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섭(교육인적자원부 감사관)
망부석이 되어버린 정읍사의 여인과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열 손가락 마디마디 가락지에 끌어안고 진주 남강 푸른 물에 표표히 몸을 던진 장수의 논개. 나는 인내와 희생으로 상징되는 이 두 여인을 못내 사모하며 그렇게 지아비를 사랑하고 나라를 지켜온 내고향 여인들을 사랑한다.
내고향 여인들은 편견과 굴종의 역사 속에서도 의연한 삶을 살아왔다. 그녀들은 마음으로만 임을 그리워해야 했고, 슬퍼도 그냥 떠나보내야만 했다. 모진 시집살이에도 뒷켠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훔쳤고, 열녀문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밤을 홀로 새워야 했다. 그럼에도 부모와 자식, 지아비와 나라가 위태로워질 때면 그녀들은 기꺼이 소중한 목숨까지 버렸다. 이러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자신을 진정으로 필요로 할 때에는 누구보다도 강인해져 고된 삶을 지켜냈다. 이 모두는 조용히 순응하는 줄로만 알았던 내고향 여인들의 굳센 의지에서 비롯됐다.
내고향 여인들은 예의 바르고 인정 넘치는 아낙네들이었다. 그녀들은 슬기롭고 지혜로웠다. 세상이 그녀들을 낮게 대접할 때에도 마음은 결코 천하지 않았고, 설혹 귀하게 존대했다 해도 그녀들의 마음은 교만하지 않았다. 가난을 숙명처럼 이고 사는 삶 속에서도, 어떤 때는 야속도 했지만, 늘 이웃과 함께 했다. 자녀를 품에 안고 다독여온 가슴은 온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안았다. 다정한 눈길로 사르르 녹이면 미움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오늘의 풍요로운 내 고향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의 손길로 빚어낸 것이리라.
자! 지금 고향의 밖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 남성과 여성, 가정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유별시대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무별시대로 전환되어 나가고 있다. 성의 차이가 아니라 능력과 아이디어 차이가 생존을 가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남성성"을 포기하지 않던 길고 긴 역사가 “여성성”의 힘을 자각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는 이성에서 감성, 문명에서 문화, 강함에서 유연함,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 마디로 남성스러움의 유일성에서 여성스러움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아!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가치가 내 고향 여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희생과 헌신, 포용과 겸손, 생명과 사랑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결국. 내고향 여인들은 끝없이 전개되는 경쟁 속에서 지쳐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고, 자신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어두웠던 시대에 아름답게 스러져간 두 여인을 기리면서, 그녀들의 값진 사랑을 이어받아 끈임 없이 새로운 꿈을 낳고 키워온 내 고향 여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여성성’이 더 이상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을... 내 고향 여인들은 기필코 이 변화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조화로운 인간상”을 정립할 것으로...
/김은섭(교육인적자원부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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