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합리적 현실에서 열정만 강요하는 건 착취 정당화하는 것
긍정주의는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신사상 운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사람들은 깊숙한 내면에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면 이런 힘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논리로 이뤄졌다. 초기 신사상 운동은 질병은 마음의 문제라는 견해로 건강문제에 치중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건강보다 성공과 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에 발맞춰 신사상에 내포된 긍정주의는 번영 지향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긍정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개인의 건강문제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좋은 이론이었지만 긍정주의가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오히려 개인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긍정주의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가난, 질병, 실업 등의 고통은 개인에게 원인이 있으며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문제이다. 뭐든 긍정적으로 견뎌내야 한다. 환경을 탓하는 순간 한낱 '찌질이'로 전락하고 만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뭔가를 바꿔보려고 사람들이 모여서 항의하거나 시위를 하면 '빨갱이'라는 낙인까지 덤으로 찍어준다. 이래저래 비관적이면 살기 힘든 세상이다.
청년들에게 긍정주의는 '열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열정은 개인의 자아성취를 위해 생산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열정이 어느 순간부터 착취의 언어로 쓰이는 듯하다. 청년들에게 열정을 다하라는 말은 실상 비합리적인 착취구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업가들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줄 테니 와서 열정을 불태우라며 청년들을 유혹한다. 그들이 주는 임금에는 다른데서 못하는 경험이 포함됐으니 액수가 적거나 없더라도 이해해야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해야 한다. 어른들은 네가 아직 사회를 모른다고 하니까, 주위에선 이것도 그냥 좋은 경험한 셈 치라고들 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한다.
백번양보해서 대학생, 청년들이 알바, 인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보상조차 못 받으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열정 때문이라고 인정해보자. 그렇다면 기업가와 정규직들은 열정이 없는 사람들일까? 그들은 열정이 없어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는 것일까? 그들은 단지 열정이라는 허울 좋은 표현으로 착취를 정당화할 뿐이다.
강요된 열정은 열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열정 없이 살자는 것은 아니다. 긍정과 열정이라는 좋은 말이 대안 없는 무비판적 긍정주의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열정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환상이 청년들을 기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자. 잘못된 현실은 분명히 지적하고 저항해야한다. 아프다고 소리칠 수 있으니까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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