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최초로 검사임관을 받은 곳은 경상도의 어느 검찰청이었다.
그곳은 어느 사찰로 사법시험 공부를 하러 가는 길에 잠시 스쳐 간 인연 밖에 없는 곳이었다. ‘지역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르듯이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다’는 말과 같이 그곳 사람들의 기질은 우리 고향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짜고 매운 음식에, 억센 말투, 그리고 무뚝뚝한 성격 그 자체이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사람을 사귐에 일정한 원칙이 있어 보였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어떤 사람인가를 유심히 살피다가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이 서면 서서히 마음을 열어 정을 주고, 대신 한번 준 정은 오래간다. 그런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그 지역 사람 한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식사 정도를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는데, 어느 날 정색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 검사님은 고향이 ‘전라도’라고 알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가서 그런지 그곳 말투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곳에서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굳이 ‘전라도’라고 하지 말고 그냥 ‘서울’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곳 사람들 중에는 법조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 이 검사님의 장래에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웬만큼 믿지 아니하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터인데도, 외지에서 온 이방인(?)에게 마음깊이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참 고마웠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나온 한마디!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제일 큰 은인이시라면, 고향의 냇가와 앞뒤 동산, 그리고 개울가에서 빨가벗고 뛰어놀던 친구들은 저의 두 번째 은인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겠습니까. 고향을 숨기고 출세를 하면 얼마나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하여 출세하더라도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저는 비록 단 하룻동안 검사생활을 하더라도 떳떳하게 고향을 밝히면서 검사생활을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이후로 그 분과는 더욱 다정한 사이가 되어, 필자가 어느 곳에 발령 나더라도 연락이 되었다. 특히 정읍지청장 시절에는 그곳의 유력인사 수십명을 이끌고 와 고향사람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전주지검 차장시절에는 쌀 수십포대를 가지고 와 전주지역 소년소녀가장을 위문하는 등 동서화합의 전도사 노릇을 하고 갔다.
아참, 동서(東西)사랑이 동서(同壻)사랑인줄로 아셨다고요?
- 아니라예, 틀리삐맀다. 예.~
- 아니라구먼요, 틀려뿌렸서요. 잉.~
/이동기(대검찰청 형사부장·전 전주지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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