트…아름다운 풍경 풍성 춘천시와의 계약에 있어서 건물 보존에 대한 조건이 있었겠지만 어린이회관을 넘겨 받은 상상마당 측이 건물을 작품으로 인정, 지난 10년 동안 내부 리모델링 말고는 건물의 외형에 딱히 손댄 곳이 없는 점은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다. 특히 전체 공간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야외공연장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완, 복원해 각종 야외 문화행사가 열리는 핫 플레이스로 만들어 놓은 점도 박수쳐 주고 싶다. 그러한 노력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는 오늘도 건축가 김수근 건축의 걸작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상상마당 춘천’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포인트 몇군데를 추천한다. 야외공연장 관객석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이 첫 손에 꼽고 싶은 포인트다. 건물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펼친 종이비행기 날개(건물 지붕)의 좌·우측 선이 마치 한옥의 그 것처럼 산의 능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건물의 2층, A동과 B동을 잇는 ‘구름다리’에서는 쏟아질 듯 펼쳐지는 의암호의 풍광을 어떤 걸림도 없이 고즈넉하게 즐길 수 있고, 중앙 필로티 공간에서는 자연스레 만드어진 사각의 틀 안에 1층의 풍경들을 작품처럼 담을 놓을 수 있다. 그 앞에 새롭게 조성된 분수는 야간 조명이 마련돼 있어 밤에 보는 풍경이 한마디로 끝내준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내부로 들어오면 김수근이 말한 아이들이 뛰어놀며 숨바꼭질 할 것 같은 경사로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 또한 멋스럽다. 맑고 화창한 어느 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들은 덤으로 챙겨 가시길…. 강원일보=오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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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7 14:19

[팔도건축기행]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제주읍성은 조선시대 제주의 중심지였다. 성곽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바다 방향을 제외하고 동문, 남문, 서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은 제주읍성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덕정은 개방적이면서 목사와 판관의 집무 영역 중간지점인 읍성의 중심부에 건립됐다. 내륙지방 정자(亭子)와 누(樓)에서 사례를 볼 수 없는 목사가 행정을 집행하는 관아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었다. 건축의 독특한 평면 형식과 구조, 기단과 월대, 답도의 구성은 광장과의 유기적인 연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이 자리한 곳은 ‘선덕대(宣德臺)’라는 사대(射臺, 활을 쏠 때 서는 자리)가 있던 장소로 이전부터 광장의 기능을 갖는 곳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조선시대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광장으로 기능이 확대됐다. ▲ 조선시대 제주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제주목 관아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이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목 관아는 세종 16년인 1434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 후 바로 역사를 시작해 다음 해인 1435년 골격이 이뤄졌다. 사실상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이 이뤄졌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면서 관덕정을 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 일제강점기 제주읍성 해체, 그러나 광장은 남아 제주읍성이 해체되고 내부 공간 구조가 바뀌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일제강점기 신작로의 개설과 1926년 제주읍성 인근 산지항 축항공사로 해석되고 있다. 산지항 축항을 목적으로 북수구에서부터 서문과 남문 중간지점까지의 성곽을 해체하고 성돌을 공사에 사용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객사와 객사 남쪽 목사의 영역인 상아(上衙) 영역에는 학교와 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설치됐고, 남쪽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二衙)는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됐다. 읍성의 나머지 구간은 광복 이후 도시 형성과정에 훼손됐다. 도로의 개설, 성곽의 해체로 인해 광장의 물리적 장소성은 약화됐지만, 광장으로의 접근성은 강화됐다. 관덕정 광장은 제주 근현대의 도시 시민광장으로 시민항쟁과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됐다. ▲ 발굴로 다시 찾은 역사의 현장 1991년 제주시는 시내 중심가의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200여 평을 지상·지하 주차장부지로 예정하고 사업을 추진했다. 제주시는 이 지역에 대한 매장문화재를 확인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발굴허가를 받아 1991년 9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주목 관련 문헌조사와 현장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조선시대의 제주도 읍치 장소인 제주목 관아 지역으로 밝혀지면서 제주시는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의뢰해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발굴을 통해 외대문, 중대문지를 비롯해 이를 축으로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曦閣), 우련당(友蓮堂), 귤림당(橘林堂), 망경루(望京樓)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됐다. 결국, 18세기 제주목 관아 건물의 전체 배치가 확인된 것이다. ▲ 기와 5만장 헌와(獻瓦), 제주도민의 손으로 복원 발굴 당시 시굴갱 조사를 통해 조선전기층 아래로 고려시대와 탐라시대 문화층이 자리 잡고 있음이 확인됐다. 제주목 관아지 전역에 고대 탐라국 시대부터 건물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주목 관아지는 1993년 3월 30일 국가지정 사적 제380호로 지정됐으며,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과 기단석 등을 토대로 ‘탐라순력도’와 ‘탐라방영총람’ 등 당대의 문헌과 자료,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거친 후 1999년 9월부터 복원사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은 복원사업에 들어가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했다. 민관(民官)의 합심으로 제주목 관아는 2002년 12월에 1단계 복원 사업으로 제주목사의 집무실이었던 ‘홍화각’을 비롯해 집정실인 ‘연희각’, 연회장으로 쓰였던 ‘우연당’과 ‘귤림당’ 등의 관청 건물과 부대 시설이 복원됐으며, 2단계 복원 사업을 통해 2006년 2월 조선시대 20개의 목 가운데 제주목에만 유일하게 있었던 2층 누각인 ‘망경루’의 복원이 완료됐다. ▲ 병사들의 훈련장 ‘관덕정’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무열(武閱)을 위한 것이다.” 관덕정은 세종 30년인 1448년 안무사(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됐다.