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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산업 ④ 계열사 - 차·선박·건설분야 부품 설비 해외시장서 날개

우신산업의 로고에는 큰 뜻을 이룬다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뜻이 담겨 있다. 풀어보면 6개의 계열사와 함께 우신산업그룹은 법질서를 앞장서 지키고 어떤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하며 소리 없이 뜻을 이루기 위해 정성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다.로고 가운데 파란색 타원은 천체궤도로 하늘색 바탕은 우주를 의미하며 영문은 우신산업의 앞 글자, 금색 6줄은 계열사를 지칭한다. 최연소 나이로 우리나라 일류 기업 임원까지 오른데 이어 기업 CEO로 변모해 지구촌 곳곳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는 '작은 거인'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의 신화는 아직 진행형이다.1987년 3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현대그룹의 이사 자리를 박차고 세상으로 나와 자기만의 회사(지금의 우신산업)를 설립하기에 이렀다. 우신산업은 지난 1987년 직원 12명으로 설립해 당해 연매출 3억원을 기록했고, 25년이 지난 지금 직원 수는 200명, 연매출은 570억원에 이르는 단단한 기업이다. 국 대표는 지금 우신산업과 우신엔지니어링, 우신공업, 우영, 여산재, 여산장학재단을 이끌어 가며 현대, 대우 등 국내 굴지 대기업을 상대로 자동차 연료통 등을 생산해 납품하고 있다.△우신산업= 우신산업은 자동차 부품 전문 생산 회사로 지난 1994년 6월24일 익산 왕궁에 설립됐다.이곳에서는 상용자동차 연료탱크 제작을 주로 범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한다. 우신산업은 연료탱크 자체 디자인(MODELING) 작업을 시작으로 내구성과 신뢰성 시험에 이르기까지 원스톱으로 자체 설계 능력이 가능하다.알루미늄 연료탱크는 2002년 초부터 현재까지 그 어떤 구조적 결함이 발견된 바 없으며 국내법규 및 북미·유럽법규까지 만족시키고 있다.대표적 생산 제품으로는 알루미늄 연료 탱크를 꼽을 수 있다. 알루미늄 연료탱크는 자체 DESIGN ED 작업을 시작으로 내구/신뢰성 시험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이 자체 기술로 소화된다.2002년도 초반부터 알루미늄 탱크 양산 이후 현재까지 구조적설계 결함이 발견된 바 없을 정도로 제품이 표준·규격화 돼 있으며 국내 법규 및 북미, 유럽 법규까지 만족시키고 있다.현재 국내에 판매되는 전 차종에 걸쳐 주문생산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기술 이전 및 제휴를 체결한 바 있다. 또 플라스틱 및 스틸범퍼까지 고객요구에 만족하는 전 차종 맞춤형 상용차 범버도 생산하고 있으며, 중형차와 버스, 트럭에 들어가는 배기파이프도 생산한다.주요 거래처는 현대모비스, 현대자동차, 타타대우상용차, 기아모터스, 경일중공업(주), 두산인프라코어, 두산DST, 타가즈ENG(코리아), 대우버스 등으로 국내에서 정평이 난 기업들을 상대하고 있다. 우신산업은 짧은 설립 역사에도 불구하고, 중국CCC 인증, 특허증, 실용신안등록증 획득 및 연료탱크 부문 국내자동차 3사에 납품 및 대미 수출을 통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또 기술개발 장비를 갖춘 최신 설비, 효율적 공정관리를 통한 6시그마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우신엔지니어링= 우신엔지니어링은 1989년 6월 군산 오식도동에 설립됐다. 이곳에서는 조선용 철의장품, 위생냉난방 배관 기기, 플랜트 설비류 설계 제작 설치공사를 담당하고 있다.선박용 철의장품을 제작해 현대중공업에 납품하고 있으며, 선박 동체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파이프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실적으로는 영종도 국제공항, 월드컵상암경기장과 수원경기장, 부산 컨벤션센터 건축에서 이 파이프가 이용됐다.일본의 경우 7개의 돔구장과 크레인설치에도 사용하고 있으며, 도쿄타워의 재건축에는 타워 전체 길이 612m의 파이프를 사용했다. 그 외에도 상수도관, 다리교각, 육교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파이프를 이용한 모든 구조물에 있어 어디든지 사용이 가능하다.공사실적으로는 현대중공업(주)의 바지선 수리공사, 강남사옥 STAIR 제작 설치공사를 맡았다.또 (주)동부철구 사업소의 고속도로 40호선 충주 제천간 건설공사, 롯데잠실 열병합 시스템 제작, 현대산업개발의 석문유화 공장 설비공사도 진행했다. 이 외에도 포항종합제출(주), 고려산업개발, 대립산업(주) 등 다양한 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우영= 우신산업은 지난 2003년 6월 우영(1994년 11월 설립)을 인수 자회사로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우신산업과 영풍, 명우, 동해금속의 공동 지분 출자로 설립(완주군 봉동읍 용암리 소재)됐다. 이곳은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으로 식당 및 기숙사를 운영하고 교육문화시설 여산재를 운영하고 있다.우영의 사명은 '가장 깨끗한 회사. 언제나 경쟁력 있는 회사.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회사'다.이 외에도 우신공업이 자회사로 있으며, 여산장학재단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이들 우신산업 계열사들은 모두 윤리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경영. 국가와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으로서의 책임과 역할 충실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기술개발과 함께 예술 분야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나아가 인류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기업 이미지상을 확립하고 있다.

