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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청춘예찬] 전주대 한문교육과



한문교육과가 설치된 대학은 전국적으로 10여개 남짓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대학마다 중문학·중국어 학과 신설이 붐을 이루고 있으나 한문교육과는 제자리다.

 

학과를 새로 만드는 대학도 없지만 폐지하는 대학도 없다. 한문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용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다.

 

대학내에서 뿐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평가를 받는 전주대 한문교육과는 전주대 전신인 영생대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주대 한문교육과는 전국에서 다섯번째, 호남에서 처음 개설됐다. 74년 30명 정원의 야간 대학으로 문을 열었을 때 배움의 기회를 놓친 많은 인재들이 이곳으로 몰렸다.

 

특히 현직 교사들에게 더 할 수 없이 좋은 배움의 장이 됐다. 실제 한문교육과 1회 졸업생 22명(78년 졸업)중 17명이 현재까지 교직에 몸담고 있다.

 

1회 졸업생 은종삼씨(익산교육청 장학사)의 회고. “75년 2학년 편입시험에 많은 현직 교사들이 몰렸습니다. 학생들간 많게는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들 배움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주경야독의 어려움속에서도 교내 체육대회때마다 한문교육과가 종합성적 1∼2위를 다툴 만큼 학과생들간 단합과 우의가 깊었다. 이같은 우의는 지금까지 이어져 1회 졸업생끼리 ‘출람회’라는 이름으로 매월 한차례씩 모임을 갖고 있다.

 

2회 졸업생 김홍광씨(장수 계북중교장)의 대학시절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다. “현재 대학교 앞에는 소주·맥주집으로 꽉 들어차 있지만 옛 캠퍼스 주변은 거의가 막걸리집이었습니다. 학교 강의가 끝나면 보통 저녁 10시가 됩니다. 직장에 강의에 지칠 법도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삼삼오오 막걸리집에 모여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낭만이 있었습니다.”

 

김씨는 당시 대학에 출강한 조두현교수의 영향을 받아 한시에 심취했고, 최근 ‘한국한시진보’ 책을 내게 된 것도 그 영향에서였다고 했다.

 

초창기 동창들간 끈끈한 정은 이후 전주대 한문교육과 전통으로 더욱 발전됐다. 특히 방학중 단체로 한문강독 시간을 갖는 전통은 선후배간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전북지역 한문교과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김상곤씨(전일여고 교사)의 이야기.

 

“방학을 이용해 틈틈이 후배들과 동행합숙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부와 함께 후배를 지도하는 독특한 수련활동에 교수님들도 함께 해 배움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뿐아니라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한문강독을 위한 수련활동 장소로는 우리 고장의 유명 서원과 향교는 물론, 물론 멀리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화순의 도남제 서원, 구례서원, 청학동서당, 화개서당, 칠불암 등지에 걸쳐 있다.

 

특별한 방학나기 외에도 한문강독을 할 수 있도록 강독실을 마련, 선후배들이 함께 공부를 했던 재학시절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는 동문들이 많다.

 

엄격한 규율이 지켜지는 강독실의 분위기는 보통 자유롭게 대학생활을 보내는 타학과와 차별되며, 학내 체육대회 등에서 이같은 분위기속에 길러진 규율의식과 단합·열정이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전주대 한문교육과 출신들이 가장 많이 포진한 곳은 교직이다. 전주시내 30여개 중·고교의 한문교육을 이대학 출신이 담당하는 것을 비롯, 전국적으로 이대학 출신 한문교사 수가 2∼3백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도내 뿐아니라 전국 각지 출신들이 여기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고향 교단에 둥지를 트는 사례가 많다. 제주도에서 출신으로 현재 서귀포 삼성여중 교사로 있는 김태국씨(88년 졸업)는 전주로 신혼여행을 올 만큼 한문교육과와 전주에 흠뻑 빠졌을 정도.

 

장동희 운봉중교장은 이대학 출신 한문과 교사들의 맏형으로 통하며, 아동문학가로 활동하고 있기도 한 안도씨(호남제일고교사)도 여기 출신이다.

 

학계에서는 이재하(78년졸, 경성대 중문과)·김병기(79년졸·전북대 중문과)·박상령(82년졸·호남대 중국어과)·류제윤교수(83년졸·전주대) 등이 활동하고 있다. 서예대전 입상작가이기도 한 김병기교수는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국내 서예평론 분야를 개척하는 분으로 명성을 다지고 있다.

 

모교 출신 첫 교수가 된 류제윤교수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느끼며 한문교육에 회의감을 갖는 학생들에게 선현들의 선비정신과 물질만능으로 흐르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인 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음을 붙들어주는 교수 겸 선배 역할을 하고 있다.