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관덕정은 이후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 1753년(영종 29), 1779년(정조 2), 1833년(순조 33), 1851(철종 2), 1882년(고종 19) 보수되는 등 총 7차례에 걸쳐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 마에다 요시지(島司 前田善次)가 도로를 내기 위해 보수하면서 15척(454.5㎝)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이면서 가치를 훼손시켰으며, 1969년 10번째 중수에서는 대대적으로 해체해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 페인트칠을 하면서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 관덕정은 해방 후 1948년 9월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1952년에는 제주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했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지정됐다. 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관덕정의 편액(扁額)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치였으나 화재로 손실됐고, 현존하는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이다. ‘호남제일정’은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朴善楊)이 중수하면서 쓴 글씨다. ▲ 도심 속 조선, 열린 문화공간으로 도약하다 최근 제주목 관아 일원에서는 한복을 입은 관광객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보다 친숙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5월부터는 야간개장에 돌입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는 제주목 관아의 역사 문화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야간관광 분위기 조성으로 원도심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지난 1일부터 오는 10월까지 6개월간 제주목 관아 야간개장 ‘귤림야행’을 실시하고 있다. 야간개장 시간은 월·화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다. 오후 6시부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귤림야행’은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일원에서 열리며, 야경산책, 야간공연, 버스킹, 수문장 교대의식, 자치경찰 기마대 거리행진, 체험 등을 총망라한 전통문화 복합행사로 마련된다. 정기공연 ‘귤림풍악’은 5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진행되며, 전문공연과 클래식, 전통공연, 밴드 등 매월 다양한 공연과 함께 판소리와 재즈 공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김희찬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장은 “올해 문화재가 국가유산 체제로 전면 전환되는 만큼 제주에서 선도적으로 국가유산 활용사업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며 “국가유산 방문의 해를 맞아 제주목 관아를 문화유산 활용 대표 야간 관광명소로 육성해 제주유산의 가치가 더욱 확산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주일보 김형미 기자 / 사진 고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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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3 16:16

[팔도 건축기행] 인천우체국

 인천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 일대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지은 근대 건축물이 밀집해 있으면서 잘 보존돼 있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지역이다.  제물포구락부, 옛 인천부청사(현 중구청), 만국공원(자유공원), 옛 일본 제1은행 지점(인천개항박물관), 옛 일본 제18은행 지점(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옛 일본 제58은행 지점(요식업중앙회 중구지부),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옛 대화조 사무소(카페 팟알), 인천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 답동성당 등 근대 건축물만으로도 시가지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즐비하다.  지역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인천 개항장에서 랜드마크를 꼽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단연 '인천우체국'(인천시 유형문화제 제8호)이다. 인천우체국은 1922년 12월1일 착공해 이듬해 12월10일 준공했다. 1924년 2월9일 공식 개청 행사(낙성식)를 한 지 올해로 100주년이다.  이 건물은 인천중동우체국이 2019년 5월24일 오후 6시 업무를 종료하고 인하대병원 옆 정석빌딩 임시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95년 동안 우체국으로 쓰였다. 문화재로 관리되는 우체국 건물은 인천우체국, 진해우체국(1912년), 곡성 삼기우체국(1948) 등 3곳이 남아있는데, 이 가운데 인천우체국이 가장 규모가 크다.  '팔도건축기행' 인천우체국 편은 인천문화재단이 지난해 말 펴낸 '인천우체국 기록화 조사보고서'를 주로 참고했다.   △우체국 역사 첫 페이지 쓴 인천  인천은 우리나라 우체국 역사의 첫 페이지부터 등장한다.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에게 부산항을 열었지만, 외국에 문호를 연 실질적 개항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규 체결 이듬해 '제물포(인천항) 개항'이다.  1883년 개항으로 인천은 근대 도시로 변모하고, 개항장에는 외국인 거주 지역인 '조계'가 형성됐다. 이 때부터 서구 문물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물밀듯 인천으로, 한성으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근대 통신 수단인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총국은 고종의 명에 따라 1884년 11월17일 수도 한성에 설치됐고, 그 다음날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가장 먼저 설치됐다. 올해는 우리나라 우편 역사가 시작된 우정총국 인천분국 140주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4일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 자리에서 김옥균(1851~1894)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우체국도 문을 닫는다. 대한제국은 1895년 6월1일 한성과 인천에 다시 우체사가 설치돼 우편 업무를 재개하고, 1900년 1월1일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해 국제 배송망을 갖췄으나, 일본우편국과 '불편한 동거'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05년 5월부터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 통신기관 탈취를 목적으로 인천을 비롯한 전국 우체사를 일본 우편국으로 편입했다.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대한제국 우체 업무는 해체돼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국으로 개편됐다.  인천우체국은 해방 이후 일부 건물이 미군 우편국으로 사용됐으며, 한국전쟁 이후 반환돼 역시 우체국으로 운영됐다. 우여곡절의 역사를 더하면 인천우체국 건물이 갖는 상징성은 배가된다.  △100년 전 랜드마크 인천우체국  1918년 인천항에 최초의 근대식 갑문을 갖춘 내항이 건설되면서 재편된 도시의 중심에 인천우체국이 건립됐다. 축항과 해안 매립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항동 일대에는 인천우체국을 비롯해 인천세관, 오사카상선 인천지점,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인천곡물협회 등이 이전해 물류 중심지를 이뤘다.  