  • 기획
  • 이강모
  • 2012.11.01 23:02

③ 국중하 대표의 문학 사랑 - '문학도의 꿈' 수필집과 여산재로 이루다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 그의 이면엔 여린 문학 소년의 모습이 서려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자리를 박차고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점령하겠다는 포부로 우신산업을 설립한 그의 모습엔 강인함이 베여 있지만 오늘의 그가 있기 까지는 서정적 정서가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기업가이면서 수필가인 그의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여산장학재단 설립과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 설립이다.△펜팔로 이루어진 사랑국중하 대표는 1962년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국내 제1의 대기업으로 꼽혔던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회사 공채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뗀다.당시 호남비료 구성원들은 우리나라 초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 대학생의 입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호남비료에서 받던 급여는 당시 마을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면서기의 7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고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고 한다.그런 그에게 가장 즐겨하던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펜팔' 이었다. 손바닥만 한 가요책 뒷면에는 펜팔 명단과 주소가 있었고 그는 수시로 얼굴 모를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그러던 중 한 여대생의 어려운 소식을 접했고, 그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당시 충주대학교에 다니던 불우 여학생이 있었는데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돌아가셨고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그 여학생은 시와 편지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로 국 대표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일체를 지원했다.그 문학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300여통에 이를 정도며, 그 소녀는 국 대표의 이 같은 동정심을 연정으로 착각, 향후 졸업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 구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이후 국 대표는 맞선을 통해 현재의 부인을 만났고 부인과도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당시 그가 썼던 편지 첫 글귀는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 빨간 단풍나무 위에 걸려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간히 스치는 소슬바람이 뺨을 스칠 때 마다 그대의 얼굴이 떠올려져 이렇게 펜을 듭니다"라는 내용으로 지금 그 편지를 보면 낮이 간지러울 정도라고 한다.그후 수십년이 흘렀고 그는 1998년 8월 '수필과 비평'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그는 한국문인 문학상 본상과 전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들녘 바람몰이' 등 6권의 수필집을 문단에 내놓기도 했다. △예술문화 공간 여산재 설립국 대표는 지난 1973년,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 밑에서 27만톤급 배를 만드는 당시에 현대건설(주) 기계과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그 무렵,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에 산업 시찰을 갔는데 50살이 넘은 여자가 영빈각에서 잔잔한 베이직 음악을 틀어주면서 무릎을 꿇고 손님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은 자원과 경제력만 앞서는 강국이 아닌, 문화도 한국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분개와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는 사실에서다.이날의 기억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졌고 2001년 드디어 여산장학재단을 만들고 2003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학동마을 125번지에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를 설립했다. 여산재는 그의 꿈이었다.'여산'이란 호를 지어준 사람은 수완스님(통도사)이며, 여산재는 문화공간이지만 다실, 서재, 외국인과 내국인를 배려한 숙소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음은 물론 공연 및 세미나, 전시실을 겸용한 외부 공간을 갖춘 문화 사랑방이다.여산재에는 다도를 즐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영빈각이 설치돼 있으며, 야외와 실내 공연장이 마련,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가능하다.또 서재에는 수십점의 그림과 글씨 등이 전시돼 있다.국 대표는 그간 연중 무휴(공휴일은 제외)로 여산재를 운영하면서 문화산업 창업 강좌, 관리자 대학생 취업대비 워크샵, 가톨릭문우회 심포지엄, 전주시립국악단 공연, 주부클럽연합 전북지부 세미나, 전북수필문 제58호 출판기념회, 국제 디자인 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전북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국 대표는 "여산재는 30여년간 키워온 나의 꿈으로 지난시절 기업 임원으로 일할 당시 우리의 접대문화에 회의를 느꼈다"며 "그러던 중 문화 예술이 함께 어울어진 여산재를 구상하게 됐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만발하는 꽃에서 향기가 없다면 진실과 가치가 무너지듯이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분과 예술의 한 장르를 일궈 내겠다"며 "동시에 혼신을 바치는 예술가와 함께 호흡하며 아름다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그는 새로운 것들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혼자 보기 아까워 꿰놓은 게 바로 수필이라며 대중 앞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부드러운 글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퇴고를 거듭하며 원고지와 씨름을하고 있다. 이강모기자 kangmo518@● 국중하 대표 프로필△1962. 3 :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1962 - 1967 : 호남비료(주) 나주공장△1967 - 1971 :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1971 - 1972 : 극동건설(주) 기계과장△1972 - 1973 : 현대건설(주) 기계과장△1973 - 1982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1982 - 1983 : 현대정공(주) (상무이사)△1983 - 1985 : 현대건설(주) (상무이사) △1985 - 1987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1987 - 1994 : 우신공업우신엔지니어링(주)(주)우영우신산업(주) 설립 △1998. 8. 29 : 「 수필과 비평 」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 신인상 수상△1999: 한국문인협회 / 국제펜클럽 / 전북문인협회 / 전북수필문학회 회장△한국문인 수석부이사장 / 새천년 문학회 문학상 운영위원장 역임△2001 - 2004 : 우석대학교 반도체 전기 자동차공학부 강사△2001. 6. 20 : 여산(餘山) 장학재단 설립(재단이사장) △2002. 2. - 2008. 12 : 전주문화재단 이사△2003. 12: 여산재(餘山齎)개관△2009. 3: 우신엔지니어링(주) 군산공장 준공, 본사이전△2010. 4 : 어린이재단 전북 지역본부 후원 회장△2010. 10: 한국 엔지니어클럽 전북지부 회장● 저서『수필집』 △내 가슴속엔 영호남 고속도로가 달린다(1998. 8. 15.) △호남에서 만난 아내 영남에서 만든 아이들(2001. 8. 30.)△나의 삶은 도전이며, 시작이다.(중역수필집. 2003. 9. 1.)△나에게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 존재한다.(2004. 9. 5.)△들녘 바람몰이(2007. 10. 1.)△여산재 가는길(2010. 10. 7)

  • 기획
  • 이강모
  • 2012.10.11 23:02

국중하 대표의 기업 철학 - "스스로 운명 개척하고 이익은 사회 환원해야"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전 어렸을 때부터 그 흔한 개똥을 치우는 게 하루 일과였죠."태어나서 지금까지 새벽 4시 기상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우신산업 주식회사 국중하 대표(사진)의 삶은 남달랐다. 그의 '개똥철학'은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새마을운동을 더 빨리 실천한 아버지의 삶에서 시작됐다."어렸을 적 그 엄동설한 속 개똥 치우러 다닌 생각하면 아직도 뼛속 깊이 스미던 그 찬바람이 기억에 생생하다"며 "매일 새벽 4시에 날 깨우던 아버지의 호통 덕에 지금도 4시면 눈이 번쩍 떠진다"는 국 대표.어렸을 적 다른 집에 비해 부유하게 살았던 국 대표의 집은 상주 일꾼 2명이 있었다.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 4시에 깨워 마을에 있는 개똥 수거 작업을 시켰고 당시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 숨은 큰 뜻을 알 수 있게 됐다고 한다.시골 새벽의 풍경은 제일 먼저 각각의 집 굴뚝에서 아침을 준비하느라 태운 장작에서 나온 흰 연기로 국 대표는 창피한 마음에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시간을 피해 개똥을 주웠다.국 대표는 "겨울날 햇빛에 얼었던 개똥이 마르기 시작하면 당시 나막신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를 밟았을 경우 미끄러져 크게 다치는 일이 많았다"며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다칠 경우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개똥을 치우게 하셨던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소년시절 그 새벽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니 지금 나이가 79세가 됐지만 아직도 청춘을 자랑할 만큼 기력이 팽팽하다"며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 '열심히 살자'는 아버지의 생활습관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한마디로 어렸을 적 개똥 줍기는 건강을 챙기고 새마을운동을 실천하는 1석2조의 삶의 광택 이었다는 것.이런 그의 정신은 기업정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마음이 별로 없다. 그들 스스로 자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기업가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정신이 머릿속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이런 그는 현재 '비 현대그룹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우신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 대부분은 현대중공업에 치중돼 납품되고 있어 현대그룹의 경영환경에 따라 우신산업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소지를 피하기 위함이다.국 대표는 "자칫 현대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내 철학은 '현대는 망해도 우신은 산다'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현대와 운명을 같이 할 수 없으며, 스스로 개척된 운명을 살아나가는 게 기업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고향인 전북에서 내 기업의 인생을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국내가 아닌 세계가 날 필요로 하는 그날까지 우리 우신산업은 전속력으로 달려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 기획
  • 이강모
  • 2012.10.04 23:02

우신산업 ② 임직원의 자세- "실패 두려워 말고 미개척분야서 경쟁력 키우자"

