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31년 1598년 임진왜란 중 방화에 의해 미륵전, 광교원 등의 가람과 40여 곳의 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1934년 전후하여 금산사 미륵전의 보수, 대장전 이건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국보 제 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은 금산사에 있는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이다. 1층과 2층은 각각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기둥 사이에는 모두 공간포를 하나씩 두었고,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춘 나무쪽)는 안팎 모두 2개의 출목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고층건물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각 추녀는 높은 기둥에 연결되고 뒷몸을 파서 박은 후 비녀장을 질러 빠져나지 못하게 했고, 가운데 도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동자기둥을 세워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특히 미륵전 한켠에 있는 신중탱화는 국보와 보물 등의 유물은 아니지만 당대 문화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1890년 고종 27년에 화사였던 종준, 정선, 평종, 법인, 선진, 정연 등이 참여해 완성한 작품인 이 신중탱화는 가로 225센티미터, 가로 240센티미터의 크기다. 견본채색으로 구성된 이 신중탱화에 제석과 범천이 있는데, 녹색 두광을 쓰고 보살형태로 각기 연꽃을 들고 있고 일관천자와 월관천자가 제석과 범천 옆에 배치되어 있다.
이와 함께 하단에는 금강저를 짚고 서 있는 위태천이 날개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무복을 입은 모습으로 중앙에 버티고 서 있고, 그 좌우로는 무기를 들고 무복을 입은 신장들이 배치되어 있어 화려함 그 자체다. 그 사이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 천기, 번을 들거나 공양을 드리는 천녀와 동자들로 둘려 싸여 있다.
특히 바라, 곡경비파, 횡적, 비파 등 관, 현, 타악기 등이 화려하게 구성돼 있는 신중탱화는 동시대에 사용되었던 음악상을 반영하고 있어 시각적, 청각적인 형태로 구성돼 있어 화려한 색채미까지 극대화시켜 놓았다.
이 유물은 사찰이라는 불교적 공간에서 무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 공존하고 있어 당대 사찰에서도 극락천도 등을 위해 민속적이고 무속적인 장르와 서로 교감하고 형성 되었던 문화를 유추할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이를 위해 의식을 펼쳤던 모습이 100여년이 넘어서는 오늘날에도 생생한 현실세계로 그려져 있다. 우리 미술과 전통음악의 만남이 세련되면서도 극사실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라 칭할 수 있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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