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전주역. 원래는 ‘유로 스프린터(오이로 슈프린터)’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달리도록 설계됐다는 전기기관차가 무궁화호 객차를 끌고 와 멈춰 섰다. 전라선 전철화 전에 그 시끄럽던 ‘특대형’ 디젤기관차가 끄는 것만 보다가 전기기관차가 끄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2호차 38번 좌석에 앉았다. 가만히 취재 동선을 점검하고 있는데, 옆자리 승객이 무화과를 하나 내민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지만, 옆자리 승객은 태연했다.
“하나 드셔요, ‘학생’. 씻어 왔으니까 아랫부분만 떼고 먹으면 돼요.”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하나 받아 들었다. 맛있었다.
그는 또 한 개를 내민다. 이번에도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역시 맛있었다.
이번엔 그가 옥수수를 한 개 내민다. 역시 사양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받았다.
“먹을 건 나눠 먹어야지.”
여전히 어색한 ‘장항선’ 군산역
한때 군산역이 군산선 철도의 종점이던 시절이 있었다. 2007년까지였는데, 그때만 해도 군산이라는 지명은 당당하게 한 철도 노선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그게 군산선 철도가 장항선과 연결 개통되고 군산역이 내흥동으로 옮겨가면서 군산역은 더는 종점이 아니게 됐고, 군산선도 더는 ‘군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 그러니까 이제 군산역은 ‘장항선 군산역’인 것인데,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열차는 대야역에 잠시 멈춘 뒤, 북쪽으로 꺾어 내달렸다. 왼쪽으로는 옛 군산선 철로가 갈라지고, 새 철로는 콘크리트로 된 다리를 타고 번영로를 건너 뻗어 있었다. 이어 별로 더 뭘 보기도 생각하기도 할 새 없이, 그대로 군산역 구내로 접어들었다.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역사 내 관광안내소에서 안내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펼쳐놓은 지도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보건대 근대역사문화지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2008년 1월 문을 연 군산역도 벌써 영업 8년 차다.
개통 초기에는 옛 군산역(폐역 직전의 이름으로는 ‘군산화물역’)과 비교를 많이 당했다.
2007년 군산역 승하차 인원이 42만7800명(2007년도 철도통계연보)이었는데, 신역 개장 첫해인 2008년에는 10만 명이나 줄어든 32만1634명(코레일 전북본부 통계)이었다.
아무래도 새 역이 자리한 곳이 군산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기존 승객 수송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통근열차가 사라지고 그보다 운임이 비싼 무궁화호나 더 비싼 새마을호가 들어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시내버스 노선을 집중 배치하는 등의 노력으로 이용객 수는 꾸준히 늘어 2014년에는 40만5092명으로 40만 고지를 회복했고, 지난해에는 43만7266명으로 마침내 옛 군산역의 실적을 넘어섰으니 이제는 되었다. 올해는 7월 31일까지 총 26만184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8월 30일도, 아무래도 평일이라 ‘붐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통유리로 된 건물은 2000년대 철도 역사 건축 트렌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군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투영하려는 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옛 콘크리트 건물보다야 예쁘긴 하지만,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역사 내에 군산과 내흥동 지역의 유적·유물을 보여주는 내흥동 유적전시관(2층)이 마련돼 있어, 그나마 체면치레는 되겠다.
아담한 크기의 유적전시관 내부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꾸며져 있다.
내흥동 유적지에서 확인된 ‘원형수혈유구’(신석기 시대 집터)를 재현한 것이 전시관의 중앙에 있고, 주위를 둘러 그릇 조각과 같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열차를 기다리며 간단히 둘러볼 만한데, 다만 내부 조명이 너무 어두워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비단결 금강과 구불길
역사 밖으로 나서면 정면에는 공사장 가림막이 서 있다.
왼쪽에는 시내버스 승강장과 택시 승강장이 있다. ‘구불길’로 걸어가려면 오른쪽으로 나가야 한다.