"삶은 언제나 시작이며 도전이다." 작지만 강한 탄소 같은 사나이 국중하(79) 우신산업 CEO의 지론이다.당시 39세 최연소 나이로 국내 굴지 현대그룹 이사로 임명됐던 신화를 창조한 국 대표의 마지막 꿈은 대한민국 육해공(자동차·조선·항공)을 통틀어 전북을 전진 산업화 기지로 만드는 것이다.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회사가 바로 우신산업(1987년 3월 설립)으로 기업명 우신과 기업 로고가 상징하는 뜻은 '우주로 펼쳐라'로 현재 자동차와 조선(선박) 부품의 1인자 자리를 굳히고 있으며, 조만간 우주로 비행하기 위한 항공 사업을 구상 중에 있다.현대그룹의 총수 고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는 국 대표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산만을 가로막아 광활한 간척지를 개척한 배짱 좋은 사나이다.그는 널따란 서산 간척지를 선박(폐 선박)을 이용해 방조제를 쌓도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주인공이기도 하다.그런 그가 쌓아온 업적 중에는 고리원자력 발전소와 현재조선소, 26만톤급 대형 유조선 13척, 대한생명 63빌딩 건축 등으로 다양하고 잔뼈가 굵은 경험을 바탕으로 전주에는 자동차부품공장을 울산에는 선박기자재 제조공장, 그리고 지금은 서해안 새만금 조성에 맞춰 조선공사 부품공장을 건설 중이다.회사 설립 당시 직원 30명에서 현재 300명까지 증가한 '작은 거인' 국 대표가 이끄는 우신산업은 '21세기 우신 맨이 가져야 할 자세'를 표본으로 삼고 있다.첫째 '모든 일은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이다. 인간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새로운 상품이 시판되었을 때 극소수에 해당하지만 무조건 구매하는 1종성, 비교검토 한 뒤에 구매하는 2종성, 다른 사람이 50% 이상 구매한 뒤에 구매하는 추종세력 3종성, 극소수지만 절대 구매하지 않는 4종성으로 분류된다.한국과 미국을 비교했을 경우 비교 검토하는 2종성은 미국 85%, 한국 17%로 미국은 실패가 따르지만 이를 활용한다.추종세력의 3종성은 미국 15%, 한국 83%로 농경문화는 타인지향성, 가족끼리의 성향이 강하고 인정이 많다.국 대표는 이를 인용,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미개척분야에 뛰어들어 실패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둘째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이른바 '가물치 이론'이다. 추어탕에 미꾸라지를 수송할 때 어항탱크에 천적인 가물치를 함께 넣는다고 한다. 미꾸라지의 천적을 투입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항에 미꾸라지를 넣으면 대부분 죽거나 기력을 상실하지만 가물치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살기위해 부단히 몸을 놀려 신선도가 유지된다는 것. 셋째 '우리는 서로 믿고 더불어 가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이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게 국 대표의 지론이다. 선진국에서 100년 걸린 산업화를 우리는 30년만에 일궈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지금 우리는 생존욕구에서 존재욕구로 넘어가기 전에 소유욕구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고 있다. 조만간 다가올 존재욕구 시대에 대비, 우리는 취미활동, 문화생활 등 골고루 지식을 쌓아 존재욕구로 변신해야 국제사회에 떳떳이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10.04 23:02

110. 우신산업 1) 국중하 대표 회사 설립까지 - 자립정신 강했던 촌놈, 30대에 대기업 임원 '신화 창조'

시골 촌놈에서 우리나라 일류 기업 임원까지 오른 것도 모자라 국내 굴지 대기업들을 상대로 물류 마케팅을 벌이고 있는 작지만 강한 '탄소 같은 사나이'가 있다. 이 기업은 바로 우신산업 주식회사로 이곳의 CEO는 전북 군산이 고향이지만 그의 젊은 청춘은 타지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곳에서 배운 모든 기술을 한 데 집약해 다시 고향에 회사를 설립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는 아직 자신을 청춘이라 칭하며 '죽을 때까지 일하고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를 신조로 대한민국 육해공을 통틀어 전북을 전진 산업화 기지로 만드는 게 그의 마지막 꿈이라고 한다.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그가 살아온 소설 같은 일대기와 함께 그가 일군 사업체의 미래 전략, 그리고 전북 경제와의 상생을 3차례에 걸쳐 조명해봤다.△ 1시간 걸어서 초등학교 다녀'탄소 같은 사나이' 우신산업 CEO 국중하(79) 대표는 1936년 2월15일 군산시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고평부락에서 태어났다. 고평부락은 지대가 높은 평야지대란 뜻을 의미, 국 대표는 논으로 둘러싸인 작은 부락에서 태어나 일제시대부터 6.25 동란,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까지 모두 겪었다.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 시절 당시 군산 마령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분교인 금암국민학교를 나왔다. 교실은 4칸에 그쳤고 전교생도 80명이었을 정도였으며 그는 집에서 1시간 거리인 학교를 매일같이 걸어서 등교했고 당시 일본군이 말을 타고 전쟁을 벌이던 시절로 억새같이 강한 마초를 뜯어야만 해 온손이 베인 흉터투성이로 얼룩졌다.이후 중학교로 진학해야 했지만 성적이 전체 17등에 그쳤던 그는 중학교 진학에 있어 제1의 걸림돌을 맞았다. 익산 강경 실업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전교 1, 2등만 갈수 있는 곳으로 성적이 안 돼 담임선생님이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몇날 며칠 울며 선생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통사정을 한 결과, "중학교에 떨어져도 원망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추천 승낙을 받았고 결국 강경실업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당시 금암국민학교에서는 모두 9명이 이 학교 시험에 응시했고 이 가운데 국 대표를 포함한 다른 1명만 합격, 그는 일생에 있어 최초의 도전을 이렇게 극복했다.△대학생때 지원 입대 인생 전환점강경실업중학교는 5년제 학교로 고등학교란 개념이 없던 당시 중등고등교육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으며, 그가 중학교 2년(6.25 발발) 때 대한민국 최초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됐다. 그는 이리공고로 진학했으며 고교 2년 여름방학 가출을 통해 그는 일생의 전환점을 맞는다.고교 2년 당시 '엄한 호랑이'로 불렸던 그의 아버지는 딸을 제외한 자식들에게 재산 상속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그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기를 거부했다. 당시 그의 한문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잘못된 상속제 때문에 젊은이들의 자립정신이 희박해지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 재벌들의 경우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만 가르침이 끝나면 가차 없이 홀로서기를 시키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우리는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에 따른 상속거부가 이어진 것이었다.그의 아버지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는 것이 뭘 안다고 상속을 거부하냐"고 호통 쳤고 아버지가 무서운 그는 침묵해야만 했다.바로 여름방학이 다가왔고 그는 '부모님 전상서'란 편지 한 통만 남기고 곧바로 서울행 가출을 시도했다. 한마디로 상속 거부 투쟁을 위한 그의 조그만 항거였다. 같은 마을에 있던 친구 한 명이 일찍이 돈을 벌기 위해 서울의 한 다방에서 주차맨을 하고 있었고 그 친구에게 연락해 같이 살면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리해 방학이 끝날 무렵 그는 시대상의 대표적 생필품이던 부모님의 흰 고무신 두 켤레를 사들고 한 달간의 가출에 종지부를 찍었다.너무도 엄했던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으로 가득했지만 용기를 내 "아버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사님의 가르침대로 내 스스로 당당히 서고 싶었습니다"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고,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 없이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셨다고 한다.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북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고 2학년 재학시절 그는 다시 인생의 제2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남자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그곳 '군대'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대학4년 졸업 때까지 영장이 나오지 않지만 본인 스스로 '지원'을 통해 군대를 가게 된다. 당시 시대 상황은 '군대 가면 죽는다. 영장 나오면 도망가라'는 말이 사실화 될 정도로 군대 기피 증세가 심했지만 그는 우리나라 3대 의무였던 '교육, 납세,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자원입대 했다는 것. 논산 연무대 훈련소를 거쳐, 광주 포병학교,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한 그는 제대 당시 부대로부터 우수군인 표창을 받는다. 군인 대부분 학력이 초등학교에 머물렀던 그 때 그의 학력은 대학생으로 부대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았고 그런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것이다.△ 대기업 스카우트 입사 기술 익혀군 제대 이후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1962년, 졸업과 동시에 국내 제1의 대기업으로 꼽혔던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공채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뗀다. 호남비료 구성원들은 우리나라 초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 대학생의 입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지역 각 동네별로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직업은 면서기였는데 호남비료 회사에서 나오는 급료는 면서기 급료의 7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다. 국 대표는 그 시절 급료를 저축하고도 돈을 쓸데가 없을 만큼 남아돌았다고 회상한다.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사회봉사도 시작, 충주대학교에 다니던 불우 여학생이 있었는데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돌아가셨고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시와 편지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로 국 대표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일체를 지원했다. 그 문학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수백통에 이를 정도며, 그 소녀는 국 대표의 이 같은 동정심을 연정으로 착각, 향후 졸업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 구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이후 집안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중매를 통해 결혼하기에 이렀고 당시 신혼여행은 온양온천으로 갔다가 아버지 산소를 들르는 등 그의 행동은 일반인들과 뭔가는 달랐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호남비료 회사 5년차 재직 당시 그는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들을 총 관리하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공채시험에 응시했고, 당당히 합격해 이곳에서 기계 설비를 담당했다. 국내 첫 동대문 지하철 공사도 그가 맡았고 다시 5년 후 극동건설이 만들던 포항종합제철 공장을 짓지 위한 기술 인재로 스카웃 제의를 받고 회사를 이직했다.극동건설에서 1년간 제강 공장을 만드는 데 주력했던 그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현대그룹에서 실시했던 중간간부 공채 시험에 다시 응시해 현대건설 기계과장으로 들어갔다.5년마다 한 번씩 회사를 옮겨 그 회사의 신기술들을 모두 습득한 '괴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그는 현재중공업 건설의 철골 설계 시공을 맡았고 당시 톤당 18만원 하던 철골의 단가를 10원으로 낮추는 지대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그는 39세 나이로 현대그룹 이사의 직함을 달게 되는 등 그의 신화가 시작됐다. 당초 현대그룹에는 또 다른 최연소 이사가 있었는데 그 이사는 바로 33세 젊은 나이로 이사가 된 현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국 대표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직장 상사로 모시고 있으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뒤에서 든든한 힘이 되었다고 한다.이런 그는 1987년 3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현대그룹의 이사 자리를 박차고 세상으로 나와 자기만의 회사(지금의 우신산업)를 설립하기에 이렀다. 현대, 대우 등 국내 굴지 대기업을 상대로 자동차 연료통 등을 생산해 납품하고 있으며, 지금의 우신산업은 세계 속의 우신산업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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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2.09.20 23:02