인천우체국은 현 중구 신포로와 제물량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입지했다. 인천우체국 동쪽에 있는 신포로는 내항 1부두에서 성공회 내동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우체국 북쪽으로는 조선 시대부터 인천과 서울을 잇던 경인가도의 끝에 맞닿아 있다. 건립 당시부터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의 교차점에 있고, 항만이 배후에 있으니 100년 전부터 이 지역 랜드마크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우체국의 입지는 건물 배치와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천우체국은 조적조 건축임에도 석조 건축의 외관을 갖춘 서양식 역사주의 양식을 따랐다.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가 선호했던 건축 양식이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인천우체국 기록화 조사보고서'에서 "우편 업무와 우편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성격상 역사주의 건축 양식이 구축한 신뢰의 이미지를 이어가겠다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디자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서양의 역사주의 건축물에선 건물 모서리에 출입구를 설치하지 않는데, 인천우체국은 '디귿(ㄷ)자' 형태임에도 건물 동북측 모서리에 정문을 낸 점이 독특하다. 안창모 교수는 "우체국에서 대민 서비스가 이뤄지는 공간의 동선을 최대한 줄여 기능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며 "매립지에 형성된 업무중심지구의 2개 주요 간선도로가 만나는 곳에 출입구를 설치하고, 모서리를 둥글고 높게 처리해 시선을 집중시킴으로써 우체국의 존재감을 줄 수 있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건물 배치로 인해 제물량로에서 개항장 중심가를 향해 비스듬하게 진입할 때 인천우체국이 갖는 시각적 효과가 크다. △우정통신박물관으로 탈바꿈 중  현재의 인천우체국은 본래의 '디귿(ㄷ)자' 형태가 아닌 사각형이다. 우체국 중정부에 해당한 1층 후면부는 목조지붕이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 1954년 전쟁 피해 복구 차원의 대수선 공사에서 중정부를 2층으로 증축해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신축 당시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고, 1924년 1월 발간된 조선체신협회 잡지에 공사 개요가 기록돼 있다. 설계는 체신청 체신기사 오카다 준조가 맡았으며, 연면적 598평(약 1천977㎡)에 1층 268평, 2층 176평 등으로 구성됐다.  둥글게 처리된 동북측 모서리에 돌출된 정문은 석조를 사용해 위용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정문 양측에는 원형 기둥을 세웠고, 상부는 부조로 수평적 패턴을 새겼다. 2층 동북측 모서리에는 원형 기둥 5개를 둘러 건물의 정면성과 장식성을 더했다. 신축 당시 벽체는 연와조(벽돌)로, 슬라브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정문은 석재로 만든 혼합 구조다. 지난해 9월 인천우체국 원형 파악을 위한 일부 해체를 통해 원래의 구조와 재료 일부가 확인됐다.  인천시는 지난해 6월 정부로부터 인천우체국 건물을 매입하고, 용역을 통해 '건물 보존·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인천시는 최근 인천우체국의 역사성과 상징성 등을 고려해 '우정통신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인천시는 1923년 기준으로 원형을 보존한다는 원칙으로 본관 중정부, 별관과 수위실은 철거할 방침이다. 인천시는 내달 중 인천우체국 보존·활용 방안을 확정하고, 행정 절차와 리모델링 등을 거쳐 2027년 박물관을 개관할 계획이다.  우정통신박물관 조성 과정에서 인천우체국과 관련한 새로운 역사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1948년 5월 노동당원의 인천우체국 소이탄 투척 사건, 1979년 한국 첫 여성 집배원 입사 등은 여전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인천우체국과 관련된 전보·전신 역사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심을 키울 필요가 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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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9 15:28

[팔도 건축기행] 대구 사유원

숨 가쁜 도시의 삶에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의 쉼터, 품위와 격조를 갖춘 오롯한 공간과 장소를 생각하게 된다. 수목 원림 물 바위 언덕 바람 계절의 자연 속에서, 뭐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사유적 이름의 건축과 공간들을 사색하게 된다. 30여 세월을 땅과 나무를 아우르고 공간을 설계하여 고전의 뜻을 현대 삶에 새기고자 하는 사유의 정원, 사유원(思維園)은 2021년 9월 세상에 펼쳐졌다. 지난해에 팔공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신공항 예정지 군위군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팔공산 아래 터널길을 지나서 청평 못 기슭 사유원은 도시에서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사유원은 자연 수목원이 아니라, 건축 공간이 있는 수목공간원(樹木空間園)이다. 2018년 프리츠커상 건축가 포르투갈의 알바로시자 건축(3 작품, 카를로스 카스타네 공동), 한국 대표 건축가 승효상 건축(9 작품), 최욱 박창렬의 건축과 지금 국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전영선의 조경, 고기영의 조명, 중국 서예가 웨이량의 작품들이 새겨져 있다. 알바로 시자와 승효상의 건축 공간을 따라서 사유해 본다. △비움에서부터- ‘극도의 비움에 이르러 지극한 평온을 지킨다’ 도덕경 제16장 구절을 일깨우는 치허문(致虛門)은 입구의 정문 건축이다. 여기서부터 머릿속을 텅 비우라고 이른다. 이곳은 팔공산 북쪽 3 능선 2 계곡 지형의 30만 평의 산지이다. 18곳의 건축과 장소, 11개 산책로 의미와 뜻을 사유하면서 능선과 계곡을 걷게 된다. 4시간여 사유의 순례길을 내려서 치허문을 나서면 새로운 채움이 도시로 향하게 할 것이다. △소요헌 (逍遼軒)- 입구에서 ‘꼬부랑길’을 오르면 알바로 시자의 소대(전망대)가 우뚝 서 있고 소요헌(아트홀)이 길게 누워있다. 그의 3개 작품은 대학 캠퍼스를 제외하고는 사유원이 유일할 것이다. 북측 긴 벽 선형 흐름에 따라서 진입하게 된다. 출입문도 유리창도 없는 어둑한 콘크리트 동굴은, 시간과 빛과 음영에 의해서 익숙해진다. 두 갈래 길, 직선의 큰길과 곡선의 작은 길, 그 사이가 이루는 외부의 중정, 가로지르는 길의 연결로 구성된다. 빛의 밝기에 따르게 된다. 큰길은 점점 높아져서 빛의 정점 조형에 이르고, 작은길은 낮아져 ‘생명의 알’에 이른다. 이 건축은, 마드리드 오에스테 공원에 피카소의 명작(게르니카, 임신한 여인) 전시를 위한 가상 프로젝트였다 한다. 설계도가 잠자고 있음을 알게 된 설립자의 오랜 설득으로 이곳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스페인전쟁 게르니카 폭격과 한국동란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는 생명, 죽음, 순환의 공감대로 연결되어서 이 땅의 건축으로 새겨졌다. 게르니카 참상을 말하는 빛의 정점에 매달린 붉은 철 조형물, 생명의 알, 긴 나무 벤치 작품 모두는 건축가의 작품이다. 포르투대학 조각과로 입학하여 건축과로 전향한 그의 작품 세계를 펼친 아트홀이다. 입구의 작은 북카페(요요빈빈)에는 작품집, 모형, 벽 천정에 컨셉 스케치와 누드크로키가 있다. 커피와 함께 애매한? 건축의 시를 음미하는 공간이다. △소대 (巢臺) - 대자연 속의 낮은 건축들에 비하여 키가 높은(20,5m) 전망대이다. 팔공산을 향한 그리움의 몸짓처럼 15도 기울임이다. 빛없는 어두운 계단을 돌고 돌아 탑을 오른다. 불규칙의 개구부는 각 향을 바라보는 세 개의 눈이며 새 집(巢臺, 제비집이 있다) 출입문이다. 오름의 절정은 펼쳐진 대자연을 바라보는 전망 테라스이다. 소요원을 건축하고 나서 높은 전망대 세우기를 간절히 부탁했다는 건축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다. 