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2 13:51 (목)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칼럼
일반기사

[금요칼럼] 여행과 인생 - 김탁환

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새해 첫날, <삼국유사> 를 편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게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책이 바로 고전이고, <삼국유사> 는 항상 첫머리에 놓인다. 올해 내 눈길을 끈 대목은 인도까지 다녀온 신라 승려들이다. 아리나,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갔고, 현태를 제외하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신 후 발길을 돌린 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왜 어떤 승려는 죽을 각오로 그 먼 오천축(五天竺)까지 가고 왜 어떤 승려는 토굴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몇 년을 두문불출할까.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읽을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이들을 평생 떠돌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지구촌 가족이니 글로벌 시대니 하는 단어들이 유행해도,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히 준비하고 나선 여행길도 작은 방심이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따뜻한 고향 인심과 내 가족의 밝은 얼굴이 그립다. 당장 돌아갈 마음이 굴뚝같은데도, 여정을 접지 못하는 것은 낯선 길로 뛰어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곳까지 왔는가. 자문자답의 밤이 길어진다.

 

2007년 내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행가 혜초의 발길을 좇느라 분주했다. <왕오천축국전> 을 펴들고 여름에는 2주 동안 인도를 돌았고 가을에는 또 2주 동안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길게 뻗은 실크 로드를 다녔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혜초가 여행을 시작한 중국 광저우와 숨을 거둔 오대산을 살필 예정이다.

 

답사여행을 통해 나는 혜초의 단정하고 깊은 문장에 새삼 감탄했다. 가령 혜초는 이렇게 적는다. “다시 소륵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소륵의 현재 지명인 카슈가르에서 구자국의 현재 지명인 쿠차까지는 기차로 15시간이 넘게 걸린다. 긴 사막 길을 가는 동안 혜초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현재 서점에 진열된 각종 여행기에는 낯선 길의 고통과 신기한 체험, 독특한 풍광을 묘사하는 문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갈라 터진 발바닥과 주린 배를 안고 걷고 또 걸었을 혜초는 단 한 줄의 불평도 없이 담담하게 길의 방향과 기간만 적고 만다.

 

고통을 안으로 삭히는데 익숙한 혜초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은 감추기 어려웠다. 남인도로 가던 길에 혜초는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로 시작하여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라는 시를 지었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네 인생은 흔히 시간을 따라 회고된다. <서른 즈음에> 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처럼, 10년 단위로 나이를 먹는 감회를 잔잔히 읊는 노래도 많다. 우리네 인생은 또한 공간을 따라 그 의미를 탐색할 수도 있다. 맹모삼천지교의 예에서 보듯 어디에 살았고 살고 살 것인가가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 동안 내가 정붙이고 오간 동네를 떠올려보라. 그 꾸불꾸불한 길모퉁이 집에 처음 닿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적어보라.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가 어색하듯 처음 이사 간 집도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나이와 집에 적응하는 과정을 우리는 또한 ‘인생’이라고 불렀다. 시간과 공간을 겹쳐서 삶을 반성하면 더더욱 금상첨화이리라.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때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낯선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계기가 무엇이든, 길 위에 올라선 다음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길 위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가르치며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마시며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은 어떤 낯선 곳을 찾아가시려는가. 그곳은 마을일 수도 있고 분야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곳이 어디든 부디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김탁환 소설가(40)는 경남 진해 출신으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와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총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열하광인’'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나 황진이' 등이 있다.

 

/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