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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자취방으로 부터 온 편지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바람이 불었다. 학교 주변 원룸촌에는 인기 없는 하숙집에도 빈방이 없었다. 집주인들은 2학기 끝 무렵이라 남는 방이 없다고 했다. 나는 터벅터벅 학교 후문 쪽으로 걸었다. 조그만 원룸건물이 다닥다닥 벽을 메우고 있는 골목이 보였다. 꾹꾹 번호를 누르고 오십 번도 더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집주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다행히 방 하나가 남았다고 했다. "남학생이 살았던 방이라 쪼꼼 지저분할 수도 있는디-."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101호의 열쇠를 꽂았다. 이때까지 친구들의 많은 자취방을 봐오며 생각한 것은 내가 살 집은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닐 거란 기대였다. 그러나 방문을 여는 순간 내게도 예외는 없었다.

 

신발장 앞에 덩그러니 놓인 냉장고와 가구를 들이면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무방비상태로 나를 맞았다. 그리고 천장에 물 샌 벽지와 담뱃재로 시커먼 변기가 전에 살던 방주인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어느 스님은, 집은 제 생전의 모습과 같다며 늘 깨끗이 치우고서야 외출한다는데 그 말이 이 순간 일물일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방 상태는 심각했다. 아래층에 내려가 주인에게 이것저것 바꿔줄 것을 약속받은 다음에야 도장을 찍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계약서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설렜다. 나는 그렇게 '삼례에 하나 남은 방'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홀로 자취하는 방은 가족이 있는 집과 룸메이트가 있는 기숙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관계의 유무가 아니라 한 세계의 유무다. 칫솔부터 책장까지 오직 내 물건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이 집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 한 세계의 탄생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적 행동과 공적 행동이 경계에 걸쳐 있다. 방에 있으면 자신의 기준대로 모든 행동을 선택하는 사적 행동자가 되지만, 가령 지정된 곳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다달이 세금고지서를 받아들 때는 공적 행동자로 바통을 이어받아야한다. 책임과 의무가 동반돼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해준 만큼만 돌려받는 이 방은 꼭 연애계약서에 도장 찍은 가짜 애인 같다.

 

가구를 옮기고 냉장고에 음식을 채우고 서랍에 옷가지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연애를 막 시작한 사람처럼 방에게 최선을 다했다. 더 해줄 것은 없나 이곳저곳 살펴보면서, 외출했을 때는 나의 부재를 염려하면서. 사계절을 나와 함께 한 방은 추운날씨에 웅크릴 때도 있었고 활짝 핀 5월의 꽃만큼 밝을 때도 있었다. 아마도 이 집을 떠날 땐 좀 더 큰 방을 계약하기 위해서,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더 큰 어른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혹은 더 좁은 방에서 이곳을 그리워할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면서, 밥솥에 쌀을 씻고 불리면서, 방문을 잠그고 나가면서 문득문득 생각한다. 대처에 살다가 읍내까지 학교를 온 것은 바로 이 생활을 위해서가 아닐까하는. 매달 내는 돈이 수도세, 전기세가 아니라 이 시간에 대한 지불이 아닐까하는.

 

어느덧 이 자취방과의 동거도 2년 차가 됐다. 고시원에서 지하방으로, 지하방에서 원룸으로, 원룸에서 전셋집으로, 네모에서 네모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제 보금자리에 안착하려 열심히 산다. 결국 삶은 가장 안락한 네모를 찾기 위한 긴긴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힘들었던 시절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던 첫 방은 누구든 잊지 못할 것이다.

 

/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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