⑤ 내의업계 1위 비결 - 끊임없는 연구 개발소비자들 욕구 충족

1946년 전북에 한흥 메리야스를 창업한 이래 50년간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선도해온 BYC는 오직 내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세계 속의 속옷 전문 메이커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초기 소규모 가내 공업 수준이었던 한흥 메리야스를 1957년 양머리 모양의 백양 상표로 등록하면서 KS마크를 획득했고 1979년 2월 백양으로 상표를 변경했다. 당시 백양은 국내 내수산업에 전념했으나 1980년 대 들어 OEM방식을 탈피, 쇄도하는 수출물량 전량을 소화했다.이후 상품의 경쟁력이 있을 때 이익을 조금 남기더라도 고유 상표로 최종 소비자가 백양제품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정으로 오늘날 BYC가 탄생했다.BYC는 원사부터 완제품까지를 자체 보유 생산 시설에서 생산하는 '일괄생산공정' 체계를 갖추고 있어 우수한 품질의 내의를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세계 최고의 편직 원단을 생산한다.무결점에 도전하는 첨단 기술공정으로 BYC는 자체 기술 연구진이 개발해 설치 가동 중인 최첨단 모소, 실켓, 염색, 표백, 수제, 가공, 봉제 기능을 비롯한 모든 기계설비, 염료 등은 컴퓨터와 연계돼 원단을 캠 장비가 캐드의 데이터대로 자동 재단함으로서 생산성을 높였고 장비의 자동화로 인해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변천을 이뤄냈다.또한 철저한 품질관리로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고 내의 업계를 리드하는 디자인 연구소 및 기술 연구소를 일찍이 설립해 고객의 패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독특한 디자인과 컬러를 개발해오고 있으며, 여름철 내의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모시메리, 땀 냄새를 없애주는 내의인 데오니아 등을 개발해 능력을 검증 받았다.중저가 제품의 BYC가 중고가 제품인 스콜피오 등 소비자의 욕구에 편승한 다양한 가격정책의 제품 출시가 가능했고 1989년부터 내의업계 최초로 시행해 온 BYC 전문점 정책이 유통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현재 전국적으로 3000여 개의 판매망을 유지하고 있으며, 30여 백화점, 50여개의 할인점, 연금매장 등의 매장을 확보하고 있다.또한 전국 주요 도시의 상가 20여개의 본사 직영 대형 점포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맞춰 '세계인의 우리상표 BYC'를 슬로건으로 세계 70개 국의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BYC의 성공은 '백양'이라는 상표를 외국 브랜드에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BYC라는 고유 상표를 개발한 점이 컸으며, 합리적 유통관리와 건실한 재무구조 또한 원사부터 완제품까지를 일괄생산 공정하는 체계로 우수한 품질의 내의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모든 과정 뒤에는 '과학과 기술의 접목'이 주효하게 작용, 과감한 투자로 고부가 제품개발을 선도하는 R&D 투자 등으로 국내 최초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국내 내의업계의 패션경향을 주도해 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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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2.09.13 23:02

김광열 전주공장장 "내의는 과학…사양산업 아니죠"

세계인이 입는 옷 BYC의 발전사에는 숨은 1등 공신 김광열 전주공장장(58·BYC 이사·사진)이 있다.BYC 기업의 '심장부'로 불리는 전주공장에서는 BYC 전체 생산 물량의 100%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를 방증하듯 BYC 본사에서는 전주공장을 '심장', 본사를 '머리', 개성공장을 '다리'로 간주한다.김 공장장은 지난 1980년 1월 숭실대학교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2월 BYC에 평 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본사와 각 소재지 공장 등 핵심 보직에서 조직의 싱크탱크로 활동해 왔으며 이런 공을 인정받아 2010년 11월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BYC 이사이자 전주공장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BYC의 심장이라 불리는 전주공장을 별 탈 없이 끌어가고 있다. BYC 내부에서는 이런 그를 '냉철한 두뇌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로 칭하고 있다. 32년 간의 재직 생활을 통해 평사원에서 임원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것.김 전주공장장은 "30년 전 과거에는 사람이 직접 원단을 재고 자르는 수공업 형태로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며 "그러나 이제는 모든 기계가 컴퓨터 데이터화 돼 있어 기계 자체가 스스로 알아서 제품을 생산, 한마디로 '내의는 과학'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매일같이 개성 공장을 입출입하다보니 위험도 느끼지만 이젠 내 집과 같이 지리에 훤할 정도"라며 "부족한 날 믿고 따라준 직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BYC의 핵심 간부로 근무하고 있으며, 날 알아주는 용장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내 가치가 빛난다는 말처럼 한영대 회장님의 아낌없는 지원과 배려가 오늘날 BYC를 만들었다"고 말했다.김 공장장은 또한 "섬유사업이 하향 산업으로 향후 BYC도 힘들어 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우리 생각은 정반대"라며 "지구상에 사람이 살아간다면 이들은 모두 속옷을 입어야만 하기에 내의산업 만큼은 하향 산업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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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3 23:02

