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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전주사랑과 그 자취들

▲ 곽 장 근

 

군산대 교수

흔히 경주와 전주를 소개할 때마다 천년고도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 붙는다. 신라의 경주는 천년 동안 한 왕조의 도읍이었다면, 전주는 천 년 전 후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900년 견훤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뒤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로 선포하고 백제의 계승과 신라의 타도를 선언했다. 936년 고려에 멸망될 때까지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이었다.

 

비록 37년의 짧은 역사였지만 전주 동고산성에 남겨놓은 후백제의 문화유산은 참으로 대단하다. 80년대부터 시작된 학술발굴을 통해 전주 동고산성의 전모가 파악됐다. 이 산성의 중앙부에 자리한 주건물지는 길이 82.4m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을 쌓을 때 대부분 헐린 성벽은 두부처럼 잘 다듬은 성돌만을 가지고 쌓아 최고의 축성기술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견훤은 평상시 평지성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전주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주시 중노송동 전주고 동북쪽 '물왕멀' 부근에 있었던 토성이 후백제의 평지성으로 추정된다. 마치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는 고구려의 도성체제와 상통한다.

 

후백제의 도성인 전주를 지키려는 견훤의 의지도 무척 강했다.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를 동시에 거느린 금남호남정맥에 그 자취가 잘 남아있다. 이 산줄기의 큰 고갯길인 자고개 북쪽에 장수 합미산성이 있는데, 후백제의 위엄이 돋보이는 최고의 산성이다. 마치 두부처럼 정성스럽게 잘 다듬은 성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박혀있다. 이 산성의 동쪽 기슭에 견훤이 잠시 올라 쉬었다는 왕바위가 아주 늠름한 자태로 견훤의 방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금남정맥의 금산 백령성에도 견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일부러 일양현을 설치할 정도로 견훤의 전주사랑은 매우 깊었다. 전주 동고산성과 축성기법이 거의 흡사한 산성들이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삼국시대 최대의 격전지로 유명한 백두대간의 남원 아막성도 여기에 속한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들은 후백제의 도성인 전주를 방어하기 위해 견훤에 의해 개축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한 초기청자 가마터가 진안고원에 있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로 갑발을 사용해 최상급의 순청자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문양이 시문되지 않고 녹갈색을 띠는 초기청자만을 만들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닿았다. 후백제는 월주요의 후원을 기반으로 발전했던 오월과 국제교류가 활발했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벽돌가마로 상징된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가마터에서 해무리굽과 불에 그을린 벽돌이 발견됐기 때문에 월주요의 영향을 받아 후백제 견훤에 의해 처음 개발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 가마터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진안 도통리의 경우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관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다. 동시에 후백제 산성의 분포양상과 그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한 차례의 학술조사도 추진되지 않았다. 아무쪼록 전주를 무척 사랑했던 견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견훤의 전주사랑이 깃든 후백제의 문화유산을 찾고 알리는 지표조사만이라도 조속히 모색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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