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언급된 무열왕 죽음
익산서 백제부흥세력 반격‘의미’
현 부안 우금산성, 주류성 추정
발굴조사·학술연구 등 필요성
△백제를 붕괴시킨 태종 무열왕의 죽음을 알린 금마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전쟁에 패하였다. 이때 신라와 당의 급습으로 15일만에 패한 백제지역민들은 의자왕과 왕세자 등 왕실과 귀족대신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압송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 전쟁이 단순한 백제 공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화가 아닌 백제국가의 완전한 붕괴 전쟁이었음을 확실히 깨달게 되었다. 이후 백제 각지에서 당과 신라군에 대한 부흥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본격적인 백제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 금마 즉 익산지역에서 발생하였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상기 사료는 백제를 붕괴시킨 신라 무열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654년 50세에 왕에 즉위한 김춘추가 백제붕괴 1년 후인 661년 6월 금마 대관사(익산 왕궁리유적에 있던 사찰)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금마군에 피같은 붉은 물이 흐르는 사건이 소개된 사건과 연결되어 왕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태종 무열왕의 비정상적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는 데 금마지역의 반 신라적 성격과 백제부흥세력의 적극적 반격의 신호로 파악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왜에서 백제부흥을 위해 원병이 처음 출발한 661년 5월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전라북도권의 백제 유민세력이 본격적인 부흥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부흥의 현장 주류성, 부안 변산일대
660년 8월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의 세력들은 각 지역에서 백제부흥 전쟁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전쟁의 거점지역은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으로 양분되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곳으로 충남 예산의 봉수산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흑치상지 등이 중심이 되어 초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백제부흥군의 핵심거점은 주류성이었다. 이곳은 복신과 도침 및 일본에 있다 귀국해 부흥군의 중심이 되었던 왕자 부여 풍등이 함께 활동한 부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주류성 위치에 대해 충남 한산 건지산설, 홍성설, 전북 부안 우금산성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는 주변 지형 등이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는 문제점과 최근 발굴을 통해 축조시기가 고려후기로 파악되어 더 이상 주류성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백제 부흥군 최후 거점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
최근 학계는 지형과 관련 기록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부안의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등 사료를 보면 주류성의 위치는 백제부흥전쟁 수행과정에서 바닷가에 위치해 방어와 왜국(倭國)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지 않아 이후 피성(避城: 현재 김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복귀하였다는 상황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주류성은 김제지역과의 관계도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663년 백제부흥군과 왜 원병이 신라와 당의 군대와 대규모 전투를 행한 백강구와 인접한 곳이다.
△동아시아 1차 국제전쟁, 백강전투의 땅 동진강하구
660년 백제붕괴 직후 왜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하였고 3차례에 걸쳐 각각 1만~2만 7천에 달하는 원군을 보냈다. 특히, 663년 8월 마지막 전투가 치러져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당 연합군에 대패하며 부흥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동북아 한,중,일의 군대가 최초로 맞붙은 국제전쟁으로 백제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백제유민이 대거 왜로 건너가 새로운 국가 일본을 마련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동북아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게 되었다. 전쟁이 치러진 백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금강설, 동진강설, 금강-동진강 합구설 등으로 크게 대비되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주류성, 피성, 백강구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공간은 이후 675년 당나라의 신라장악 야욕을 꺽은 나당전쟁의 격전지 기벌포와도 연결되는 곳으로 이는 ‘갯벌’을 의미하는 계화(界火)를 화(火)의 원발음 ‘불’로 읽으면 개불(개벌)과 연결되어 현재의 동진강 하구가 된다. 이같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 벌어진 백강은 동진강 하구일대이고 주류성의 위치는 부안 우금산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김제지역과도 인접하고 당시에는 해수가 더 들어와 섬처럼 둘러싸인 곳으로 특히 산 정상에는 부흥군의 중심인 복신이 머물런 복신굴과 산성 성벽이 여전히 잘 남아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을 위시한 백제부흥군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풍은 661년 1차 일본의 원군을 거느리고 귀국, 복신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격전을 벌여 나·당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전권을 장악하려 하자, 풍은 복신을 살해한 뒤 실권을 잡았다. 부여풍은 663년 백강(白江)에서 백제부흥군 및 왜국이 보낸 원병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싸웠으나 1000 척의 함선 가운데 400 척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 같은 지도부의 내분이 부흥운동0을 좌절케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세력은 붕괴되었다. 이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왜로 망명길을 떠났다.
△실패로 끝난 백제의 부흥 전쟁
백제의 부흥전쟁이 실패한 이후 신라 승려 원효와 신라의 토착승려인 사복이 부안 변산 일대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부안지역의 원효관련 기록은 흥미롭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나타난 신라 승려 원효(元曉)와 관련된 기록은 변산 내소사 인근에 존재하고 있는 원효방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이다. 관련 부분을 보면 원효와 사복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데 사복은 ‘삼국유사’에서 죽은 자를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묘사된 존재로 이들의 활동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현재의 우금산성인 주류성과 밀접히 관련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불교신앙을 통해 극락왕생을 강조한 원효와 토착적 사후세계 인도자인 사복이 함께 백제저항의 거점 지역을 위무하고 포섭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이들을 적극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된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는 신라장군 김유신의 사당과 조선 성종때 이 사당에 땅을 하사했다는 전첩지가 있다. 이는 백제부흥군을 붕괴시킨 후 김유신에게 이 지역을 포상으로 내린 역사의 흔적으로 파악된다.
한편, 1979년 12월 우암산성 아래 개암사에서 ‘별기’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는 데 내용 중 17세기경 만들어진 ‘개암사사적기’에 우금산성을 주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주류성설을 더욱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같이 최근 국내외 백제관련 연구자들은 백제의 마지막 거점 주류성에 대해 대부분 부안 우금산성쪽으로 입장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 유민들이 마지막 눈물을 흘리며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며 일본으로 이주해간 곳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부안 개암사 뒤의 우금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지역사 교육과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부각하는 사업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백제의 마지막 부흥의 꿈과 새로운 백제의 역사를 찾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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