BYC' 심장' 전주공장…원단 생산·완제품 배송작업 담당

명실상부 국내 내의업계 1위인 BYC의 심장은 바로 '전주공장'이다.전주공장은 팔복동 공장과 이서 공장 등 2곳으로 분류된다.팔복동 공장에서는 원료의 기본인 실을 이용한 방적에서 편직, 염색·가공·나염까지의 공정이 이뤄지며 여기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개성공장으로 이동돼 최종 재단, 봉재를 통해 완성품이 만들어진다.1980년 당시 팔복동 공장에서는 옷감 재단 등의 폼을 자르려면 사람 사이즈를 재고 원단을 그려서 가위로 조각내는 수공업, 즉 핸드나이프 방식으로 사람이 일일이 재단을 오리고 잘라야만 했다.그러나 1990년 후반 IMF가 밀려오면서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했고 BYC는 모든 제품의 공정을 컴퓨터와 연계시키는 최첨단 CAM 공법으로 바꿨다.이로 인해 과거 제품 불량률이 옷 천벌에 1개꼴이었다면 지금은 만 벌에 1개꼴로 불량률은 제로화에 가까운 쾌거를 이뤄냈다.자동차로 따지자면 과거 수동 스틱 자동차에서 모든 센서가 완비된 오토 자동차로 바뀐 셈이다.반면 당시 1000명 가까이 근무했던 직원이 250여명으로 줄게 됐다.이서공장에서는 방적을 통해 원단을 생산한 뒤 이 모든 제품을 개성공장으로 보낸다.이후 개성공장에서는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이서공장으로 내려 보내고 이서공장 물류사업부에서는 BYC 전체 물량을 국내 및 해외로 수출하는 배송작업을 벌인다.이처럼 BYC에서 생산하는 대부분 제품의 생산과 배송이 전주공장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최종 개성공단에서는 봉제 작업만 이뤄지고 있는 상황으로 명실공히 전주공장은 BYC의 '심장'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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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3 23:02

회사이윤 사회 환원 기업가의 정신 실천

"외길 내의 산업이 나의 업적이라면 나의 숙원은 바로 사학 양성입니다."전북 정주(현 정읍시)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일제시대, 6.25를 모두 격고 내의 산업의 1인자로 우뚝 선 한영대 회장.그는 어릴 적 못 먹고 못살았던 당시를 항상 가슴 한 구석에 묻어 놓은 채 당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대물림 시켜주지 않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있다.한 회장의 철칙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질 좋은 제품을 값싸게 제공해 국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기업의 의무'다.기업의 이윤을 환원시키는 것이야 말로 기업가 정신이자 애국으로 생각하는 한 회장의 신념은 신한중학교와 신한고등학교를 명문 사학으로 바꿔 놓았다.한 회장은 "교육시스템을 혁신해 학생중심교육, 맞춤형 정예교육, 외국어 집중훈련을 비롯한 다문화를 수용할 줄 아는 학생들을 양성하겠다"며 "이들의 지적소양 교육을 통해 창의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실무형전문가는 물론 국제 감각과 의사소통능력을 겸비한 글로벌 인재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학생에게는 내일의 미래와 꿈을 교직원에게는 교육의 보람과 증지를, 학부모에게는 감동과 신뢰를 줘야 한다"며 "베풀고 주는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이 진정한 교육 공동체를 구성될 수 있도록 일조하겠다"고 덧붙였다.한 회장은 고향인 전북에도 명문 사학을 만들 뜻이 있음을 내비췄다.한 회장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고향 전북의 교육 환경이 우수하지만 아직 시골지역의 교육 환경은 어려운 점들이 많다"며 "힘이 닿는다면 내 고향에도 대한민국 제1의 명문사학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속내를 비췄다.그는 또한 "내가 죽는 그날까지, 아니 내 후대에 이어서라도 사학에 대한 기업 사랑 정신을 잇도록 하겠다"며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이 웃는 모습으로 사회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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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2.09.06 23:02

108. BYC 4) 기업 철학으로서 '교육' - 농촌 학교 '명문 사학' 만들어 글로벌 인재 양성

"어릴 적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함이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한을 풀기위해 사학 설립을 꿈꿔왔죠."국내 내의 산업의 대들보이자 선구자인 BYC의 사훈은 '교육과 열정 그리고 사랑과 이해'다.사랑과 이해가 우선시 되는 가족애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 사회적 유익을 위한 노력들의 효과가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특히 21세기 글로벌 비즈니스시대에 맞게 올바른 인맥유지, 즉 형과 아우같이, 오랜 친구같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가족 같은 직원들이 'BYC 맨'을 양성하고 있다.BYC 맨들은 상호간의 친목을 높임으로서 '사회적 가족(social family)'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의 기업철학에는 항상 '사학'이 있다.BYC 한영대 회장은 1985년 3월16일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산 76-12번지 소재 평택동중학교와 평택동고등학교의 학교법인 안세학원을 인수해 학교법인을 한영학원으로 명의변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1984년 말 한 회장은 신뢰할 수 있는 지인으로부터 학교법인 안세학원이 학교 발전을 위해 교육 사업에 뜻이 있는 사업가에게 학교재단을 양도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정명여자상업고등학교 설립을 계기로 기업 이윤을 교육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한 회장은 즉시 이 학교법인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 현실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조사 결과 안세학원은 재단에 어려움이 있을 뿐 재단이 운영하는 중고등학교는 1966년 설립된 학교로 중학생 890명과 고등학생 1400명이 재학 중으로 질적 양적으로 모두 충실한 것으로 판단됐다.이에 한 회장은 이 학교에 본격적 재정 투자를 할 경우 서울 등 대도시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능가하는 지방 명문학교로 육성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특히 한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학생 대부분이 평택군 소재 농촌 청소년들이라는 점이었다.소년기를 가난한 농촌에서 성장한 한 회장은 농촌 사람들과 농촌 청소년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었고 이와 같은 농촌에 대한 향수와 남다른 애정은 청소년들의 교육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바뀌었다.이에 한 회장은 안세학원 재단을 학교법인 한영학원으로 법인변경수속을 마치고 학교명도 신한중학교와 신한고등학교로 개명했다.한 회장은 또 이사장 취임과 동시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재학생과 대학진학 학생에 대한 장학금으로 7억원을 출연하고 학교 시설을 대폭 증설하는 등 모두 49억원의 출자계획을 수립해 집행에 들어갔다.이 출자계획에 의해 한 회장은 대형 강당, 체육관의 신축과 함께 20여개 교실의 증축 및 환경미화로 교육환경을 개선시켰다.또 컴퓨터와 천체망원경, 각종 악기 등 첨단 교육자재를 대량 구입해 교육의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여건을 단시간에 완비하는 쾌거를 이뤄냈다.게다가 학교에 축구부와 밴드부를 창단,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재원을 집행, 학생들의 면학의욕과 애교심을 높이고 학교의 이미지를 일신 시켰다.현재 신한 중고등학교는 중학교 1108명, 고등학교 123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학교규모는 대지 5만4983㎡, 중학교 교실 21실, 고등학교 21실, 과학교구 총 380종 3663점을 갖추고 있다.이는 1985년 재단 인수 당시와 비교할 때 양적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으며, 학생들의 정서순화를 위해 사슴장, 조류장을 설치하고 학교 주면과 학교 내의 수목관리를 통해 학교공원화 추진도 성공시켰다.이와 같이 쾌적하고 내실 있는 교육환경을 갖추는 한편 전인교육을 통한 국가의 역량을 육성하고 명문 사학으로서 대학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교장선생 이하 전체 교사들의 학생 지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이 학교 졸업생의 대학진학 실적은 70%에 이르고 있다.이상과 같이 신한 중고등학교는 한 회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10년 만에 제반 교육시설의 신설 및 확장이 이뤄졌으며, 한 회장은 지금도 지속적인 투자와 교육여건 강화를 통해 국내 상위 명문 고등학교로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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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2.09.06 23:02

