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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의 발견] (4)전주 최명희문학관·남원 혼불문학관

숨쉬는 문화사랑방 작가의 숨결이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최명희 문학관(위). 남원 사매면의 혼불문학관. ([email protected])

장마가 끝난 지 한참인데도 주야장천 비다. 최명희문학관 1층, 독락재(獨樂齋) 앞에서 여고생 몇 명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종아리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화선지 위에 작가의 육필 원고를 베껴 쓰고 있다. 아니, 새기고 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소설가 최일남이 되거나 시인 안도현이 되어, 그리고 기전여고 교복을 입은 문학소녀 최명희가 되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붓펜을 꾹꾹 눌러 쓰고 있는 아이들의 손길이 곱다. 그 손위에 비 젖은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 흔들던 혼불문학관 해설사의 손이 겹친다.

 

최명희문학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공의 힘을 새기는 빨간 날'이란 이 긴 이름의 프로그램은 전북에서 태어나거나 활동 중인 작가들의 친필원고를 모아서 전시하고 친필서체를 따라 쓰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체험한다는 기획의도가 이 프로그램의 뛰어난 점이지만 진짜 가치는 다른 데에 있다. 작가의 글은 출판이 되는 순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얘기했던 '아우라(Aura)'는 사라진다. 그러나 작가가 친필로 쓴 작품 또는 글씨는 다르다. 모든 문학관에 작가의 친필작품이 있어야 되는 이유는 바로 단 하나의 진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내밀하고 주관적인 미적 체험, 그 아우라 때문이다. 각각의 아우라는 물론 그것이 초고인지 전작인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 아우라가 서려있는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보관한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의 진짜 가치다. 이 친필작품들을 스캔해서 웹에 저장해놓으면 새로운 의미의 문학작품 디지털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하나의 소스를 가지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장점이다.

 

남원의 혼불문학관에서 진행하는 '전래풍습구술대회'도 역시 다른 의미에서 좋은 프로그램이다. 어르신들의 입을 통하여 혼례, 상례, 농경문화와 같은 전통풍습을 듣는 경연대회이다. 작품 속에 당대나 선대의 수많은 생활풍습을 담고자 노력했던 최명희의 문학정신에도 어울리고, 어르신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문화와 역사를 구술을 통해 후손에게 전승한다는 기획취지도 참 좋다. 다만 사전에 원고를 모아서 발표를 하는 형식은 개선해야 될 필요가 있다. 순간성과 일회성이라는 구술의 속성이 이 프로그램을 풍족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진행방식이다. 사전원고는 내용을 요약하는 정도면 된다. 구술된 내용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들려주는 즉흥적 입담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구술을 녹음하고 녹취록을 남겨야 한다. 녹음된 구술은 홈페이지의 콘텐츠로 활용하고 녹취록은 모아서 출판한다면 이것 또한 아카이브다. 또 하나, 굳이 '전래풍습'으로 한정하지 말고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다면 훗날 '구술로 엮는 혼불마을의 역사'가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최명희문학관을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공간이 얼마나 좁은지 느낄 수 있으리라. 다양한 홍보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외벽들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직원들의 고민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공간이 너무 작아서다. 혼불문학관에 갔을 때, 그 넓은 공간을 상근인력 단 네 명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꽁초 하나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는 것이다. 시에서 따로 청소인력 한두 명을 지원한다지만 아마도 그 인력으로는 하루에 반절은 청소로 보낼 것 같다. 사람 부족하기는 최명희문학관도 마찬가지다. 벽면에 있는 행사일정표가 항상 빽빽하게 채워져 있을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사무실 불은 새벽까지 켜져 있기가 일쑤다. 혼불문학관의 주변경관을 보고 그곳에 작가 창작마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글 쓰는 사람들의 동병상련이리라. 굳이 새 건물을 지을 필요도 없다. 소설 혼불의 역사가 곳곳에 살아있는 마을에 빈집을 하나씩 고쳐서 조성하면 된다. 최명희문학관이 좁은 것을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문학관 옆에 무심하게 비어있는 건물들을 작은문화공간으로 조성하면서 공유공간을 확보하면 된다. 그곳에 소극장 하나만 지어도 교동아트센터와 최명희문학관으로 이어지는, 작지만 멋진 종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난 이번 문학관 취재를 하면서 계속 고민했었다. 과연 문학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전시공간일까, 수집공간일까, 기념공간일까, 아니면 체험공간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다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비중만 다를 뿐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는 미술관, 수집은 박물관, 이런 낡은 분류는 공간을 규정하는 관련 법률에만 존재할 뿐 갈수록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미술관도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박물관에서도 음악회가 공연된다. 학문에서 통학제간 연구가 활발해지듯 문화공간도 멀티플렉스가 큰 흐름이다. 머지않아 미술관, 박물관, 문학관이란 이름은 장르적 공간분류란 의미만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문학관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수집과 연구가 아닐까싶다. 해당 작가에 대한 깊이 있고 지속적인 연구는 작가의 가치를 제고할뿐더러 프로그램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 수집된 유품과 친필원고들은 공간에 작가의 혼과 숨결이 담긴 아우라를 줄 것이다. 이미 최명희문학관에서는 연구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오고 있다. 유물과 작품 수집은 유족과 지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성과를 거둘 수 없는 일이리라.

 

그릇은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차를 우려 놓으면 찻잔이요, 간장을 부으면 간장종지가 된다. 작가 최명희는 우리에게 그릇 하나를 남기고 갔다. 그것도 큰 그릇이다. 이제 최명희라는 그릇이 대청마루에 놓일 것인지 부엌찬장으로 들어갈 것인지, 결정하는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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