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지리산은 푸르기만 했다. 철쭉이 만개했지만 멀리서 볼 때는 녹음에 가리워져 그것 또한 푸르름으로 덧칠해 버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내 키보다 더 커버린 나무에 엶은 분홍으로 만개하여 등산로에 철쭉꽃 터널을 만들어 주었다. 6월 지리산의 철쭉. 감탄 그 자체였다. 우리를 이렇게 흥분시키기 위해 혹독한 겨울은 잘 버텨준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수줍은 듯 피어오른 야생화는 이름을 잘 모를수록 좋고, 작을수록 앙증스럽고, 홀로 있을수록 청초하다. 환장할 만큼 예쁜 지리산의 꽃은 서방각시 다 팽개치고 산에 묻혀 버리게 만든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아침햇살은 깨끗하고 순수함으로 찬란했다.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인 낙조는 황홀했다. 처음 들어보는 산새들의 지저귐이니 그 이름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또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런 6월의 지리산을 나같은 글솜씨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리산을 미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와본 후 미치지 않는다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고단의 ‘노고’와 지리산의 ‘지리’에서 따와 만든 「노고지리」산악회도 그들 중의 하나다. 공교롭게도 회원 중 한두명을 빼고는 모두가 전북이 고향이다. ‘거시기’부터 시작하는 총무의 말투가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준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올해로 19번째 종주를 했으니 지리산을 미치게 좋아한다고 할만도 하지 않은가? 7번쯤 종주에 참가한 필자는 지리산을 종주한 사람은 산악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등산객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새벽 5시 노고단을 출발해 세석산장에서 1박한 후 천왕봉에는 6월 2일 아침 8시에 도착했다. 출발 27시간만이다.
1500여 미터의 봉우리 10여 개와 쓴내 나는 고비를 넘기고 만난 천왕봉(1915m). 정상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비석이 서있다.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며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 민족의 깊은 상처와 숱한 정담까지를 안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한 지리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을 가진 지리산(智異山)은 민족의 영산이다.
6.25전쟁이후 지리산에서 펼쳐진 좌우익의 남북간 대결은 우리민족의 뼈아픈 시련과 격동의 현장이 되었다. 그래서 6월에 만나는 지리산은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빨치산이 활동하던 곳이 지리산이었기에 우리의 한많은 삶을 그리는 대하소설에도 지리산이 주무대가 된다.
남북간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다루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한 빨치산의 특이한 성격을 조명한 이병주의 「지리산」.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적이어서 민족의 대하드라마이고 대서사시라는 평을 받고 있다. 공산주의자가 된 박태영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현상의 승리사단에 전속되지만, 사령관 이현상은 결국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현상의 최후는 남한에서 빨치산의 최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계사 빨치산 은둔지 안내판에 「괴뢰군」라는 단어가 짖뭉개져 있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지금 6월의 지리산은 우리민족의 눈물과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우리곁에 있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 모두를 포용한다. 그때 그 자리에 피어있던 야생화도 올해처럼 내년에도 피어있을 것이다. 산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지리산에 머문 우리만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지면 된다. 지리산(智異山)의 뜻처럼...
/은희현(전 제주문화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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