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때 친언니 따라 중국, 알고 보니 목화밭에 팔려
탈출해 가족에 복수 다짐…선교사 권유, 한국행 결심
하나원 생활 후 전주 정착…심리상담 배우며 새 인생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는데 우리는 북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부의 4·27 판문점 선언을 만드는 일보다 더 시급한 무엇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우리 곁에 북한과 관련된 이들은 곳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TV 속 북한을 현실 세계로 끌고 나와 남다른 존재감을 띠는 이들을 두 차례에 걸쳐 만나봤다.
전주시청 생활복지과 안서영 주무관(36)은 ‘북한’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냐는 질문에 근심이 가득 미적지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친부모로 부터 버림받았고, 20년 만에 만난 친언니가 잠시 어디 좀 가자고 해서 따라 나간 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족이 보고 싶기도,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지난 2003년 여름, 함경북도 청진시에 살던 안 씨는 친언니의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넜다. 해령에 가서 물건을 가지고 오면 용돈을 준다는 언니의 말을 믿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때 나이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언니가 장교 가족이라 특권이 많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따라나섰습니다. 언니와 중국 시내 구경을 하고, 쌀밥을 먹고 나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어디로 이동하는 버스 안이었죠. 알고 보니 언니가 나를 중국에 인신매매한 것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배신을 당해 목화밭 일꾼으로 팔려간 안 씨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악착같이 장사를 하며 400원(당시 한국돈으로 80만원)을 벌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 언니에게 복수하겠다고 매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한 선교사가 한국행을 권했고, 안 씨는 복수 대신 희망을 택했다. “공부도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국을 위해 마음을 바꿨다”는 그녀는 2005년 몽골로 이동했다. 다행히 북한 군인이 아닌, 몽골 군인에게 붙잡힌 안 씨는 “사우스 코리아”를 외쳤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Ulaanbaatar)로 이동한 그는 일주일 만에 한국 대사관 직원을 만났다.
2006년 4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안 씨는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또 다른 7명의 탈북자와 만나 펑펑 눈물을 쏟았다. 비행기가 행여 북한으로 이동하거나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체포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된 기쁨의 눈물이었다.
국정원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서 3개월 적응 기간을 마친 안 씨는 ‘전주(全州)’를 행선지로 택했다. 하나원에서는 전주가 공부하기 좋은 도시로도 알려졌다는 게 안 씨의 말이다.
배움에 목마른 안 씨는 2007년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남자 여자가 서로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교수님 강의할 때도 손을 들고 거리낌 없이 질문하는 패기에 두 번 놀랐네요. 당시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 그야말로 ‘멘붕’이었죠.”
중국어를 잘해 선택했고, 2012년에 졸업하자마자 전주대 진로지도상담 심리대학원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상담을 해주면서 꿈을 그려주고 싶었다.
그는 통일부 통일교육원 소속 전문강사로 선정되며, 도내 학교를 찾아가 통일을 알리는 데 노력했다. 지난해 2월 전주시청에 기간제 공무원으로 입사한 안 씨는 최근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언니의 배신으로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생활하던 당시 공부에 매진하는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솟았던 그는 이제 전주시 생활복지과 노인복지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됐다.
그가 노인복지에 전념하게 된 배경이 의미심장하다. “저는 딸로 태어나 친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어요. 아들이 아니라 버림받았던 거죠. 그래서 고향에서는 양부모님 아래에서 성장했고요. 2년 전에는 양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업무를 보고 있죠.”
그는 통일희망봉사단을 꾸려 요양원 등을 돌며 지역에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인터뷰 날짜가 때마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4월 27일. 전주시 효자동 전북하나센터에서 만난 안 씨가 이 소식을 반겼다.
“한국에 온 지 1년만인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그때보다 지금 가슴이 벅차네요. 제가 지금 직업상담을 공부하는데, 통일되면 희망을 잃은 북한 어린이에게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사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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