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시인)
근대 정치학의 초석이 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형상은 중세의 도덕률이나 종교관에서 벗어난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악마의 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상을 보면 저자의 의도가 단지 권모술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귀족과 인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즉 공(公)의 군주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군주는 어떨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주, 혹은 리더란 결코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상고시대의 그것처럼 하늘의 선택을 받은 인물도 아니다. 또한 필자가 지금까지의 군주들을 생각해 보건데, 역사에 남겨진 업적이 군주 혼자만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집현전 학자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으며, 이순신이 12척의 함대로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치렀다고 하더라도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결의를 함께한 병사들의 희생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애덤 스미스가 말한 개개인의 이기심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이기심의 덕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모든 업적과 사건, 아주 사소한 사실마저 오로지 한 존재의 힘으로는 생길 수 없으며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존재의 개별적 행위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군주는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하되 가장 낮은 곳에서 이 모든 존재들을 받들어야 하며, 권력이란 오로지 보다 낮은 것들을 책임지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의 지향점을 생각하는 군주는 그 지향점이 모든 존재를 위한 결과가 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일 수밖에 없는 군주는 그것이 모든 존재의 상징임을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제 각기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너무나도 다양한 속성을 지닌 이 모든 존재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이 아닐까. 이 모든 존재들은 결국 인간이라는 공통의 것으로 묶을 수 있고, 자연이라는 대전제에 다시 한 번 묶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모든 결정에 앞서 적어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하나의 결정이 인간의 인권을 말살하고 자연을 유린한다면 결코 그 행위는 군주가 가진 지위와 권력, 목표, 상징 등 그 무엇에도 적합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군주만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일까? 기억하자. 우리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군주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남·녀, 부모, 형제, 직장 관계, 선·후배, 이 모든 관계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상(上)과 하(下)의 위치에 놓여 있으며 나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군주'라는 것을 말이다.
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의를 모두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너와 내가 인간과 인간으로, 자연의 일부로서 같은 존재임을.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당신이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군주라는 것을 말이다.
/이현수(시인)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