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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불안과 의심 없는 세상을 꿈꾸며 - 이해인

이해인(수녀.시인)

서울 쪽에 몇군데 특강이 있어 약 열흘간 자리를 비웠다가 내가 머무는 부산 광안리 수녀원에 오니 그 새 살구꽃은 지고 복숭아꽃 벚꽃 자두꽃 모과꽃 자목련이 활짝 피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심한 황사바람이 우리를 놀라고 힘들게 하였지만 때로는 꽃구름을 만들며 피워오르는 봄꽃나무들이 곁에 있어 웃을 수 있었다. 꽃들이 다 지기 전에 밀린 편지를 써야지 마음 먹고 엊그제는 우선 급한 것부터 몇통 쓰고 해외에 갈 소포도 몇 개 준비 해 당장 우체국에 가려다가 약간의 몸살기가 느껴져 일단 미루고 평소보다 일찍 침방으로 올라왔다. 다음날 오전 사무실에 내려가 컴퓨터 옆 서랍장을 여니 내가 봉투에 넣어 둔 우편발송비 일체와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보관해 둔 도서상품권들 그리고 주교님과 스님으로부터 설날 받은 세뱃 돈봉투까지 몽땅 없어졌다. 내가 15년을 애용하던 소형 올림푸스 카메라까지 들고 가 버린 그 검은 손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얀조가비와 솔방울과 고운 편지지로 가득한 자그만 글방에 겁도 없이 들어와 지갑에 있던 동전과 천원짜리만 그대로 두고 간 그는 생계형 도둑일까, 단지 용돈이 귀해 실례를 범한 젊은이일까...아니면 평소에도 이 방에 곧잘 드나들었던 손님들 중의 한 사람일까. 나름대로 온갖 상상을 하며 우리 수녀님들에게 보고하니 '사람 안 다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고 위로하지만 마음이 내내 착잡하고 우울하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수녀님은 동정심이 많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으니 앞으로도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도 집중적으로 많이 듣는다. 평소에 문을 더 열심히 잠그고 다닐 걸,귀중품은 사무실에 두지 말고 침방에 둘 걸하고 자책 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지인이 인터넷으로 보내 준 ‘오십견의 아픔’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한참 웃은 일도 있는데 하필 지금 왜 그 이야기가 생각 나는지 모르겠다.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 가 집 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해도 안 들어서 다그치니 오십견이라 못 든다고 했다. 마침 강도도 오십견이라 둘이 앉아 오십견 이야기만 하다가 강도질도 못하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서로 연락하여 함께 치료를 받으러 가서 치료비를 강도가 냈다고 한다’ 실화인지 꾸며낸 이야긴지 모르지만 무척 인상 깊고 따뜻한 이야기라며 우린 저마다 한마디씩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낭만적인 유머 조차 멀게만 느껴진다. 교묘하고 완벽한 각본으로 접근해오는 이들에게 내가 지금껏 크고 작게 사기를 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내가 매일 안심하고 일하던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무섭고 불안하여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문소리만 나도 놀라고 평소에 믿던 사람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의심병 또한 봄날의 도둑이 준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죄송합니다. 이래선 안 되는 줄 알지만 꼭 필요해서 잠시 빌려갑니다. 제가 갚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건강하시기를...’이런 쪽지라도 하나 써놓고 가면 좋았을텐데....하고 혼자 웃어본다. 거짓말의 연속으로 나를 힘들게 하였던 어느 청년이 꼭 10년만에 교도소에서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일이 맘에 걸려서 용서를 구하지만 그 때 진 빚을 수녀님께는 갚을 길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으로 갚겠다면서....나는 잠시 감동하여 그렇게 하라고 답을 했던 것 같다.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방에는 책들만 있구나/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피천득님의 사랑스런 시 ‘꽃씨와 도둑’에 나오는 맘씨 고운 도둑을 그려 본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왔다가 아무것도 탐낼 것 없고 가져갈 것 없을만큼 청빈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고요히 다짐해 본다. 꽃도둑 책도둑은 쉽게 용서가 되지만 소임장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간 그 도둑은 쉽게 용서가 안 되는 요즘...가뜩이나 밤에는 불면증으로 고생인데 해외의 친지가 보내 준 라벤더향을 코에 발라도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지고 잠이 안 와 걱정이다. 부활시기에 입을 흰 옷을 다림질하며 기도한다. 부디 우리나라의 경제가 골고루 좋아져서 보통사람들도 나쁜 생각 안 하고 걱정없이 살 수 있기를...밤이나 낮이나 도둑이 들까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도 될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기를...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나눔과 공동선을 향한 노력에 최선을 다해 깨어 있고 투신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해 본다.

 

/이해인(수녀.시인)

 

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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