낮음과 높음, 근경과 원경, 소자연과 대자연의 상응이다. 멀리서 보는 전망대는 나무숲 초록 바다에 머리를 내민 하얀 등대이다. △내심낙원 (內心樂園) - 사유의 순례길에서 만나는 작은 성소(聖所)는 알바로 시자 설계의 가장 작은 종교건축일 것이다. 북쪽 경사지에 선명한 기하학 조형은 육면체와 삼각형의 내부 공간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정원(內心樂園)의 묵상과 명상을 이끄는 빛의 근원은 정면 위 우연한 창, 아침 햇살의 영적 궤적을 설계했을 것이다. 근대기 한국 가톨릭계의 지식인 김익진(설립자의 장인)과 그와 영혼의 우정을 나누었던 차메우스 신부를 기리는 경당이다. 두 영혼의 삶을 기록한 ’두 아버지의 정원‘이 함께 헌정되었다. △현암 (玄巖) - 건축가 승효상은 설립자의 생각을 함께하며 건축을 성찰하고 공간을 순례하듯 사유원을 설계하였다. 현암은 산마루 중심 자리에 지어진 사유원 첫 번째 집이다. 자연 풍광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집은, 팔공을 바라보며 반 층 올라서 옥상 전망 마루에, 반 층 내려서 실내에 이르는 스킾 플로어 단면이다. 집의 높이를 완충하여 바위처럼 묻히기도 하고, 대자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3면 유리 건축은 자연에 돌출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능성에는 금오산을 바라보며 금오유현대(金烏幽玄臺), 갈대밭 별유동천(別有洞天)으로 이어진다. △명정 (暝庭)- 좁은 계단을 따라 시간을 길게 돌아서 내려오면 땅의 아래 피안의 공간이다. 지상에서 보아왔던 풍경들을 잊어버리는 정지된 시간 침묵의 공간 명상의 정원(暝庭)이다. 물을 사이에 두고 벤치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면 붉은 벽을 마주하며 사방 벽면 디테일은 각각 표정을 달리하여 건축의 벽으로 바라보게 한다. 좁고 절제된 길, 수도원 성소의 부속실 켜와 좁은 계단을 걷게 된다. 벽으로 둘러서 쌓인 장방형 땅의 아래 공간 위에는 하늘이 있고 구름만이 흘러간다. 좁고도 가파른 계단으로 다시 지상의 세상으로 나오면, 멀리 산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풍설기천년 (風雪幾千年)- 사유원 탄생의 원초적 공간이다.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모과나무를 이곳 땅에 되살리고 500여 년 성상 108그루 모과나무의 6,000평 정원이다. 올라가는 길에서는 무표정한 회색 긴 벽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벽을 돌아서 길게 우회하는 좁은 길은 신천지에 이르는 과정, 좁은 길을 벗어나면 놀라움에 경탄하게 된다. 연못 위로 펼쳐진 기천년 정원이다. 벽을 기댄 데크, 연못과 바위, 코르텐 강판은 모과나무 세월의 배경이었다. △와사 (瓦寺)- 정자(亭子)가 앉아 있을 자리에 누워있는 절(瓦寺) 수도원이다. 누워있는 부처(와불)의 몸통에 들어와 있는 듯한데 명상의 수도원이라 한다. 계곡을 따라서 몸을 낮춘 코르텐 강판 구조의 마디마디. 바닥의 레벨에 따라서 내부 공간 분위기와 밖의 풍경을 달리한다. 천정의 작은 구멍으로 걸러진 햇살의 방, 수직 루버 사이 긴 그림자의 방에서는 생각도 달리하는 방인가?. 이곳에서는 잠시 누워 육신의 피곤함에 대하여 사유해야 할 것 같지만 하산의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만남 좋은 건축 탄생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좋은 만남이 첫째이다. 인문 예술적 소양을 지닌 유재성 회장은 건축가를 비롯한 예술가들과의 교감으로 사유원을 탄생시킨 좋은 건축주이다. 사유원 이전, 그의 건축 안목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디자인이 특이한 사옥과 공연 강당, 정원, 식당은 품격있는 응접실이었다. 공장 벽면에는 마티스 대형그림이 있었다. 선대부터 지켜온 작은 집 거실벽의 디지털 족보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보았다. 사랑채 모헌(某軒)을 지으며 건축가 조경가와 쌓았던 교감이 사유원의 바탕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켜 공간 사랑채와 정원 에서 예술 담소는 개인적 취향이라면, 사유원 설립은 평생 꿈을 세상에 나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것이다. 최상대 /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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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5 14:24

[팔도건축기행-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6) 경남문화예술회관

경남문화예술회관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 고(故)김중업 건축가의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빚어낸 공간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건축적 랜드마크는 물론, 도민이 예술을 즐기고 누리는 기능적 랜드마크로서 경남 대표 문화예술기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이곳을 찾았다. 진주 도심을 흐르는 남강변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경남문화예술회관이 한눈에 보인다. 진주를 밝히는 건축물답게 멀리서 봐도 그 웅장함과 기개는 예사롭지 않다. 밖에서 보면 하나의 웅장한 건물로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부를 둘러보면 다양한 건축적 요소를 지닌 흥미로운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전통과 현대 건축의 결합=경남문화예술회관은 김중업 선생이 1981년 공모에 당선돼 1984년 설계를 완성하고 1988년 준공됐다. 현상설계 공모 당시에는 건물이 들어설 부지가 진주성 내에 잡혀 있었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설계하면서 천년의 도시인 진주의 역사성과 진주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설계 의도를 살펴보면 그 마음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민족수호의 아성이었고 논개의 의기와 더불어 유서깊은 진주성이 남강의 우아한 자태를 빚어 대지조건이 특이하고 매년 개천제가 열리는 오랜 전통이 더욱 보람있는 일이라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기에 전통과 오늘의 만남이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야하고 모이는 이들에게 뿌듯함을 던져 주려고 애썼다." 스스로 가장 아끼는 도시 중 하나로 꼽았던 진주에 세워지는 건물인 만큼 김중업은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해 본래의 질서를 보존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고심했다. 현상설계 당선 이후 막상 건물을 지으려고 하자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이 이미 진주성 한편에 위치해 있고, 진주성의 공원화 사업, 문화재 보호 등으로 건물을 지을 만한 땅이 없어 최종적으로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건물 외관은 우리 전통 건축의 기둥과 공포, 한식지붕 등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모습이 대칭 형태의 비례를 이루고 있다. 사각형의 한식 지붕 아래에는 거대한 십자형 열주를 설치했다. 네 가닥으로 갈라지는 형태의 반원형의 열주 상부는 옛날 관아건물이나 사찰, 궁궐 등에 적용된 공포를 김중업 방식의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해 지붕을 받치는 조형물로 나타나고 있다. 넓은 지붕 아래 같은 형태의 십자형 열주가 반복적으로 배치돼 있어 건물을 바라보면 리듬감이 느껴진다. 지붕과 열주들 사이 전벽돌로 둘러쌓인 원형의 공연장이 있다. 외벽 곳곳에는 전벽돌로 구워 만든 삼각 벽돌을 사용했는데, 곡선을 타고 흐르며 입체감을 준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전면에 긴 계단을 설치해 열주와 함께 건물의 기념성을 높이고 있다. 또 대공연장과 관리실 등 크고 작은 원형 공간과 지붕, 사무실 등의 직각적 공간이 기하학적 형태로 대조를 이루며 조형미가 강조된다. 기단부를 살펴보면 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 성곽이 떠오른다. "예도인 진주시만이 아니라 경상남도의 상징이어야 하고 예술성에서도 유니크한 장소이어야 했다. 