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수(KBS방송문화연구위원)
서울에서 천안까지의 긴 거리가 거대한 건물 군(群)으로 메워졌다. 수도권 영역은 어느 새 천안까지를 잠식한 셈이다. 그 공간에는 아파트와 각종의 생산시설, 물류창고 같은 건조한 모습들이 차지해버려 산과 들의 아늑한 스카이라인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자연보존권역을 정해 난개발이나 인구와 산업 집중을 막고 있지만 그 때문에 공존해야 할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는 찾기 어렵고 사람들의 정서도 많이 황폐해 졌다. 고향에 내려갈 때 마다 차창을 통해 느끼는 단상이다.
우리 고장엔 아직 때타지 않은 자연이 잘 살아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 고유문화가 난 참 자랑스럽다. 우리나라 경제개발 초기의 특정산업의 지역 편중 육성으로 내 고향 삶터는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태여서 소득이 낮고 인구 유출이 많은 편이지만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빈곤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재산이 늘더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했다. 경제력과 삶의 질과는 아주 미미한 상관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계량화 된 수치는 없지만 굳이 행복지수를 따진다면 아마 우리 쪽이 훨씬 높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향 발전을 꾀한다며 ‘낙후’라는 꼬리표를 들춰내고 그럴듯한 구호를 붙여 멀쩡한 자연을 생채기 내면서 경제 제일의 가치만을 강조한다면 그에 따른 환경훼손과 오염, 교통체증, 위화감 조성 같은 폐해로 인해 지금 다른 지역에서 안고 있는 고민처럼 오히려 그게 더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개발과 경제력의 당위성은 공감하지만 조금 부족하고 더디더라도 자연을 안고 가야지 자연을 경시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횡포이자 오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청계천에서 봤듯이 이제 자연을 되살려 내면 큰 박수를 받고 자연 그 자체가 돈을 만들어 주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 거대한 인공시설물이 돋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돋보이는 터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인물도 길러진다고 보면 미래에 대한 집중투자 대상은 이제 자연과 문화 그 자체여야 하고 그것이 결국 값진 자산으로 부각되고 널리 평가받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를테면 천연 그대로의 섬진강 보전이나 전통문화중심도시로의 육성 같은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최근의 정부 통계 하나를 보니 장차 은퇴하면 농촌에 들어 가 살겠다는 대도시 직장인이 조사 응답자의 60%에 달했다. 도시의 사회 경제적 압박 속에 그냥 떠밀려 산다고 푸념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농촌과 같은 자연환경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의미다. TV 농촌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가 냉혹한 시청률 싸움에서 10%대를 유지하며 17년 동안 프라임시간대에 살아 남아있는 것도 필시 그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지며 살가운 이웃과 따뜻한 정 나누면서 살고파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우리 스스로 홀대하여 지금 수도권이나 산업지역에서 겪고 있는 중병을 자초하고 삭막한 터전으로 퇴행시키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고향 쪽을 둘러 본 주변사람들이 너른 들과 깨끗한 산천, 그 안에서 문화를 가꾸어 가는 사람들의 곱고 여유로운 심성을 꼽으며 모처럼의 인상적인 감회와 여운을 나에게 들려줄 때마다 난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 약력: 남원 출생. 원광대와 동국대 대학원 졸업. KBS PD로 ‘6시내고향’, ‘한국의 미’, ‘TV문화기행’, ‘도전 지구탐험대’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편성정책 주간, 방송콘텐츠 주간, 전주방송총국장, 시청자센터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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