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 부흥세력 옮겨 15년동안 보덕국 유지
견우 직녀 연상시키는 왕궁 맞은편 석인상 등 도내 곳곳에 흔적 남아
△고구려유민, 백제 왕도 익산에 자리잡다.
663년 백제 부흥의 거점 주류성(전북 부안 우금산성)이 함락된 후 당과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단행하였다. 당이 중심이 된 고구려 공략은 과거 수 양제나 당 태종 때의 대규모 공격방식이 아닌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를 통한 고구려 소모전을 진행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집권세력인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이 정변을 일으키자 서로 다투다 국내성 등 요동지역 거점을 이끌고 당에 투항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선봉이 되었다. 결국 당과 신라의 양면 공격에 의해 분열된 고구려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다.
고구려는 붕괴되었지만 각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전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668년 황해도지역을 중심으로 검모잠이 주축이 된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의 조카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한성(서울 일원)지역에서 고구려를 재건하고 당과 맞섰다.
한편, 당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복속지역 관할 문제로 신라와 대립하다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특히, 당은 신라마저 복속하여 삼국 모두를 당의 지배하에 놓고자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의 원조 하에 지속적인 저항을 진행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익산)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문무왕 14년(674)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면서 고구려 부흥세력은 신라에 의해 책봉된 ‘보덕국’ 체제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같이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은 나라가 망하자 신라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역설적으로 고구려 부흥의 터전으로 바뀐 아이러니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신라와 고구려 유민의 정략적 결과물, 보덕국
백제 땅에 세워진 고구려 유민의 거점 보덕국은 신라의 고구려, 백제유민 지배정책과 당과 일본과의 국제관계를 고려해 탄생된 고도의 정략적 결과였다. 즉, 익산의 백제 도성 관련 시설을 활용하고 금강과 만경강으로 둘려진 익산의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고구려 부흥세력이 군사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막고 백제세력과도 차단하는 목적으로 이 지역을 활용하였다. 한편, 신라는 과거 고구려와 왜국의 친선 관계를 이용해 신라와 왜 관계 호전을 노렸고 또한 고구려 구토에 대한 지배 연고권과 논리를 마련해 당이 고구려 땅에 만든 안동도호부에 대항하는 근거도 마련하였다.
△전라북도에 남겨진 고구려 문화
670년 익산지역으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들은 15년 동안 보덕국을 유지하였다. 그 사이 신라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특히, 투항세력인 안승과 가족을 경주로 이주시키자 684년 11월 고구려 유민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개월 진행되다 종식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이 토벌되자 685년 봄 신문왕은 완산주(전주)와 남원소경을 바로 설치하고 대다수 고구려 유민들을 완산주와 남원소경 등 남쪽 지역으로 사민시켜 고구려 유민의 거점을 와해시켰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익산에 ‘보덕성’이 군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익산에 남은 고구려적 요소로 주목되는 것은 왕궁유적 앞을 흐르는 옥룡천과 관련된 익산 고도리 석인상 관련 기록이다. 왕궁유적 맞은 편에 있는 2구의 석인상은 고려시대 석불입상(보물 46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이 같은 남녀석인상 형식은 고려시대 조성된 불상과도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그 연원이 명확치 않다.
그런데 이 같은 남녀가 개울을 사이에 둔 모습은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직녀 모습과 대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석인상에 견우직녀설화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즉, 두 석인은 섣달 그믐날 자시(子時, 23시~01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전형적인 견우직녀형 설화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견우직녀 모습으로 가장 오래된 그림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즉, 광개토왕 18년(408)에 축조된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견우와 직녀가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사회에 견우직녀 설화가 상당히 유포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들 석인상이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석인상의 연원과 유래가 고구려인들이 보유하였던 견우직녀형 설화인식이 고구려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사민된 이후 이곳에 전래되어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상정케 한다.
전주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은 고구려 승려 보덕의 경복사 유적이다. 이는 고구려 승려가 일부러 완산주 고덕산에 ‘비래방장’ 즉, 하룻밤새 날아온 것으로 묘사된 곳으로 백제 땅으로 옮겨온 고구려 사찰이 전주지역에 남아있다. 한편 남원지역의 경우 신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유민이 사민되어 남원 소경성을 건설하고 남원지역 곳곳에 분산되었다고 추측된다. 특히, 남원의 만복사의 가람배치형태는 비록 고려시대 사찰이지만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북쪽 3면에 3개의 금당을 배치한 品자 모양 가람구조인데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양식이란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또한 통일신라시기 거문고 달인 옥보고는 고구려유민으로 남원 운봉일대 지리산 자락에 은거한 사실이 전해져 앞서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으로 옮긴 상황과 대응된다. 특히, 옥보고와 관련된 지역이 현재 남원 동편제 소리마을과 접한다는 점은 남원 국악의 뿌리와 고구려 음악문화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은 신라 불교음악과 관련된 쌍계사의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고구려유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인의 혈통적 특성이 남한지역에서 전라북도지역에 가장 잘 남아있어 구리시에 건립된 광개토왕 동상 얼굴 표본을 만들기 위한 샘플로 활용하기 위해 전라북도 익산지역 남학생들 표준 얼굴안을 수집하였던 사실은 결국 고구려유민들이 현재의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신라사회에 편입되어 갔으며 그 문화적 영향성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그 흔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전북 지역 특히, 익산-전주-남원 지역은 백제의 역사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찾았던 뜻 깊은 터전이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이후 신라의 역사공간으로 연결되어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융합되어 가장 한국다운 역사 원형 문화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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