그러기에 원통 공연장에 넓고 당당한 지붕을 높고 우아한 기둥으로 받쳐 넓고 시원한 계단이 더욱 상승감을 고조시켰다." ◇내부 공간의 건축적 미학=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지하부터 옥상까지 계단을 따라가면서 공간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다. 나선형의 계단, 아치형 통로, 외부의 경관을 편집하는 원형의 창문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경험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실내외 곳곳에 구성돼 있는 곡선과 아치 형태는 외부의 웅장함과 별도로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계단을 타고 올라온 옥상에는 야외공연장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지붕에 올려져 있는 전통 형태의 한옥 기와가 보인다. 한옥이 가지는 지붕의 선을 살리기 위해 밑을 깎아 올린 형태를 볼 수 있다. 남강과 뒤벼리 암벽, 새벼리 등 진주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옥상에서 한층 내려가면 예술 관련 협회들과 회관 사무실 등이 마련돼 있다. 흥미로운 건 밖에서 바라봤을 때 해당 층이 보이지 않는데, 바로 사각형의 한식지붕 안에 숨어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복도 양쪽에는 원형 천창이 나있다. 바로 아래에는 전망대다. 전망대는 지붕처마 밑에 열려 있는 공간으로 마찬가지로 외부 형식이다. 전망대에서는 마치 촉석루에서 바라보듯 기둥과 처마와 함께 흐르는 남강과 뒤벼리, 산과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옥상과는 또다른 풍경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지붕 아래 곳곳에 마련돼 있는 물이 내려오는 곡선 형태의 우수관도 발견할 수 있다. 대공연장 로비는 남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투명한 공간으로 이뤄졌는데, 2009년 기존 건물에 강화유리를 적용하는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지하부까지 계단을 걸어내려가 아치를 빠져 나오니 선큰가든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곳에 연못 형태의 수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선큰가든을 두어 공연이 없을 때도 옥상에서 진주성과 남강을 보게함을 물론 마당놀이 등을 즐길 수 있게 했다." ◇경남 대표 문화예술 공간 가치도= “더 예술 속으로, 더 도민 속으로”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 미국 뉴욕 링컨센터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장들은 한 도시의 문화예술 브랜드이자 문화 품격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올해로 36년을 맞은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전통과 현대를 교차하는 다양한 장르의 공연과 전시, 교육프로그램 등으로 경남도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함께 해오면서 존재 의미를 각인시켜 왔다. 우리나라 공연장 역사로 보더라도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의미는 남다르다. 경남문화예술회관은 문화예술회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공연장으로, 1988년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과 같은해 개관했다. 이전까지 국내 공연장으로는 국립극장, 부산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지역에서 현 규모의 공연장을 만든다는 건 예술단체, 문화예술 인프라 등의 환경으로 봤을 때 매우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현재 경남문화예술회관은 1528석 전문 공연장과 2개의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뮤지컬, 발레, 오페라, 연극, 클래식, 콘서트, 전통예술,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기획공연을 연간 30여건, 대관공연 포함 연간 100여건의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2023년 기준 가동률 89%로, 이 기간 동안 13만여명이 이용한 경남 대표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경남문화예술회관의 기획공연은 상하반기로 나눠 ‘GREAT SEASON’ 으로 브랜딩해 운영하고 있다. 시즌제는 유럽 등 주요 공연장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한시즌을 설정하고 그 기간 중 모든 공연을 일괄 오픈해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백건우, 조성진, 정경화, 조수미, 윈튼마살리스, 강미선, 유키 구라모토 등 세계적 아티스트가 경남문화예술회관 공연장 무대에 올랐으며, 국립발레단, 덴마크로얄필하모닉, 모스크바필하모닉, 도이치방송교향악단 등 유수의 공연단체도 관객과 교감의 시간을 가졌다. 경남신문=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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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15:22

[팔도 건축기행]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탐험하고, 찾아가는 건축입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이하 문화전당)을 소개하며 유현준 건축가가 한 말이다. 그는 “문화전당은 개미굴처럼 계속해서 방이 연결되는, 무궁무진한 관계를 갖는 좋은 설계”라고 말했다. 정형화되지 않았기에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자 건물이 주인이 아닌, 사람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벤트가 주인이 되는 공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공공건축의 의미가 ‘쓰임’에 있다고 한다면,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건물이라고도 했다. 그는 70만 조회수를 기록한 유튜브 영상 ‘공공건축은 잘 만들 수 없을까’에서 한국의 가볼 만한 공공건축으로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원주의 뮤지엄 산과 문화전당을 꼽았다. 아시아를 주제로 한 다양한 문화예술과 생활문화를 만나는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전당은 지난 2015년 개관 후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곳곳에 조성한 정원은 푸르름을 더해가며 휴식처를 제공하고 아시아문화광장은 워터슬라이드장과 자동차극장으로도 변신, 무한한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문화전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공간이 갖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전당이 생산한 다양한 콘텐츠 역시 인기 상한가를 기록중이다. 지난해에만 연간 250만명이 문화전당을 찾았다. ◇기억, 빛, 숲, 광장 지난 2015년 개관한 문화전당은 연면적 156.673㎡, 지상 4층, 지하 4층 규모로 국립중앙박물관과 예술의 전당을 넘어서는 메머드 공간이다. 1980년 5·18 최후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 부지에 건립된 문화전당은 ‘장소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문화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품은 장소였기에 그 ‘기억’을 보존해야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2005년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작으로 선정된 우규승 건축가의 ‘빛의 숲(Light of Forest)’은 건물을 과감히 ‘지하공간’에 조성한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그는 역사적 건물인 전남도청 건물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10층 높이인 지하 25m에 건물을 배치했고, 이를 통해 조성된 건축물의 옥상인 지상공간에는 다양한 광장과 조경 경관을 연출, 도심 속 열린 공원을 만들었다. 