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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이웃에게 길이 된다는 것 - 이해인

이해인(수녀·시인)

며칠 전 나는 우리 수녀원에 손님으로 오신 어느 신부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 나갔다. 마침 썰물 때라 더욱 넓어진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저마다 새해의 복을 비는 글들을 적어 놓은게 눈에 띠었다. 누가 시작을 했는지 모르지만 모래 위의 낙서는 아주 길게 이어져 우리를 미소짓게 했다. 하트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사랑해,영원히!’ ‘행복하자. 우리!’하는 연인들의 표현도 아름답고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어놓은 인사말도 새삼 정겹게 여겨졌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 나온 부부, 솜사탕을 사 먹으며 담소하는 젊은이들,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까지 다들 평화로워 보였다.

 

낯선 사람들끼리도 자연스럽게 복을 빌어주며 덕담을 나누는 또 한 번의 새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

 

를 배려해서 행복한 사랑의 길이 되면 좋겠다.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길 위에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어가며 조금씩 사랑을 넓혀가는 길이 되면 좋겠다. 이렇게 살려면 매 순간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하는 마음으로 깨어 사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잘 아는 혁이란 청년이 이웃에게 실천한 애덕의 배려가 따뜻한 감동을 준다. 며칠 전 그가 동대구에서 부산으로 오는 오후 3시30분 무궁화호 열차를 탔는데 바로 옆자리에 어린 두 딸과 동행하는 일본인 남자가 자꾸만 무어라고 하는데, 청년은 일본어를 모르고 영어로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던 터에 그는 일어를 전공한 친구에게 일부러 이동전화를 걸어 대화를 하게 했단다. 그랬더니 그 일본인은 5시30분에 국제여객터미날에서 시모노세끼로 가는 배를 타야하는데 열차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배를 놓칠까봐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역에 내려 택시를 타도 늦을 것만 같아 청년은 부산 지리를 잘 아는 지인에게 긴급문자를 보내 마중을 나오게 했고, 일본인 일행을 5시10분까지 터미널에 데려다 주어 무사히 일본으로 배를 탈 수 있었다 한다. 혹시라도 나쁜 사람으로 오인받을까 싶어 학생증까지 보여 안심을 시키면서 목적지까지 가니 그 일본인은 미안한지 자꾸만 돈을 주려고 하기에 괜찮다고 했고 두 딸과 함께 배에 오르며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 하더라고 했다.

 

내가 고맙다고,잘했다고 이메일을 보냈더니 그 청년은 이렇게 답을 해왔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구 그래

 

도 수녀님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사실 별거 아니긴 한데. 부산역에 기꺼이 마중 나와 주고, 통역을 도와 준 친구 덕분에 좋은 일 하고 일본분도 한국에 대해 마지막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가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단지 옆자리에 앉았다는 인연으로 끝까지 자기 일처럼 적극적인 도움을 준 한 한국인 청년의 행동이 그 일본인은 얼마나 진심으로 고마웠을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교를 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 장면 장면을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길이 된다는 것, 복을 짓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 할 때 귀찮아하며 피하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는 관심, 겉도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정성, 선한 일을 하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이웃에게 무상으로 빛을 주는 축복이 되고 사랑의 길이 되는 행동일 것이다.

 

욕심과 이기심을 아주 조금만 줄여가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평범한 일들

 

과 시간 속에 숨어있는 행복을 잘 꺼내고 펼쳐서 길이 되게 하자. 이 길로 자주 이웃을 초대하자.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 마주치게 될 크고 작은 일들이 잘만 이용하면 모두 다 나에게 필요한 길이 될 것임을 믿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복을 가져오는 ‘사랑의 작은 길’ 이 되리라 다짐하면서 시 한 편 읊어 본다! .

 

‘오늘 하루/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없어서는 아니 될/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사랑의 말들도/다른 이를 통해/내 안에 들어 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오늘도 몇 번이고/고개 끄덕이면서/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 날수록/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 이해인의 시 ‘길 위에서’

 

 

이해인 수녀 인물정보 더보기출생 : 1945년 6월 7일 (강원도 양구)

 

소속 : 성베네딕도수녀원 문서선교실 수녀

 

학력 : 서강대학교대학원 종교학 석사

 

수상 : 1998년 부산여성문학상

 

경력 : 2000년 3월 부산가톨릭대 지산교정 인성교양부 겸임교수

 

1992년 1월 부산성베네딕도수녀회 수녀원 문서선교실 수녀

 

/이해인(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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