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찾아 바를 겨를도 없이 겨우 늦지 않게 출근했다. 꽤 붉은 기운이 넓어지면서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물집은 잡히지 않았는데 몹시 쓰렸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거니 생각하며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아픔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닌 성싶었다. 부딪치거나 긁혀 난 상처가 아니라 작지만 화상이 아닌가. 회사 근처 약국을 찾았다. 연고와 붕대를 사서 바르고 친친 감아야지.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약국 안은 한산했다. 판매대 뒤에서 연세가 좀 지긋한 남자분과 부인인 듯한 여인과 젊은 아낙이 마주앉아 있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고 차 한 잔 마시는 분위기였다.
덴 팔을 보여 주니 약사는 냉동실에서 얼음 봉지를 꺼내 주었다. 화상을 입었을 때는 즉시 얼음으로 찜질을 해야 물집이 생기지 않고 빨리 낫는다면서. 얼음을 받아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멈칫거리는 나를, 밝은 웃음으로 배웅했다. 멋쩍게 약국을 나왔다. 아침 볕이 유난히 포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시학원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공무원이나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주로 다녔다. 학원에서는 수시로 단과반을 개설하고 그럴 듯한 명칭을 붙여 특강을 마련했다. 같은 과목인데 강사별로 몇 개씩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새로 개설한 강좌에 수강신청을 권장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얼음 한 봉지의 처방을 내린 약사처럼 쉬운 공부법을 가르쳐주거나 더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인가. 학원장의 속사정이 이해는 갔지만 난 도저히 적응이 안 되었다. 학원의 방침대로 학생들을 설득 권유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 길로 뛰쳐나와서 다른 일을 찾았다.
책상 위에 수건을 깔고 얼음 봉지를 놓았다. 그 위에 덴 팔을 얹고 일을 시작했다. 얼음이 덴 부위를 달래는 동안 왠지 모를 뿌듯함이 전신으로 퍼졌다. 누구에게라도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저기 주유소 사거리 새로 생긴 약국 아세요?"
웬 얼음이냐고 묻는 직원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아, 거기 약국 참 친절해요."
메아리 같은 대답을 들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봉지 얼음이 완전히 녹을 때까지 팔에 찜질을 했다. 약사의 맑은 마음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화끈거리던 통증이 잦아들었다.
그 후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부탁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 약국 아저씨의 맑은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어느새 덴 부위는 붉은색이 사라지고 갈색의 가느다란 사선만 남았다. 머지않아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날의 감동은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시인이자 수필가인 박갑순씨는 1987년 '자유문학'(시), 2004년 '수필과비평'(수필)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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