또 정육면체의 채광창을 두어 낮에는 자연광을 건물 내부로 전달하고, 밤에는 인공조명이 공원을 밝혀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도록 설계했다. 문화전당의 중심은 대규모 아시아문화광장이다. 길이와 폭이 각각 50m에 달하는 대형 광장은 콘서트, 어린이 축제, 페스티벌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는 열린 공간이다. 지하철 역사, 금남지하상가, 계단, 에스컬레이트 등을 통한 다양한 접근 동선이 광장으로 모이고, 광장을 통해 문화창조원 등 각각의 문화시설로 흩어져 나가며 볼거리를 접하도록 한다. 문화정보원(박물관·도서관), 문화창조원(전시관), 어린이문화원, 예술극장 등 문화전당의 주요시설은 ‘기본틀을 완성하고 채워나가는 전략’을 구사해 전시, 공연, 행사의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층고가 18m에 달하는 창조원 복합1관은 메머드급 전시에 안성맞춤으로, 현재 진행중인 ‘디어 바바뇨냐’처럼 공간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 대형 개폐형 유리도어를 통해 내부 공간이 외부 광장으로 확장되는 예술극장도 흥미로운 장소다. 국내 최대 규모의 어린이문화공간인 어린이문화원은 지상에서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유리벽을 통해 공간적 개방감을 부여,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천장의 경사면을 따라 외부에 조성된 옥상정원은 아이들의 놀이공간이자, 무등산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빛과 숲이 교차하는 메모리얼 문화 공간을 구상한” 우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가 공원이다. 광주가 녹지 없는 도시임을 인지한 그는 건물을 지하로 내리는 대신, 도시의 마루와 마당 역할을 하는 녹지를 곳곳에 조성해 공원을 만들었고, 초기에 식재했던 나무들이 커 나가면서 공간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문화창조원 경사 지붕에 만들어진 ‘하늘마당’이다. 광주의 핫플레이스인 동명동, 조선대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하늘마당은 공연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자,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았다. 문화전당의 중심시설 중 하나로 옛 전남도청에 들어서는 민주평화교류원은 새롭게 조성된다. 문화전당 조성 과정에서 전남도청 훼손 문제가 불거졌고, 지난해 8년만에 원형복원 작업이 재개되면서 2025년 완공 후 콘텐츠를 채워 새롭게 문을 연다.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아쉽게도 문화전당의 상징이었던 대형 미디어월은 철거될 예정이다. 문화전당은 기존의 유명 건축물과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화려한 외관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랜드마크를 기대했던 시민들 사이에서는 건물이 지하로 들어간 점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아쉬움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문화전당은 유기체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문화전당은 한국관광공사가 한국만의 매력과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는 장소를 선정하는 ‘코리아 유니크 베뉴’에 3년 연속 선정됐으며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도 뽑혔다. ◇1년 내내 볼거리와 즐길거리 최근 2~3년 사이 문화전당을 찾는 이들이 급증한 이유는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건물과 함께 다양한 콘텐츠가 인기를 모으면서다. 문화전당이 지난 8년간 만들어낸 콘텐츠는 1650건이었으며 68%인 1120건을 직접 창·제작했다. 지난해 열린 ‘사유정원, 상상 너머를 거닐다’전에는 19만명이 다녀갔으며 ‘몰입미감’도 14만명이 관람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음 지음’과 ‘디어 바바뇨냐’전도 10만명을 넘으며 순항중이다. 또 매년 열리는 ACC 월드뮤직 페스티벌, 브런치 콘서트 등도 인기 프로그램중 하나다. 전당 곳곳에 자리한 공공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이불의 ‘무제’를 비롯해 왕두의 ‘승리 !’. 최정화의 ‘Normal Scape’, 마탈리 크라셋의 ‘리플렉시티’, 우고 론디노네의 ‘ACC 매직마운틴’ 등이 있다. ‘지하’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늘마당과 충장로 1가 입구에 설치한 에스컬레이터는 전당으로의 접근성을 높였으며 동명동과 5·18 민주광장 사이를 잇는 플라자 브릿지의 콘크리트 벽면을 투명 아크릴로 대체, 지하공간이 내려다 보이도록 한 점도 방문객을 늘리는 효과를 거뒀다. 특히 지난해 전당 안에 문을 연 카페 ‘진성성’은 사람들을 전당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화전당을 방문할 때 꼭 찾아야할 곳이 있다. 5·18 민주광장 맞은 편에 자리한 전일빌딩 245다. 5·18 당시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전일빌딩 245 옥상에 올라가면 문화전당과 푸른 녹지를 한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건물의 규모가 방대하다 보니 도슨투 투어를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 매일 4차례(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2시30분·4시) 투어를 진행중이며 4월부터는 건축투어, 공공미술 투어, ACC 한바퀴 등 주제를 세분해 운영한다. 우규승 건축가의 설명과 모형 등을 통해 전당의 이곳 저곳을 살필 수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 아카이브 ‘빛의 숲’을 찾거나 앞서 언급한 유현준 건축가의 영상을 보고 공간을 둘러보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슨트 임희영씨는 “문화전당을 방문하신 분들이 처음에는 지하에 있는 공간을 의아해 하지만 함께 투어를 하다보면 재미있는 공간구성에 흥미를 가진다”며 “다양한 문화전당의 매력을 느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광주일보 김미은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김미은 기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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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4 16:06

[팔도 건축기행] 제주 극장의 추억

어떤 장소 또는 건축물이 한 사람의 추억이 되려면, 그곳에서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장소도 건축물도 세월을 입어간다. 그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조차 없는 사람으로 나뉠 만큼 1960년대부터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영화를 상영하며 사람들에게 웃음과 울음을 선물했던 건축물은 이제 그 역할이나 장소의 의미가 잊혀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제주의 문화예술 공간을 들여다보며 현재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의미를 찾아본다. ▲ 1965년 완공 제주 최대 규모 영화관 ‘동양극장’ ‘동양극장’은 1965년 세워진 제주 최대 규모의 영화관이다. 제주 동문시장과 함께 나란히 들어선 제주 최초의 복합문화건물이었다. 건물면적은 3690㎡로 본관은 2층이지만, 영화관 객석을 포함하면 지상 4층 규모다. 동양극장의 규모는 1200석이었다. 