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 졸업 뒤 가게서 일 배워 / 광복 뒤 메리야스 공장 설립 운영 / 1985년 'BYC' 브랜드 해외 진출
▲ 1955년 한영대 회장(왼쪽 첫번째)이 메리야스 공장을 전주로 이전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고사를 지낸 뒤 다과를 즐기고 있다. | ||
△ 소 한 마리 판돈으로 미싱 조립공장 운영
1923년 전북 정주군(현재 정읍) 북면 태곡리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BYC 한영대 회장은 정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지긋지긋했던 가난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살던 당시 그는 정읍 시내 포목점을 하던 백부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소 한 마리를 유산으로 받은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자전거포와 미싱 조립상점 등을 자영했다.
당시 미싱 한 대 값은 쌀 열 가마에 해당될 만큼 비쌌고 그는 한 달에 10~15대의 미싱을 조립, 판매할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일제 침략시절 일본은 징용 실시와 함께 그의 미싱 부품 공장을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바꿨고, 그는 징용을 피해 농촌지도원으로 귀향했다.
△ 양말기 4대 횡편기 2대로 메리야스 공장 시작
광복을 맞은 그에게 백부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내수공업 사업을 인수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미싱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과 공장을 바꾸기로 결정, 양말기 4대와 횡편기 2대가 있던 백부의 공장을 인수, 광복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15일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BYC다. 광복 직후는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터라 당시 국내의 내의 생산량은 연간 52만매에 그칠 정도였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명에 불과, 속옷 입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후 양말기의 몸통을 넓히면 내의도 짤 수 있지 않을까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대전에 있는 수동 양말기 제작소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양말기 통을 크게 제작해 달라 부탁했다.
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그가 설계한 기계가 완성됐지만 바늘을 구할 수 없어 양말기 바늘을 하나하나 숫돌에 갈아서 끼워야 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이렇게 해서 제작된 메리야스 내의 편직기 가동은 성공적이었고 하루 40벌의 내의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이 내의가 바로 세계 속 BYC 메리야스 생산의 효시다.
△ 6.25 발발 전주로 공장 이전 '백양' 상표출원
6.25가 터지면서 내장산,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들이 출몰, 사업 여건이 어려워진 그는 전쟁 피해가 거의 없던 전주로 사업장을 옮겼다.
그리고 개인회사 한흥 메리야스는 1955년 자본금 4000만환 규모의 한흥실업 주식회사로 바뀌게 됐다.
당시 우리나라 메리야스 업체의 94%는 개인회사로 그만큼 한 회장은 시대를 앞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방증하듯 1955년 서울 창경원에서 광복 10주년 행사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서 한흥은 면내의를 출품, 대회장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한복을 입었고, 도시 학생과 상류층에서만 메리야스 내의를 입을 때였다.
이때 한 회장은 국내 최초로 아염산소다를 이용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 순백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 백양이란 상표는 1985년 BYC로 바뀌기 이전까지 30년 동안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며 대표적 국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 세계 제일 BYC 탄생의 배경
1985년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주)백양의 간부회의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수출상품에 외국 유명업체의 브랜드를 도입해 부착할 것인지, 백양의 독자적 브랜드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설전이었다.
당시 수출파트 간부는 "얼굴없는 OEM 방식으로 수출했다가는 외국 유명메이커의 하청공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상표로 떳떳하게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간부는 "누가 우리 상표를 부착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냐. 우리 상표는 외국에서 경쟁력이 없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지. 체면이 밥 먹여주냐"며 첨예하게 맞섰다.
결국 이 논쟁은 이사회에 회부돼 기립투표까지 벌어지는 박빙의 대결이 벌어졌고 최후의 결정권자 한 회장은 "험난한 어려움이 예견되지만 독자 브랜드를 개발해 백양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상표가 바로 'BYC'다.
'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와 함께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긴 상품이 세계 78개국에 8000만 달러의 메리야스를 수출됐고 현재도 26개국에 5600만 달러가 수출되고 있다.
오랜 세월 우직하게 메리야스라는 한 우물만 파서 연간 2000여 억원의 매출과 160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성공적 대표기업이 바로 주식회사 B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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