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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BYC - 1) 한흥산업에서 백양, 그리고 BYC까지

66년동안 속옷 '한 우물'…전북대표 기업 '우뚝'

   
▲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에 위치한 (주)BYC 공장 전경. 도내 대표 향토기업인 BYC는 지난 1979년 12월16일 서울서 전주로 생산라인 전체를 이전, 전주를 발판으로 속옷시장 세계 점유에 본격 나섰다.
 

(주)BYC(회장 한영대)는 지난 1979년 12월16일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에 생산라인 전체를 이전, 전주를 발판으로 속옷시장 세계 점유에 나선 도내 대표 향토기업이다.

 

전주공장의 모태인 BYC는 1946년 창업 이래 66년을 맞고 있으며 속옷 만들기 외에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

 

BYC는 1946년 한흥산업(주)으로 출발, 1960년에 한흥물산(주)으로 상호를 바꿨다.

 

이후 1979년 다시 (주)백양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00년 최종 BYC로 사명을 바꾼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품질제일주의를 원칙으로 한 우물만 파다보니 유보율(기업의 설비확장을 위한 사내유보 정도와 재무구조의 안정성) 3800%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 내의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창립 50년이 넘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은 모두 23개사였다.

 

그중 은행이 5개, 일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10개였고, 한국인이 만든 회사는 8개에 불과했던 점을 비춰볼 때 BYC는 기업 생존수치만으로도 격동의 역사 소용돌이를 헤쳐온 기업으로 손꼽힌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온 BYC는 '백양 메리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양은 한때 우리나라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한 BYC는 우리나라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BYC는 1946년 한영대 회장이 창업한 이래 57년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발전시켜왔으며, 오직 의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이다.

 

내수에서는 내의업계의 선두주자로서 내의업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일찍이 해외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BYC로 세계 7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BYC 창업직후인 1950년대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생활용품은 물론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 회장은 창업당시 보유하고 있던 양말기의 몸통을 키우면 속옷도 짤 수 있겠다고 궁리한 끝에 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기계를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국산1호기 메리야스 편직기로 일일 40벌 정도의 속옷 만들기를 성공했다.

 

우수한 품질과 정직한 기업 이미지로 국내외 속옷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BYC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애국의 길'이라는 한 회장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BYC는 1955년 창경원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 면내의를 출품해 대회장상을 수상함으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BYC는 국내 최초로 아염산 소다에 의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했고, 순백색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白羊)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하여 국산 메리야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백양이라는 상표는 우수한 품질을 장점으로 오랫동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국산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1963년 일본의 미쓰비시는 우리나라 메리야스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비교 분석한 결과 한흥(현재 BYC)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 일본으로의 수출 의사를 타진해왔지만 한 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 회장은 아직 품질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출하였을 경우 나라망신 시킬 것을 우려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한 회장의 면모에 오히려 신뢰감을 가진 미쓰비시는 이듬해 자사의 기술자가 직접 한흥의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면밀히 검사한 후 수출계약을 하자고 제의, 그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전 공정이 우수하고 일본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결과를 들은 한 회장은 대단히 만족하고 그 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 즉시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매년 수출량을 늘려갈 수 있었다.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를 달성하고 1976년에는 무역의 날에는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에는 7300만 달러를 수출해 수출탑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

 

특히 일본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0만달러를 돌파했고 당시의 일본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그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 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을 수입해다 팔고 있다.

 

BYC는 2000년 12월에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앙일보가 공동 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해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2003년한국기업이미지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되고 있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은바 있다.

 

BYC는 현재 가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종합의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세계 70여개 국에 수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BYC는 신세대 감각파들을 위한 고품격 패션내의 스콜피오, 신세대 여성을 위한 화운데이션 란제리 르송, 브라, 슬립, 거들, 나이트웨어 등 다양하고 세련된 내의를 생산하고 있다.

 

또 촉감이 시원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름용 제품인 모시메리,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켜주는 특수 삼중직으로 가볍고 추운겨울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겨울내의 에어메리, 땀냄새를 없애주는 내의 데오니아, 흡수속건내의 에어로쉬도 출시, 판매중이다.

 

잠바, 스웨터, 가디간, 바지 등 편안한 캐쥬얼 웨어인 BYC외의 및 양말, 타올, 지갑, 벨트 등 BYC양품 등도 있다.

 

내의, 외의류 등 온가족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BYC는 21세기 세계 최고의 의류종합회사로의 도약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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