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시인)
수학에서는 1 더하기 1이 2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학의 개념에서 조금만 빠져나오면 1 더하기 1이 2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매우 유감스런 사실이지만, 사람들 여러 명이 모여 함께 무슨 일을 할 경우 그 능률은 개개인의 능력을 합친 것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심리학자 링겔만은 일찍이 1920년대에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링겔만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힘껏 줄을 당기라고 하고, 그들의 힘을 압력의 ㎏으로 측정했다. 참가자들의 수는 수시로 변했는데 혼자, 때로는 3인이나 8인이 집단을 이루기도 했다. 상식적으로는 혼자일 때보다 팀의 일부일 때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혼자서 당겼을 때 사람들은 약 63㎏의 평균 압력을 보였으나 3인 집단일 때 전체 압력은 160㎏으로 1인당 53㎏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8인 집단일 때는 더 심해서 전체 압력은 248㎏으로 증가했지만 1인당 압력은 31㎏으로 감소했다. 결국 혼자였을 때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이처럼 혼자일 때보다 집단의 구성원일 때에 더 게을러지는 현상을 '사회적 태만'이라고 한다. 특히 집단상황에서의 사회적 일탈 현상을, 첫 연구자인 링겔만의 이름을 따서 '링겔만 효과'라고도 한다.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크고 작은 일상은 '사회적 태만'에 기대고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학교 조회시간에 교가나 애국가를 부를 때 또는 음악시간에 합창을 할 때 어김없이 목소리가 작아지곤 했기 때문이다.
떡잎이 그랬으니 필자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내가 정의를 외치지 않아도 남들이 해주겠지. 또는 남들도 안하는데 내가 나설 필요가 있는가. 그런 무의식적인 동의를 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무지해서 몰랐고, 알고도 모르는 척 했던 시간의 중심에는 게으름과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내 목소리를 갖기보다는 남의 목소리에 몰래 섞여 살았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제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집단에서 배제되거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모든 목소리가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는 확실하다. 남의 목소리에 숨어사는 부끄러움과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역시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즉 옳고 그름이 아니라, 권력에 기대거나 맞서는 것. 그리고 맞서는 목소리는 어떤 방법을 취하더라도 침묵시켜버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정치적인 부분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솔직히 우리 세대는 너무 오랫동안 입 안 깊숙이 혀를 감춰 두고 살았다. 그 시간동안 우리 세대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딘가에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장 목청 좋은 나이에 참으로 비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비겁함의 대가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깨닫고 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내가 원하지 않는 목소리가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소리를 모은다고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안타깝게도 유효하다. 그러나 완전한 침묵과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르다. 비록 지금은 들리지 않아도 혹은 들어주지 않아도, 분명한 목소리는 언제나 침묵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이현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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