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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공공디자인 시비

승효상 (건축가·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공공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인 지도 꽤나 되어 이제는 아무도 이 단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단어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더욱이 이 단어를 영어로까지 번역하여 'Public Design'이라고 쓰는 것도 봤지만, 그 뜻을 알기 위해 위키피디어를 찾았을 때 '당신이 그 뜻을 만드시오.'라고 나왔으니, 이는 영어에도 없는 단어인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도 공공디자인학과라는 것을 설립하고 이를 연합한 학회도 만들어 학문적 정당성까지 부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참으로 의문스럽다. 도대체 이 단어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공공이 디자인한다는 말인가, 혹은 공공을 디자인한다는 말인가? 급기야, 중앙정부를 비롯해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공공디자인' 사업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으니, 단어 사용의 오류로 인한 잘못된 사업의 피해를 고스란히 시민이 떠안는다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서울을 비롯한 지방도시들이 공공디자인을 한답시고 위원회도 만들면서 하는 일은 대개 도로 환경을 예쁘게 꾸미는 일이다. 도로포장을 바꾸고, 가로등과 버스정류장, 거리간판 등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꾸거나 혹은 예쁜 공공건축물을 세워 시민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증대시키는 게 그 주된 내용이다. 만약 이런 일이 목적이라면, '공공디자인'이란 단어는 '공공시설물 디자인'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단어의 뜻과 사업내용이 일치되고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여기에 있다. 그런 시각적 세련됨으로는, 도시가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인 공공성을 조금도 진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서울의 대학로에 방송통신대학이 있는데, 전체가 보기 싫은 담장으로 둘려 막힌 터라, 지역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는 이 담장의 철거가 참으로 요긴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담장을, 우습지도 않은 그림을 그려서 벽화라고 하며 그 존재가치를 공인하고 말았으니, 이는 '공공디자인'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공공성에 대한 폭행이었다.

 

아마도 애초에 공공디자인을 도입한 까닭이 도시를 보다 풍요로운 환경으로 만들어보기 위함일 게다. 그렇다면, 지엽말단적인 공공시설물 디자인이 아니라 '공공영역'에 대한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농촌사회는 천륜이나 인륜으로 그 공동체를 지속시키겠지만, 익명성을 특징한 도시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 규율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법이 필요하다. 이 규율과 법을 도시 속에서 공간적으로 구체화한 게 바로 도시의 공공영역이다.

 

도로나 광장이나 공원 혹은 비어있는 공간 등, 사유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공공적 영역에서 우리는 글로 된 법조문을 들고 있지 않아도 그 공간의 구성원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소위 선진도시란, 이 공공영역이 고도의 세련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공공영역과 함께 조직되고 연결되어 있는 도시이며, 후진도시로 갈수록 그 연결이 파편적이어서 시민의 공적인 삶이 보장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산책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가 원할 때까지 끊임없이 산책할 수 있는 안전한 보도나 풍부한 녹지의 연결로 그 소박한 일상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문화활동을 즐기고자 하면 아주 쉽게 원하는 문화시설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며, 이웃과 모임을 가지고자 하면 언제든지 그들이 안정되게 모일 수 있는 공공의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선진도시라는 것이다. 이들의 공간적 흐름이 끊겨지지 않도록 구축하고 조정하는 일이 도시디자인이고 소위 공공디자인이어야 한다.

 

벤치나 가로등·택시정류장 등의 색채나 모양 글자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며, 언제든지 옮기거나 제거할 수 있는 이런류의 시설로는, 우리 삶의 지속을 목표로 하는 공공의 안녕과 복지를 결단코 담보할 수 없다. 눈에 어른거리는 부질없는 게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케 하는 내면적 고양이 디자인의 바른 목표인 것이다.

 

/ 승효상 (건축가·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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