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한지 판매로만 가게를 운영해온 동양한지 박성만 사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의 가게에는 심심치 않게 외국 작가들이 찾아온다. 거개가 특별한 한지를 주문해 제작해가려는 목적이다. 자신들의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어도 가게에 놓여있는 비구상적 조형이 살아 있는 한지를 그들은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그 아름다움과 특별한 물성에 감탄한단다. 한지가 현대 미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외국 작가들이 중국의 선지나 일본의 화지보다 한지를 주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다.
한지의 산업화는 오랜 화두다.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 화선지로서의 한계를 넘어 사진을 인화하고 글자를 인쇄하는 한지용지의 개발이나 옛 책과 옛 문서를 복본화하는 인쇄용지 개발도 산업화를 향한 노정의 결실이다.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을 활용한 일상용품의 생산도 물론 같은 연상에 있다.
기대되는 한지의 변신이 또 있다. 한지의 보존성을 제대로 살리는 종이 개발에 관심을 쏟아온 박 사장이 오랫동안 연구해온 작업의 결실이다. 아직 개발 단계에 있는 이 한지는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볍고 얇다. 한 장을 들어 올리면 깃털을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배경이 거의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목표여서 두께의 한계를 최대한 없앤 덕분이다. 오래된 그림이나 글씨, 옛 책과 고문서 등 귀중한 자료가 시간이 지날수록 훼손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며 그는 원본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얇은 한지로 배접을 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글자나 그림이 훤히 들어나 보일 정도로 얇은 배접용 한지를 개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간 신문 위에 이 한지를 올려놓으니 한지의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 기사 읽기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한지로 배접하면 신문도 원본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박 사장의 확신이다. 물론 이 한지는 찾는 사람이 적다. 쓰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거니와 가격 부담이 큰 때문이다.
아직 한계가 있지만 한지의 특성을 살려내는 다양한 변신은 한지 산업화의 가능성을 높인다.
주목받는 전주 한지의 현실은 어떤가. 둘러보면 한지 생산자들의 고군분투, 그 결실이 이어지고 있지만 다양한 변신의 폭은 여전히 좁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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