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부터 열렸던 강원도 인제에서의 만해(萬海)축전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는 열정으로 뜨거웠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은 너무도 잘알려진 '님의 침묵'의 주인공이다. 님의 침묵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 님만이 님이 아닙니다. 봄비는 장미화의 님이요 철학은 칸트의 님이며 중생은 부처의 님이다.' 자기 마음속에 기린것은 모두 님이라는 것이다. 한용운의 치열한 삶속에 특히 돋보이는 몇 대목을 소개한다. 그는 기미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민족 33인중의 한사람이면서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한 장본인이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너무 유약하다 하여 마지막 부분인 공약(公約) 3장을 직접 지어 첨부했다. 독립선언서에서 일종의 행동강령이라 할 공약(公約) 3장이 본문보다 백미(白眉)라고도 한다. 그가 쓴 '조선불교 유신론'은 한국 불교 현대화의 효시(嚆矢)라 하겠다. 그의 주장인 불교종단 행정의 단일화는 오늘의 총무원을 낳았고 팔만 대장경의 한글번역은 오늘의 역경원(譯經院)을 탄생케했다.
3.1 독립만세 사건으로 민족 대표, 여려 사람들이 투옥되게 되었을때 그는 재판과정에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말것과 감옥에서 사식(私食)을 받지말것을 주장한바 있다. 변호사의 도움을 거부한것은 자기나라 독립을 주장하다 구속된것은 당연하고도 떳떳한 일이라 남의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 성북동에 어렵게 자택(自宅) 하나를 마련하면서 일본 총독부 건물이 보기싫다 해서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집에서 독립운동으로 옥사(獄死)한 김동삼을 장례해주었다. 그의 집에 찾어오는 친구로는 홍명희,오세창,최린, 이광수,여운형등이었으나 나중에는 친일문제로 이광수 최린은 거절당했다. 그는 오랫동안의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간호원 출신인 유(兪)씨와 결혼을 해서 한영숙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그는 자기딸을 일제 식민지 호적법에 반대하여 호적에 올리지도 않고 그가 직접 선생이 되어 소학(小學)을 딸에게 직접 가르쳤다. 한용운은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의 비석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그가 그렇게 염원했던 조국의 해방 1년전에 입적하였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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