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옇게 흐린 공기의 저편, 서쪽 대야 방향에서 붉은 기관차가 달려오고 있었다.붉은 기관차가 푸른 화차를 끌고 노란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는 총천연색의 풍경이 퍽 인상적이었다. 하늘의 빛만 분명했다면 완벽했을 텐데.
무당벌레를 닮은 7600호대 디젤기관차 두 대가 나란히 붙어(이를 ‘중련’이라고 한다) 힘을 합쳤다.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정도 되는 수의 화차가 달달달 끌려 익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열차가 지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역은 다시 조용해졌다.
‘미즈호’와 ‘이엽사’그리고 농민들
“점심시간에 잠시 짬 내서 와봤는데, 그냥 신기해요.”
안내판을 들여다보던 방문객 일행은 이렇게 말했다. 혹시 과거 임피역을 이용해본 적이 있는지 묻자, 일행 중 한 명이 ‘여기 열차가 서느냐, 안 서지 않냐’고 반문했다.
“사실 와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아는 사람은 알지만,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역’으로서의 삶이 사실상 끝난 간이역의 숙명일 것이다.
1912년 3월 6일,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군산역과 대야역이 ‘개통 원년멤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 1924년 6월 1일, 임피역이 ‘역원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임피역이라는 ‘간이역’이 필요했던 것은 역시 쌀 수탈 때문이다. 지금 봐도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이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의 농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지금도 ‘서수’라는 지명에 남아 있는 ‘서수촌(瑞穗村)’, 그러니까 ‘미즈호’라고 읽는 농장이 있다.
가와사키 토타로(川崎藤太郞)라는 일본인 상업가는 1904년, 충남 연산 지역과 전북 옥구·임피 지역의 땅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4월에 농장을 개설했다. ‘미즈호’는 ‘윤이 나는 싱싱한 이삭’을 의미한다.
가와사키는 농장 설립 4년 뒤에 자신의 고향인 니가타(新潟)에서 흙을 가져와 신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가와사키의 농장은 1927년 ‘이엽사 농장’으로 합병되는데, 쌀 수탈에 앞장섰던 이엽사 농장은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무려 75%를 소작료로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
참을 수 없던 농민들은 그해 11월 25일, 그러니까 농장 측이 정한 납부 기일에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다음날 농민조합 간부 장태성을 잡아 가뒀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임피역전 술산지서로 쳐들어가 장태성을 구출했다. 이어 서수지서·이엽사를 연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이내 들이닥친 무장 경찰들은 농민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뒀다.
이 사건은 ‘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수탈의 ‘실적’은 꽤 쏠쏠했던 모양이다. 본래 간이역이었던 곳이 개업 12년 만인 1936년 11월에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한 달 뒤에 번듯한 역사(그러니까 지금 서 있는 그 건물)도 들어섰으니 말이다. 이 건물은 2005년 11월에 국가 등록문화재(제208호)로 지정된다.
통근열차와 새마을호 그리고
그러나 ‘보통역’으로서의 삶은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1985년에는 ‘운전간이역’으로 격하됨으로써 임피역은 간이역으로 돌아간다. 이후 1995년에는 ‘역원배치간이역’으로, 2006년에는 그나마 있던 역원도 철수해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운영되던 동안에는 다른 간이역들과 비교해볼 때 상황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통근열차 운행 마지막 해인 2007년의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임피역 승하차 승객 수는 8807명이었는데, 이는 군산선 역 중에서는 군산역(42만7800명)과 대야역(1만8801명) 다음으로 많은 수다.
같은 해 군산~전주 구간의 역들을 보면 전라선 춘포역은 겨우 291명이 이용했을 뿐이고, 동산역은 7636명이 이용했다. 오산리·개정역에서는 각각 4852명·3182명이 타고 내렸다.
2008년 1월 1일, 통근열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이상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한국철도공사의 무인역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가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통근열차 폐지와 함께 코레일 측이 주민 편의를 위해 서천~익산 간 새마을호 열차를 대신 투입하면서 생긴 일인데, 그러나 이 희한한 상황은 채 그해 여름이 되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2008년 5월 1일, 서천~익산 새마을호 열차가 폐지됐다. 그리고 임피역도 오산리·개정역의 뒤를 따라 여객 취급이 중지됐다. 2008년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임피역의 승하차 인원은 47명. 마지막으로 태운 불꽃이라 하기엔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멈췄다.
이제 플랫폼에는 들어갈 수 없고, 열차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곳을 ‘통과’한다. 반대쪽 플랫폼은 흔적만 남았다. 언젠가 그 플랫폼에 닿아 있었을 측선도 사라진 지 오래다.
‘시실리’ 시간이 멈추다
임피역은 이제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군산 구불길 2-1코스 ‘미소길’이 호원대와 이곳을 거쳐 남쪽 만경강을 향해 뻗어간다. 대야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미소길 탐방쉼터’도 나온다. 다만 취재팀이 찾아간 날은 쉼터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군산시청에 따르면 이 쉼터는 2013년 개소 이후 식당 및 숙소 시설로 이용돼 오다, 구불길 탐방객이 줄면서 위탁 운영으로 전환된 뒤 계약이 만료된 상태라고 한다. 재입찰을 준비 중이라고.
옛날 농민들이 이엽사 농장의 횡포에 항의하며 딛고 있었을 역 광장은 ‘시실리 광장’이 됐다. ‘시실리’는 어쩐지 지중해의 어느 섬 이름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지만, 여기서는 ‘時失里’,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이 이름표를 달고 있는 탑에는 ‘거꾸로 가는 시계’가 붙어 있다. 숫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광장 한쪽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연방죽’이라 불리던 옛 방죽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채만식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도 군데군데 서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을 꼽자면 단연 주차장 뒤쪽에 세워져 있는 새마을호 객차 두 칸이 아닐까?
어쨌거나 새마을호가 이곳에 서긴 했었고 또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 열차가 서는 무인역’이라는 타이틀도 있으니 그 나름대로 수긍은 가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 속 임피역은 ‘동동동동’ 소리를 내며 굴러가던 통근열차와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어색한 차량은 일종의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군산선·임피역과 군산, 일제의 수탈, 그리고 민중의 저항 등에 관한 것들을 볼 수 있다.
역 주변, 노랗게 물든 논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콤바인이 털털털 논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풍경 뒤로, 이번엔 파랗게 칠해진 ‘해랑’ 디젤기관차가 임피역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한 객차들을 등에 달고 지나간다.
그 한참 뒤로는 새로 지어지고 있는 익산~대야 간 장항선 복선철도 구간이 보인다. 몇 년 뒤면 열차들은 논 옆이 아니라 땅에서 10m쯤 위, 곧게 뻗은 다리를 밟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피역은 정말로 ‘역’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서운해질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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