107. BYC 3) 세계인의 속옷으로 - 내의 수출 1호 기업…78개국서 품질 우수성 인정

국내 내의 산업의 대들보를 꼽는다면 당연히 해외 수출 선구자인 BYC가 지목된다. 우리나라 내의 수출 1호 기업인데다 국가 경제 부흥에 이바지한 대표적 기업이기 때문이다.한국 내의업계의 선두주자인 BYC의 역사는 한국 내의 산업의 역사와 함께한다. 1946년 한영대 회장이 창업한 이래 57년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발전 시켜왔으며 오로지 의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수출만이 살 길"정부 정책 부응BYC는 국내 내의 업계 선두주자는 물론이거니와 일찍이 해외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BYC로 세계 70여 국가에 우리나라 자체 브랜드인 BYC 의류를 수출하고 있다. 1960대 당시 정부는 국내 기업들에게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수출을 권유했다. 외화 획득을 위해서였고 BYC 한영대 회장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기업가'라고 생각했다.BYC의 첫 수출 상대국은 일본이었다.1963년 일본의 미쓰비시는 우리나라 메리야스 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비교 분석한 결과 한흥(현재 BYC)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미쓰비시는 BYC를 대상으로 일본으로의 수출을 권장하는 의사타진을 해왔다. 그러나 한 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 회장 본인 스스로 자신들이 만든 제품 품질이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출했을 경우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한국 제품이 형편없다는 평을 들을 우려가 컸고 이는 곧 나라망신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전화위복으로 일본 미쓰비시는 이러한 한 회장의 태도에 오히려 신뢰감을 높였고 미쓰비시는 이듬해 다시 자사의 기술자가 직접 한흥의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수거해 면밀 검사를 벌였다.검사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전 공정이 '아주 우수'하고 일본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그 결과를 들은 한 회장은 만족해했고 그 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미쓰비시는 다시 BYC에 수출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고, 한 회장은 즉시 수출계약을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내의 산업의 첫 수출이며, 이후 수출은 일본을 넘어 동남아, 유럽 시장 등을 대상으로 수출량은 매년 증가했다.실제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 1976년에는 무역의 날에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에는 7300만 달러를 수출해 5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특히 일본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0만 달러를 돌파했으며, 그때의 일본 미쓰비시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미쓰비시 바이어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 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1960년 대 중반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나라에서 수출 요구가 쇄도했고 수출국만 78개국에 이렀다. 이게 바로 오늘날 '세계 속의 명품 브랜드 BYC'다.△ 경제 발전 이바지 다양한 수상오랜 세월 우직하게 한우물만 파서 국내외에서 성가를 높이고 있는 BYC는 국내 기업분석 기관들의 조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초우량기업의 전형이다. BYC는 외화 가득률이 높은 섬유 업종 특성 상 창업 이래 세계 각국에 수출,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한 바가 크다.이를 인정하듯 BYC는 2000년12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해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2003년 한국기업 이미지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되고 있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은바 있다. 세계 70여개 국에 수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 받고있는 BYC,신세대 감각파들을 위한 고품격 패션내의 스콜피오, 신세대 여성을 위한 화운데이션 란제리 르송, 브라,슬립,거들,나이트웨어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또 세련된 여성용 화운데이션 란제리 아미에, 모시처럼 까실까실한 촉감이 나고 시원해 남·여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름용 제품인 모시메리,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켜주는 특수 삼중직으로 가볍고 추운겨울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겨울내의 에어메리, 땀냄새를 없애주는 내의 데오니아, 흡수속건내의 에어로쉬를 생산하고 있다. 또한 잠바, 스웨터, 가디간, 바지 등 편안한 캐주얼 웨어인 BYC외의 및 양말, 타올, 지갑, 벨트 등 BYC양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내의, 외의류 등 온가족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BYC는 21세기세계 최고의 의류종합회사로의 도약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30 23:02

BYC 수출 싱크탱크 진홍집 무역부 부장 "어려워진 섬유업, 새 돌파구 찾아 온힘"

"하향 산업으로 분류된 섬유업계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특히 우리 업종은 이윤이 박해 달러 벌기가 힘들죠,"BYC 본사 무역부에 근무하는 수출 싱크탱크 진홍집 부장의 고민이다.인건비가 너무 올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저비용 노동인력이 풍부한 후진국으로 섬유업계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진 부장은 "정부가 수출을 권장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던 저희는 열심히 일했죠"라며 "많을 때는 수출국이 78개국에 이렀지만 이제는 어려워졌고 저희도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과거 찬란했던 BYC 수출 역사 뒤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고난도 있었다. 진 부장은 "우리가 처음 일본에 수출을 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달려들었어요. 한 번은 대농이 일본 수출창구를 대행하겠다면서 많은 하청업자들에게 설비를 갖추게 했다"며 "하지만 처음부터 잘 할 수도 없고 여기저기 하청을 맡기다 보니 품질도 천차만별"이었다는 게 진부장의 설명이다.진 부장은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에 BYC 제품은 품질이 좋았는 데 왜 갑자기 이렇게 엉망이 됐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며 "결국 나쁜 소문으로 우리까지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고 이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이어 진 부장은 "'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를 내걸고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겨 넣은 당시 일은 마케팅의 전설로도 불리고 있다"며 "지금은 '세계 제1의 BYC'라는 21세기 버전과 함께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BYC를 입을 수 있도록 힘차게 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30 23:02

106. BYC 2) 한영대 회장 삶의 궤적 - 포목점 점원서 세계 속 巨商으로

△ 소 한 마리 판돈으로 미싱 조립공장 운영1923년 전북 정주군(현재 정읍) 북면 태곡리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BYC 한영대 회장은 정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지긋지긋했던 가난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살던 당시 그는 정읍 시내 포목점을 하던 백부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이후 아버지로부터 소 한 마리를 유산으로 받은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자전거포와 미싱 조립상점 등을 자영했다.당시 미싱 한 대 값은 쌀 열 가마에 해당될 만큼 비쌌고 그는 한 달에 10~15대의 미싱을 조립, 판매할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그러나 일제 침략시절 일본은 징용 실시와 함께 그의 미싱 부품 공장을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바꿨고, 그는 징용을 피해 농촌지도원으로 귀향했다.△ 양말기 4대 횡편기 2대로 메리야스 공장 시작광복을 맞은 그에게 백부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내수공업 사업을 인수할 것을 제의했다.그는 미싱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과 공장을 바꾸기로 결정, 양말기 4대와 횡편기 2대가 있던 백부의 공장을 인수, 광복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15일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했다.이것이 바로 오늘날 BYC다. 광복 직후는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터라 당시 국내의 내의 생산량은 연간 52만매에 그칠 정도였다.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명에 불과, 속옷 입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할 만하다.이후 양말기의 몸통을 넓히면 내의도 짤 수 있지 않을까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대전에 있는 수동 양말기 제작소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양말기 통을 크게 제작해 달라 부탁했다.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그가 설계한 기계가 완성됐지만 바늘을 구할 수 없어 양말기 바늘을 하나하나 숫돌에 갈아서 끼워야 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이렇게 해서 제작된 메리야스 내의 편직기 가동은 성공적이었고 하루 40벌의 내의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이 내의가 바로 세계 속 BYC 메리야스 생산의 효시다.△ 6.25 발발 전주로 공장 이전 '백양' 상표출원6.25가 터지면서 내장산,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들이 출몰, 사업 여건이 어려워진 그는 전쟁 피해가 거의 없던 전주로 사업장을 옮겼다.그리고 개인회사 한흥 메리야스는 1955년 자본금 4000만환 규모의 한흥실업 주식회사로 바뀌게 됐다.당시 우리나라 메리야스 업체의 94%는 개인회사로 그만큼 한 회장은 시대를 앞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이를 방증하듯 1955년 서울 창경원에서 광복 10주년 행사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서 한흥은 면내의를 출품, 대회장상을 받기도 했다.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한복을 입었고, 도시 학생과 상류층에서만 메리야스 내의를 입을 때였다.이때 한 회장은 국내 최초로 아염산소다를 이용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 순백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 백양이란 상표는 1985년 BYC로 바뀌기 이전까지 30년 동안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며 대표적 국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세계 제일 BYC 탄생의 배경1985년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주)백양의 간부회의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수출상품에 외국 유명업체의 브랜드를 도입해 부착할 것인지, 백양의 독자적 브랜드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설전이었다.당시 수출파트 간부는 "얼굴없는 OEM 방식으로 수출했다가는 외국 유명메이커의 하청공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상표로 떳떳하게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또 다른 간부는 "누가 우리 상표를 부착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냐. 우리 상표는 외국에서 경쟁력이 없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지. 체면이 밥 먹여주냐"며 첨예하게 맞섰다.결국 이 논쟁은 이사회에 회부돼 기립투표까지 벌어지는 박빙의 대결이 벌어졌고 최후의 결정권자 한 회장은 "험난한 어려움이 예견되지만 독자 브랜드를 개발해 백양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이렇게 해서 태어난 상표가 바로 'BYC'다.'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와 함께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긴 상품이 세계 78개국에 8000만 달러의 메리야스를 수출됐고 현재도 26개국에 5600만 달러가 수출되고 있다.오랜 세월 우직하게 메리야스라는 한 우물만 파서 연간 2000여 억원의 매출과 160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성공적 대표기업이 바로 주식회사 BYC.

