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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 ⑪도시심리학

<하지현·해냄·2009>'폭탄주'와 '커피믹스'의 심리학

폭탄주의 매력은 무엇일까? 한번쯤 마셔본 사람이라면 "빨라서 좋다"는 답을 할 게 틀림없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일까? 폭탄주엔 평등주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 누구는 많이 마시고 누구는 적게 마셔서 나중에 진도 차이가 나는 것을 사람들은 싫어하기 때문에, 모두가 툴툴거리면서도 평등함과 공정함이라는 이름으로 술을 별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탄주 세례를 지켜보며 박수를 친다(27-28쪽).

 

건국대 의대 교수로 정신과 전문의인 하지현의 「도시 심리학: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해냄, 2009)에 나오는 분석이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도시적 삶의 이모저모를 심리학의 틀로 분석하고 있다.

 

커피는 어떤가. 갈수록 늘고 있는 커피전문점들은 커피믹스를 위협하는 적일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둘은 경쟁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대체재이자 보완재 역할을 한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커피 전문점을 통해 자기만의 취향을 즐기려는 동시에 커피믹스의 획일성과 균질성이 주는 안정감, 신속함 및 경제성의 유혹에도 기꺼이 빠져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커피믹스와 커피전문점의 차이는 현대인이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개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불균형과 균형 사이의 진자운동이 드러나는 상징물이 된다. … 한 사람이 정장과 평상복을 적절히 골라서 입듯이 커피라는 음료를 놓고 전투와 휴식모드를 번갈아 취하는 것, 도시인이 갖고자 하는 변화와 균형의 단면이다."(78-80쪽)

 

요즘 와인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와인을 알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자발적으로 투자하지만 꼭 와인 자체의 맛을 즐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 또한 에너지의 동력이 된다. 남과 견주어 자신이 낫다고 여기며 자아존중감을 맘껏 만끽하며, 이러한 경험이 와인을 열심히 모으고 온 힘을 다해 공부하는 원동력이 된다.… 와인 종류를 쭉 흝어보면서 한마디하면 권위가 바로 살아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와인의 세계는, 공부로 성공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쉽게 사회적 관계에서 한몫하기 좋은 경우이다."(122쪽)

 

죽도록 괴로운 일로 자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주장도 상식을 뒤엎는다. 자기애가 매우 강하거나 자존심의 상처만은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행여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타이른다.

 

"삶은 불완전하다. 한 대 맞았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수건을 던지고 항복을 선언할 이유가 없다. 불완전함과 미흡함, 상처가 있음을 받아들일 때 마음은 한 뼘 커질 수 있다. 힘들면 잠시 한 호흡 쉬고 그늘 있는 벤치에 앉자. 지나가는 바람을 잠깐 맞으면서 땀을 식히자. 그리고 이제 다시 맷집 좋게 뚜벅뚜벅 걸어가자."(133쪽)

 

사기를 당하면 두 번 고통을 당한다. 한번은 사기를 당해서 고통을 당하고 또 한번은 "오죽 못 났으면 그런 어이 없는 사기를 당했느냐"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사기 피해자는 과연 어리숙한 사람들일까? 정신분석가들의 연구는 정반대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다. 도리어 자신만만하고 "나는 절대 사기 같은 건 당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기꾼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교육도 많이 받고 합리적 사고방식과 확고한 삶의 철학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더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는 이유는 '나는 이 상황을 충분히 잘 장악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권력에도 쉽사리 의존하지 못한다. 공권력에 신고하여 자존심에 확실히 금이 가고 주변에 알려지느니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범이 잡힌 다음에 그가 밝힌 피해자에게 연락을 해도 '난 그런 사람 모른다'고 잡아떼며 피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긴다."(206쪽)

 

어린 자식을 해외유학시키느라 서로 떨어져 사는 기러기 부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독자들 중에도 기러기 부부들이 많을 것 같아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기러기 부부들 중엔 아이들보다는 사실상 자신을 위해 그런 고통의 길로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즉, "부모의 상대적 박탈감의 투사요, 아이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이런 기러기 부부들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아이는 부모의 희생을 바란 적이 없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식민지적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며 부모에게 독립 투쟁을 선언할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한 부모는 아노미에 빠지기 쉽다. 특히나 기러기 아빠와 같이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던 부모의 경우는 그 충격이 훨씬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진행돼 버린 상태다. (중략) 근거 없는 낙관 속에 희망을 좇아갈 수 있는 이들의 용기는 순교자적 자기희생의 21세기판 모델이 아닐는지."(222-228쪽)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할 일이 생겼을 때 "우리 딸이 감기에 걸렸습니다"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많은 한국인들이 "Our daughter caught a cold."라고 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어느 한국인 남성이 그렇게 말했더니, 그 말을 들은 서양 여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신, 나랑 결혼해서 내가 얘를 낳았나요?"라고 반문하더란다. '나'라고 해야 할 것을 '우리'로 표현한 탓이다. '우리'를 내세우는 심리의 저변엔 무엇이 있을까?

 

"자기확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강력한 집단이 갖는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향유하는 데 거리낌이 적다.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집단논리를 백 퍼센터 자기 것으로 흡수한다. 집단의 논리나 지향점이 분명할 때, 혹은 집단의 소속감이나 응집력이 단단할수록 큰 존재감을 경험한다. 이는 강력한 안전감과 자아팽창으로 이어진다."(233-236쪽)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이야기인데, 크게 보자면 이 책의 대부분이 바로 그런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 따지고보면 폭탄주나 커피믹스도 '우리'의 문화인 셈이다. 자살도 '우리'를 전제로 한 '수치심 문화'와 관련돼 있다. 와인이나 자녀의 조기유학은 '우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차별성이나 경쟁력을 갖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 또한 '우리'를 전제로 한 비교우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로 들끓는 도시는 무서운 저력과 역동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잠재력의 보고인 동시에 획일적인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폭력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나'와 '우리'는 커피전문점과 커피믹스의 관계와 같다. '나'를 추구할수록 '우리'에 대한 갈증도 커지는 법이지만, '우리'는 다시 '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게 바로 도시 심리학의 핵심은 아닐까?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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