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시인)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착한 사람에게서보다 악한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는다.
그렇다. 언제나 한 시대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변화는 일어났다. 어둠을 비로소 어둠이라고 인식했던 사람들이 가장 짙은 어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높이 깃발을 들어 올렸던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의 어둠은 악(惡)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으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할 때 어둠은 가장 좋은 스승이자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어둠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다. 어둠은 이미 하나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 어둠을 깨뜨리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어둠은 농도가 얼마나 될까. 다른 것은 뒤로 제쳐두고라도 청춘의 농도만큼은 암흑에 가깝지 않을까. 어둠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어둠의 양을 훨씬 뛰어넘는 빛이 있어야 하는데, 어둠을 비집고 들어가기에 청춘의 빛은 미약하다. 청춘들의 투표율 수준이라고나 할까.
이미 많은 청춘들은 어둠의 '원리'에 맞서려 하기보다는 순응하고 스스로 어둠의 일부로 돌아섰다. 세상은 원래 어둡다고 인정하며,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어둠의 존재를 알아차렸더라도 뒤돌아서 신세 한탄할 뿐. 이미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에서 너무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물론 이 와중에는 이 '원리'를 지극히 잘 이용하는 청춘들도 있다. 처세술만 늘어 어둠속에 더 큰 어둠을 끌어들여 이리 저리 교묘히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발 빠른 청춘들 말이다.
청춘의 어둠이 얼마만큼 더 짙어질 지 필자는 솔직히 헤아리기 힘들다. 아직도 더 짙어질 여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몇 몇 청춘들의 발칙하고 당돌한 행보가 지치지 않길, 무사히 완주하길 고대한다. 별일 없이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청년들보다 소란스러운 청춘들의 씩씩한 행군이 그저 반갑기 때문이다.
청춘이 한 번쯤 해일같이 일어나 거칠어져도 좋을 시기라면 어디로든 좋으니 제발 좀 튀어 올랐으면 싶다. 시름이 깊어질 만큼 깊어진 청춘의 어둠이, 시대의 어둠이 이만큼 바닥을 쳤으면 그 힘으로 튕겨 올라갈 때도 되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뒤돌아보았을 때 비겁함과 부끄러움을 누를 용기가 있었노라고 힘 있게 말할 삶의 한 구절에 필자도 밑줄을 쫙, 치면서 오늘날 청춘의 미덕을 기록하고 싶다.
언제나 한 시대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변화는 일어났다. 어둠을 비로소 어둠이라고 인식했던 사람들이 가장 짙은 어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높이 깃발을 들어올린다. 이만큼 어둠이 깊어 졌으면 이제는 변화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어둠에게서 배울 것은 어두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현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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