당시 제주극장이 475석, 대정읍의 상설극장이 350석, 대한극장이 598석, 삼일극장이 756석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대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35㎜ 신식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하고 대규모 좌석을 갖춘 동양극장은 개관 당시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동양극장은 1990년(추정) 현대적 추세에 걸맞은 시설로 개보수되며 ‘시네하우스’로 명칭이 바뀐다. 관람석과 스크린 사이의 공간을 10m 이상 확대하고 좌석과 좌석 사이가 넓어졌다. 첨단 영상과 음향시설을 도입하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렸다. 복도는 각종 전시회 개최가 가능하도록 밝은색의 벽돌과 석재로 마감했다. 이후 2000년 상영관을 2개로 증축하는 개보수를 했지만,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극장은 이제 건물만 남아 추억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동양극장과 동문시장 일대 건축물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근현대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파도치는 바다를 유영하는 한 척의 배 동양극장의 설계는 제주 출신 건축가 고(故) 김한섭 교수(1920-1990)가 맡았다. 1세대 현대 건축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화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송정공업중학교(전남 목포)와 일본의 대학에서 건축 전문교육을 받았다. 전남대 건축과 교수를 시작으로 홍익대와 중앙대 교수를 역임했다. 김 교수는 고향 제주에서 처음 설계한 동양극장 건축물에 모더니즘 양식과 낭만적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건축물의 큰 지붕은 역동적인 곡선으로 배의 앞머리를 닮았다. 지붕은 물결 모양을 반복하면서 멀리서 바라보면 건축물 자체가 한 척의 배를 떠오르게 설계됐다. 극장 출입구 상부의 원형 아치는 파도를 상징하고, 천막을 쳐놓은 것처럼 돌출된 객석 부분은 바람을 맞는 돛대처럼 보인다. 오른쪽의 원형 창문은 여객선의 창문을 떠올리게 한다. 또 상부 영사실은 노련한 선장이 키를 잡고 바다를 응시하는 조타실을 구현한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양극장은 전체적으로 파도가 물결치는 것을 닮아 제주다움에 대한 김 교수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건축학계에서는 계단 창문까지 여객선의 원형 창을 도입하는 등 제주의 바다와 산지포구를 모티브로 낭만적으로 표현했다고 분석한다. “제주 원도심의 당당한 랜드마크로 현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라고 입을 모아 호평할 정도로 현대적이라는 평가다. ▲1963년 서귀읍 최초의 극장 ‘서귀포 관광극장’ ‘서귀포관광극장’이라는 허름하고 빛바랜 표지판을 보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극장 입구에 들어서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운치 있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극장으로 들어서면 하늘로 열려 있는 야외극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150여 석의 나무 좌석과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삼면의 시멘트벽, 그리고 그 벽을 장식하는 담쟁이덩굴이 무대까지 이어진다. 동절기를 제외한 3월~11월 매주 토요일 클래식과 대중음악 등 다양한 공연예술을 관람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귀포관광극장은 제주도 서귀포시 이중섭 문화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서귀포관광극장은 1963년 개관 이후 오랫동안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가 열리면서 서귀포 시민들의 추억이 깃든 장소다. 2층 240평의 면적에 정원 667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1963년 1월 제주에 온 안익태 선생이 이곳을 찾아 직접 오르간을 빌려 연주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1965년 4월에는 대일굴욕외교반대특위 주최로 당시 민정당의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박순천, 윤제술, 김성용, 김수한씨 등이 이곳에서 한일회담 반대를 성토하기도 했다. 또한 당대 유명 가수들의 리사이틀이 잇따라 열렸는가 하면 벤허·쿼바디스 같은 명작도, 전설이 된 이소룡의 모습도, 디즈니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도, 로봇 태권브이도 이 공간에서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1973년 6월 23일 오후 9시45분쯤 극영화 ‘여로’ 상영 중 화재 소동으로 관객 100여 명이 다치면서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뒤 문을 닫아야 했다. 방치됐던 서귀포관광극장은 2013년부터 본래의 외형을 살리고 낡은 지붕을 걷어내는 단장을 마친 후 이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빛의 극장’ 미디어아트로 만나는 이중섭 서귀포관광극장이 ‘빛의 극장’으로 거듭나며 여행자들의 발길을 멈춰 세우고 있다. 서귀포시는 지난해 10월부터 극장 건물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를 통해 이중섭 화백의 삶과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선보이고 있다. 단순히 작품을 나열해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 해설을 덧붙인 미디어아트를 제작해 눈길을 끈다. 미디어아트 상영 길이는 7분 정도로 ‘조선의 들소’, ‘가족’, ‘환상’, ‘마지막 여정’, ‘유산’ 등 모두 5개의 주제로 이뤄졌다. 이중섭 화백의 작품 38점도 만나볼 수 있다. 미디어아트는 10월~3월에는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4~9월에는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연속 상영된다. 미디어아트는 이중섭 화백 관련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크리스마스, 새해맞이 등 특정 기념일을 표현한 콘텐츠도 추가로 선보여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나갈 계획이다. 제주일보=김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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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22 14:45

[팔도 건축기행] 용인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

건축은 사람들의 여러 생활을 담기 위한 수단이다. 어떤 목적을 갖는 가에 따라 건축에 들어가는 기술과 구조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건축물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철학에 따라 여러 형태를 띄게 된다. 건축은 사람들의 생활을 담는 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과 닮는다. 한국지방신문협회는 공동으로 대한민국 각 지역의 건축물을 조명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팔도건축기행’은 지역의 랜드마크에서부터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건축물까지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해 건축물에 담긴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살펴본다.┃편집자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42번 국도를 달리다,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지쉬운 작은 골목길은 산자락에 다다라서야 끝이 나는데, 그 곳에 누군가 숨겨놓은 듯 작고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산으로 둘러쌓인 고즈넉한 공간 위로 들어선 새하얀 외벽의 건물. 회색의 지붕 위로 삐친 작은 십자가와 ‘天主堂(천주당)’이라는 한자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오는 이들을 반겨주는 이 곳은 ‘은이성지 김가항성당’이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687번지. 