군산역은 제1코스인 ‘비단강길’과 제4코스인 ‘구슬뫼길’, 그리고 제6코스인 ‘달밝음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렇게 되면 고민할 거리가 많이 줄어든다. 열차에서 내려서 무작정 걸어도 그게 훌륭한 여행 코스라 하니 말이다.
군산역이나 그 인근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군산 시내 곳곳에 자전거 정류장을 만들어놓고 빌려 타고 반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약 500m 걸어나가면 곧바로 금강이 눈에 들어온다. 딱히 둔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그대로 넘실대는 금강 물이 눈앞에 들어오는 구조다.
금강은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쓴다. 문자 그대로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굽이치는 물줄기가 잔잔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금강은 이름이 여러 개인데, 전라북도 쪽, 그러니까 대체로 하류 지점에서 부르는 이름은 ‘금강’이지만 충청남도 쪽, 그러니까 중류 지점에서는 ‘백마강’으로 부르곤 한다. 또 상류로 더 올라가면 충남 금산 즈음에서는 ‘적벽강’이라고도 한다.
금강은 또 오래전에는 ‘백강’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제 충신 성충이 당나라 군사가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던 그 ‘백강’이다.
한편으로는 ‘탁류’로 유명한 강이 또 금강이기도 하다. 어느 강이나 하류에 이르면 물이 탁해지기 마련이지만, 유독 금강이 ‘탁류’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백릉 채만식의 공이 클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은 이날도 열심히 흐르고 있었다.
하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것은 강물인데,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닷물처럼 크게 요동쳤다. 물결이 부서지며 구불길 위 기자에게도 몇 방울씩 튀었다.
기상청 관측값을 보면 이날 풍속이 ‘흔들바람’ 수준인 9m/s였다고 하는데, 금강 변 구불길에서 맞은 바람은 적어도 ‘된바람’ 수준은 아니었나 싶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역시 갈매기가 많았는데, 바람이 세차니 얘들이 즐겁고 신나는지, 좀 활동적인 녀석들은 기자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곡예비행을 한다. 어떤 새들은 수면에 둥둥 뜬 채로 밀려오는 물결을 타고 있었다. 꼭 리듬 타는 힙합 음악가 같다.
바람이 세찬 탓에 구름도 빨리빨리 날아가, 수면은 양지와 음지가 매 순간 바뀌면서 마치 얼룩이 진 듯 보였는데, 구름 사이로 내려와 강물의 거친 표면에 반사된 빛이 신비로웠다.
금강하굿둑 방향, 그러니까 상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곧바로 시가 적힌 비석 여럿이 모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진포 시비공원’이었다.
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등 친숙한 이름과 시를 볼 수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휴게 공간이 잘 꾸며져 있다면 머물며 사색하다 갈 만할 텐데, 기자의 눈에 보인 것은 잡초가 무성한 바닥과 그냥 서 있을 뿐인 시비뿐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진포 시비공원에서 상류 방향으로 1㎞쯤 걸어가면 리틀야구단이 사용한다는 푯말이 붙어 있는 작은 야구장이 나오고, 이어 진포대첩 기념탑이 나온다. 진포대첩은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한 싸움인데, 이 ‘진포’라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
이 오른쪽에는 채만식 문학관이 놓여 있다.
군산 출신 문인 백릉 채만식 선생의 유품과 작품세계, 그리고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군산지역 모습을 보여주는 곳인데, 금강물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어 사전에 지도를 잘 살펴야 한다.
공원을 지나면 이제 금강하굿둑이 나온다. 바람에 밀린 강물이 하굿둑의 철제 갑문에 부딪히며 기이한 소리를 낸다. 만약 어두울 때 들었다면 ‘무섭다’고 했겠다.
한쪽에는 ‘어도’와 ‘생태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물론 ‘인도’도 있다. 하굿둑의 아래를 통과하는 인도는 자동차도 교행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꽤 널찍한 규모인데, 한강 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다리’와 비슷한 느낌이다.
통로를 나오면 ‘금강호 휴게소’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철새 조망대가 나온다. 겨울철 철새가 무리 지어 찾아올 때면 전국에서 애호가,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취재팀은 휴게소에서 돌아 하류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구암동·경암동에 멈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
<계속>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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