 

서예쪽에 이름을 빛낸 동문들도 있다. 제2회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한글 「우암선생편지글」로 대상을 차지한 이은혁씨(90년졸, 전주대 출강)를 비롯, 7∼8명의 동문들이 국전 초대작가로 활동중이다. 김홍광·윤점용·최낙희·임종현·한덕수·김용정씨 등이 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언론과 문화 분야에 진출한 동문들도 있다. 김세곤(전주일보 문화교육부장)·이상덕씨(전북제일신문 문화팀징)이 여기 출신이며, 문화부기자(전북도민일보)를 거쳐 진북동 문화의집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종근씨도 이대학을 졸업했다. 진안 증평굿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이승철씨는 작고한 인간문화재 김봉열씨의 뒤를 이어 전라좌도 농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연세한의원장인 박영근씨(85년졸)와 교회목사인 류인호씨(86년졸)는 색다른 분야에서 활약하는 동문이다.1회 출신으로 전주에서 튼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진태주씨(태농유지 대표)는 자수성가한 대표적 동문으로 꼽히고 있다.

 


동문들 뜻모아 '옛날식 서당' 세운다

 

전주대 한문교육학과 출신들이 ‘큰 일’ 하나를 준비하고 있다. 대학교수들과 연계해 오래전부터 계획한 옛날식 서당 건립에 뜻을 모아 잘하면 올 하반기에 그 결실을 볼 수 있게 됐다.

 

학과내 자생 동아리인 ‘호남학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박완식교수와 연구회출신 동문들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오종일교수가 창립해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 호남학연구회는 전주대 한문교육과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외부적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는 많은 연구물을 냈다.

 

서울 등 전국 각지 교사로 활동하는 호남학연구회 출신 졸업생(대표 김상곤)들이 한문공부를 위해 타지역을 떠돌며 공부를 했던 지난 시절의 어려움을 더이상 후배들이 겪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한 끝에 서당 건립을 오래전부터 모색했다.

 

박완식 교수가 사재를 털고 호남학연구회 출신 졸업생들이 후원금을 마련, 이같은 숙원이 풀리게 됐다. 전주시 송천동 일대 부지도 마련해 올 하반기 착공에 들어간다는 구체적 계획도 수립됐다.

 

도심속 또하나의 명물이 될 이연구회가 추진중인 서당은 대학 후배들은 물론, 한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한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될 예정이다.

 

김상곤 졸업생 대표는 “서당을 기초한 주춧돌 하나 하나에 대학 후배와 한문공부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터전이 이 고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며, “넓게는 예(禮)와 예(藝)를 상징하고 존중하는 우리 고장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나의 대학시절79년卒 김병기 전북대교수
                                                        
어느 날 저녁 밥상을 치울 무렵부터 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난 어머니는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온 누나를 까닭도 묻지 않고 몽땅 때렸다. 얼마 후, 창호지 문에 흐르는 연한 달빛 속에서 어머니는 누나를 감싸며 묻는다.

 

"대체 어디에 갔었니?" 한동안 말이 없던 누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도 동생처럼 학교엘 가고 싶어서 몰래 동생 가방을 매고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을 실컷 걷다가 왔단 말야. 엄마... 나도 학교에 보내 줘."

 

누나가 울었다. 엉엉 울었다. 아랫목에서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어 가슴을 녹이는 듯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실화이다.

 

그랬었다. 그땐 정말 그랬었다. 5∼60년 대, 아니 70년 대 초까지도 우리는 왜 그렇게 가난했었는지. 배우고 싶어도 배울 때를 놓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닌다고 하여도 자기의 능력과 꿈과 이상과는 관계없이 학비가 싼 학교를 시름으로 다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전주대학'은 그런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대학이었다. 주경야독을 하는 학생들이 모여들던 대학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학생이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10에 2∼3명은 피눈물을 흘리며 만학의 향학열을 불태우던 학생들이었다.

 

특히 우리 한문과에는 그런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밤늦은 시간, 피곤한 교수님들을 붙잡고서 질문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통학버스를 놓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때로는 내일을 잊은 채 밤늦도록 추운 강의실에서 토론을 계속하다가 통금시간을 넘겨 어려움을 겪었던 일도 있었다.

 

공부를 조금 소홀히 하는 성싶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지 뭐 하러 학교에 나왔느냐'고 호통을 치시던 아아! 그리운 근정 조두현 선생님. 그랬었다. 그땐 정말 그랬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피나게 공부를 하였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당시의 전주대학을 3류대학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공부에 굶주린 우리들에겐 그보다 더 좋은 대학은 없었다. 그리고 한글 전용 시대에 한문은 배워서 뭘 하느냐고 이죽거렸지만 우리들에겐 한문과보다 더 희망을 주는 학과는 없었다.

 

'人棄我取'라고 했다. '남들이 버릴 때 나는 취(取)한다'는 뜻이다. 그 때 우리는 그랬었다. 남들이 3류대학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대학을 '우리의 희망'이라고 여기며 취했고, 남들이 이제는 버려야 할 글이라고 여기는 '漢文'을 우리는 미래의 길은 漢文에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취하였다. 그땐 정말 그랬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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