  • 기획
  • 이강모
  • 2012.08.16 23:02

한 회장이 밝히는 경영 철학 "좋은 상품 만드는데 관심마구잡이 사업 확장 안해"

"1960년대 당시 메리야스 유통시장은 엉망이었고 가짜 매출전표를 만들 수밖에 없었죠."전북 메리야스 업계의 선구자인 한영대 회장은 1952년 전북 메리야스 공업협회 감사로 재직하며 1959년에는 대한 메리야스 공업협회 연합회 이사까지 거쳐 오늘의 자리에 서 있다.1950년대 말 호남지방에는 가내 수공업으로 메리야스, 양말 등을 손으로 짜는 집이 많았다. 특히 쌍방울, 태창 등 큰 메리야스 업체가 전북에서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한 회장은 "규모도 적고 이익도 낮다보니 내의 산업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타지방은 이미 다른 업종으로 대부분 변환해 있었다"며 "처음 우리가 전북에서는 최초로 사업을 시작, 쌍방울이 우리의 물건을 사다 팔았는데 사업이 잘됐고 쌍방울에서 전무로 있던 분이 나가서 태창을 설립했다"고 운을 떼었다."보통 기업의 성장사를 보면 돈이 되는 사업은 마구잡이로 영역을 확장하지만 전 다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더라고요"라며 "품질좋은 제품을 만들겠다고 종업원들과 공장에서 한 식구처럼 뒹굴며 열심히 하다 보니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었던 것"이라며 속옷 외길 경영철학을 설명하는 한 회장.한 회장은 "당시 정부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권장, 나라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기업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업종은 이윤이 박해 달러 벌기가 힘이 든게 사실인데 여기에 인건비까지 올라 경쟁력이 떨어지며 현재는 업계가 후진국으로 많이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한 회장은 이어 "우리 회사는 빚을 안 쓰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고 오히려 예금이자가 매출액의 5~6%를 차지하고 있다"며 "우리는 돈 버는 일은 성격이 안맞고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은행에 넣어놓고 이자를 받는 것뿐으로 그러니깐 주변에서 저보고 사업 할 줄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도 해요"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BYC는 노사분규 없는 회사로도 유명하다."우리는 이익이 박해 다른 업종보다 대우를 잘 해줄 수가 없어 애로가 많지만 내가 직접 나서 종업원과 한 식구처럼 어울려 일하다 보니 차별이 사라진 것"이라며 "종업원들이 대우 못 받는 현실을 이해하다보니 지금까지 큰 일 없이 무사히 지내왔고 버는 수익금으로 직원 복지기금을 마련, 현재 52억원에 달하고 있다"는 게 한 회장의 설명이다.한 회장은 "젊었을 때는 여가 시간에 골프를 많이 쳤는데 지금은 나이를 먹어 힘들어 못하고 있다"며 "요즘은 가까운 산에 오르거나 여기저기 있는 공장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16 23:02

105. BYC - 1) 한흥산업에서 백양, 그리고 BYC까지

(주)BYC(회장 한영대)는 지난 1979년 12월16일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에 생산라인 전체를 이전, 전주를 발판으로 속옷시장 세계 점유에 나선 도내 대표 향토기업이다.전주공장의 모태인 BYC는 1946년 창업 이래 66년을 맞고 있으며 속옷 만들기 외에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BYC는 1946년 한흥산업(주)으로 출발, 1960년에 한흥물산(주)으로 상호를 바꿨다.이후 1979년 다시 (주)백양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00년 최종 BYC로 사명을 바꾼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품질제일주의를 원칙으로 한 우물만 파다보니 유보율(기업의 설비확장을 위한 사내유보 정도와 재무구조의 안정성) 3800%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 내의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창립 50년이 넘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은 모두 23개사였다. 그중 은행이 5개, 일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10개였고, 한국인이 만든 회사는 8개에 불과했던 점을 비춰볼 때 BYC는 기업 생존수치만으로도 격동의 역사 소용돌이를 헤쳐온 기업으로 손꼽힌다.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온 BYC는 '백양 메리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백양은 한때 우리나라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한 BYC는 우리나라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BYC는 1946년 한영대 회장이 창업한 이래 57년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발전시켜왔으며, 오직 의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이다.내수에서는 내의업계의 선두주자로서 내의업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일찍이 해외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BYC로 세계 7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BYC 창업직후인 1950년대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생활용품은 물론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 회장은 창업당시 보유하고 있던 양말기의 몸통을 키우면 속옷도 짤 수 있겠다고 궁리한 끝에 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기계를 완성했다.이것이 바로 국산1호기 메리야스 편직기로 일일 40벌 정도의 속옷 만들기를 성공했다.우수한 품질과 정직한 기업 이미지로 국내외 속옷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BYC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애국의 길'이라는 한 회장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BYC는 1955년 창경원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 면내의를 출품해 대회장상을 수상함으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이후 BYC는 국내 최초로 아염산 소다에 의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했고, 순백색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白羊)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하여 국산 메리야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백양이라는 상표는 우수한 품질을 장점으로 오랫동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국산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1963년 일본의 미쓰비시는 우리나라 메리야스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비교 분석한 결과 한흥(현재 BYC)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 일본으로의 수출 의사를 타진해왔지만 한 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한 회장은 아직 품질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출하였을 경우 나라망신 시킬 것을 우려했다는 것.그러나 이러한 한 회장의 면모에 오히려 신뢰감을 가진 미쓰비시는 이듬해 자사의 기술자가 직접 한흥의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면밀히 검사한 후 수출계약을 하자고 제의, 그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전 공정이 우수하고 일본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결과를 들은 한 회장은 대단히 만족하고 그 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 즉시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매년 수출량을 늘려갈 수 있었다.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를 달성하고 1976년에는 무역의 날에는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에는 7300만 달러를 수출해 수출탑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특히 일본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0만달러를 돌파했고 당시의 일본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그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 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을 수입해다 팔고 있다.BYC는 2000년 12월에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앙일보가 공동 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해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2003년한국기업이미지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되고 있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은바 있다. BYC는 현재 가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종합의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세계 70여개 국에 수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BYC는 신세대 감각파들을 위한 고품격 패션내의 스콜피오, 신세대 여성을 위한 화운데이션 란제리 르송, 브라, 슬립, 거들, 나이트웨어 등 다양하고 세련된 내의를 생산하고 있다.또 촉감이 시원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름용 제품인 모시메리,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켜주는 특수 삼중직으로 가볍고 추운겨울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겨울내의 에어메리, 땀냄새를 없애주는 내의 데오니아, 흡수속건내의 에어로쉬도 출시, 판매중이다.잠바, 스웨터, 가디간, 바지 등 편안한 캐쥬얼 웨어인 BYC외의 및 양말, 타올, 지갑, 벨트 등 BYC양품 등도 있다.내의, 외의류 등 온가족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BYC는 21세기 세계 최고의 의류종합회사로의 도약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09 23:02