숨겨진 동네라는 뜻으로 ‘은이隱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곳에 들어선 김가항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주요 성지에 위치하면서 중국 원나라 때인 17세기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16년에 섰으면서 천주교의 주요 성지, 해외의 옛 건축형식을 하고 있는 김가항 성당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김가항 성당의 구조와 역사 김가항 성당은 중국 원대인 숭전년간(1628년~1644년) 중국 상해 황포강 건너 김 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김가항’이라 이름 붙은 곳에 큰 주택을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중국 남경교구에 속했던 김가항 성당은 1845년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러던 것이 푸동 경제특구 개발이 한창이던 2000년 상해인민정부가 김가항 성당을 철거하기로 하면서 긴박한 이전작업이 진행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김가항 성당은 원래 건축 부재 그대로 중국 상해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용인 남곡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성당 구조로 보자면, 중국 목구조의 대량식, 평면 T자형을 띄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6칸, 모두 296.89㎡로 소박한 모습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면에 맛배지붕의 합각면에 3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측면으로는 매 칸 마다 1개의 아치창이 나 있고 벽은 모두 벽돌 벽 위에 몰탈로 마감했다. 중국의 회색기와로 마감된 지붕 마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붕가구형식은 전통적인 중국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대량식 기둥을 세우고 그 상부에 대들보를 올린 다음 다시 대공(동자주)를 세워 가구를 구성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한국의 건축물과 차이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종축의 기둥간격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수 차례의 증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 기둥의 간격이 다르고 건축 부재도 달라 성당이 지나온 역사를 상상케 한다. 은이·골배마실성지 박경훈 요셉 전담신부는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봤던 김가항 성당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복원됐다”며 “풀 한 포기에도 김대건 신부의 얼이 있는 은이성지에 김가항 성당이 다시 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을 관통한 역사의 장면들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은 조선 내 천주교 교세 확장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인 만큼 한국 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용인 남곡리에 자리 잡은 김가항 성당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주 1개 등은 상해 김가항 성당 당시의 것 그대로 사용된 것이어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현장을 기억하는 유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천주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김가항 성당은 격변하던 19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목격자라고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1872년 대성당이 별도로 지어지면서 김가항 성당은 잠시 학교로 사용됐지만, 1937년 일본군의 포화로 대성당이 붕괴돼 다시 성당으로 사용됐다. 이후 1948년 대성당이 다시 섰지만 이마저도 이듬해 중국 국민당 정부군에 의해 폭파되면서 김가항 성당이 성당으로서 유지됐다. 중국 문화명기인 1966년에서 1976년에는 철공소로 사용되다가 1987년에서야 본당으로 회복됐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김가항 성당의 역사는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혼란과 고통을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김가항 성당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3년 한중수교로 인해 한국 신자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떠오르면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도 김가항 성당의 우여곡절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도시화로 철거 위기를 맞으며 당시 누구도 생각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2000년 7월 상해정부의 푸동 개발정책에 따라 철거계획이 통보됐고, 2001년 3월 25일 마지막 미사를 끝으로 철거절차에 들어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뜻을 가진 이들이 힘을 합해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부터 순교 전까지 생활하고 사목활동을 했던 은이성지로 이전을 결정했다. 이 역시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은이성지는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교우촌이었던 마을이 초토화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밭이 됐으며, 또 공장이 들어서 상해에서 어렵게 확보한 김가항 성당의 부재를 10여년 간이나 보관만 해야 했다. 2013년 가까스로 공장 이전 합의가 성사되면서 김가항 성당은 지금의 은이성지에 자리를 잡게 됐다. 소박해 보이는 이 건축물이 헤쳐온 험난했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김가항 성당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떠한 어려움도 당신을 흔들 수 없다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참고=김대건 신부와 은이성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최근 동양인으로 처음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성상이 설치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1827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용인 골배마실로 피난을 온 소년 김대건은 은이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에 의해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 아버지가 순교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서품을 받았으며, 다시 1845년 은이로 돌아와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1846년 6월 체포돼 9월 16일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신념을 실천한 인물로 종교를 떠나 위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경인일보=김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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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08 1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