⑧ 온라인 포털 imi - 대기업 못지 않은 복지 제도·시설…직원 사기 올려 평생 다니고 싶은 직장으로

회사에 출근해 일상 업무 중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연못이 보이는 카페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시간에는 사내에 마련된 스크린골프와 당구장, 게임방 등에서 아이스크림 내기를 즐기며 퇴근 뒤에는 사내 헬스클럽에서 건강도 챙기고 업무로 쌓인 피로를 풀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것은 드라마 속 장면이 아니라 바로 온라인 포털업체 IMI(대표 이정훈) 직원들의 하루 일상이다.IMI는 직원 휴게실인 '매니아 카페'와 다양한 레저시설이 마련된 '매니아 월드'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대기업에나 존재할 법한 복지제도와 사내에 이색적인 레저시설을 운영하며 전북에서 'FUN'한 기업으로 소문난 IMI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근무하고 하다. 인사총무팀 박형배(35) 대리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 본사 4층에 마련된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박 대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매니아월드'가 생긴 후 회사에서 업무와 건강관리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 좋다"고 만족해 했다.전주 금암동 IMI 본사 4층에는 직원들을 위한 복지시설 '매니아월드'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사설 휘트니스센터 못지 않은 수준의 각종 운동기구는 물론, 요가실과 포켓볼, 당구대, 탁구대, 샤워장 등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Xbox360과 PS3 등 콘솔게임까지 구비돼 있어 근무 중 쉬는 시간을 활용하는 직원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매니아월드 한 켠에 위치한 스크린골프장은 젊은 직장인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골프를 회사 내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어 타 기업과는 차별화 된 복지시설로 직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매니아월드'는 IMI 직원이라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며 업무 중이라도 휴식시간을 이용해 언제든지 운동과 게임을 통해 업무 중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서울 역삼동 IMI서울사무소의 경우도 직원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강남의 유명 휘트니스센터 연간 회원권을 전 직원에게 제공하고 있다. 효율적인 업무환경 개선 역시 사내복지의 일환이다. 이 때문에 이정훈 대표와 임원들은 IMI를 직원들이 '평생 다니고 싶은 회사'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우선 IMI는 전 직원에게 듀얼 모니터를 지급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곳에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의 경우 기능성 의자 지급을 통해 업무를 보는데 있어 만족도를 높여주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장마철을 맞아 '우산대여제도'를 실시, 우산을 미리 챙기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사내 곳곳에 우산을 비치해두고 있다. 또한 직원들의 아침식사와 간식도 회사에서 제공하고 있다. 매일 오전 빵과 우유, 김밥 및 다양한 간식을 준비해 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회사가 직접 꽃과 편지를 준비해 모든 직원들의 부모님께 전달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직원들의 생일은 물론, 결혼기념일, 출산, 부고 등 직원들의 대소사를 세심하게 챙기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IMI는 만 6년 이상 근무자에게 두 달간의 유급휴가를 제공하고 있다. 안식휴가 제도는 IMI의 글로벌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로 해당 근무자는 두 달간의 휴가와 15일간의 해외연수 중 자신의 일정에 맞춰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다. 안식휴가의 해외연수시 발생되는 모든 비용도 회사가 부담한다. IMI는 직원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지원에도 적극적이어서 교육 및 레저, 각종 자격증 등에 필요한 자기개발 비용을 지원하고 있으며 축구, 영화, 등산, 봉사 등 임직원들의 친목도모와 여가활동을 위한 동호회 활동비도 회사가 지원해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이정훈 대표는 "모든 직원이 우리 회사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내에 다양한 복지시설을 만들게 됐다"며 "임직원들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으로 이들이 일하고 싶은 최고의 직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끝〉

  • 기획
  • 강현규
  • 2012.08.02 23:02

기업 블로그 'IMI Brand Story' - 고객과 친밀한 관계 형성·소통 창구

IMI는 고객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 및 소통을 위해 기업 블로그 'IMI Brand Story' (http://blog.item0mania.com·사진)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초 오픈한 'IMI Brand Story'는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이 방문해 다양한 사내 정보와 에피소드를 열람하고 있다. 'IMI Brand Story'는 자사의 핵심 비즈니스인 게임 아이템 거래 및 게임서비스 사업과 관련된 소식과 사회공헌 및 봉사활동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으며, 젊은 IT기업답게 활기차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IMI 임직원들의 소소하고 재미있는 일상 이야기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IMI Brand Story' △커뮤니티 △나눔아이 △매니아운영진 등 카테고리가 쉽게 분류되어 있으며 별도의 로그인 없이도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특히 IMI는 기업블로그의 활성화를 위해 사내 곳곳의 취재를 담당하는 사내단인 '메아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직접 기획하고 취재해 유저들에게 '함께 소통하고, 편안한 친구처럼, 고객에 맞는' 일상 속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메아리단 국장을 맡고 있는 송혜연(26) 주임은 "기업블로그의 역할은 고객과 직원을 잇는 '시소'와 같다"며 "절대로 혼자 탈 수 없는 시소와 같이 고객과 직원이 함께 소통해야 하는 쌍방향 창구로 앞으로 'IMI Brand Story'를 통해 회사 소식과 더불어 훈훈하면서도 재미 있는 일상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강현규
  • 2012.08.02 23:02

IMI 지역 인재 양성 현황 - 직원 300명 중 도내 출신 70%…산학 협력 활성화

IMI는 지역 고용시장의 탄력과 전북지역 청년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 기여 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창업 후 현재까지 본사를 전주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전 직원 300명 가운데 도내 인재 비율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신규 직원 채용 시 매년 지역 인재를 50% 이상씩 고정적으로 채용하고 있어 지역 기업의 모범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에는 전북도로부터 일자리 창출 부문 감사패를 수여 받기도 했다. 또한 지역 IT 산업 및 게임 산업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지난 2009년 9월 전주대와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전주대 학생들은 IMI에서 마케팅, 게임 서비스 기획, 고객 응대 등의 다양한 업무를 실제 경험할 수 있다. 전주대와의 산학협력 계기로 지금까지 인턴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지역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IMI 이정훈 대표는 "지역 인재 채용은 지역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지역과의 동반성장을 기대 할 수 있다"며 "올 상반기 공채 또한 지역 대학의 협조를 통해 양질의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향후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인재들의 채용문을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
  • 강현규
  • 2012.07.19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