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걸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내 안에 쌓인 도시의 그을음이 숲에 정화되어 가슴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금곡사로 가는 길옆으로 편백이 빽빽이 서 있어 하늘이 조각달처럼 보인다.
산모롱이를 돌아 내려가는 길섶에 할머니가 어린 쑥을 다듬고 있다. 아직 바람이 찬데 아장아장 걸어 나온 쑥이 반가워 샀다. 코끝에 스미는 쑥 향기로 금방 봄이 내 곁으로 왔다. 다랑논에서는 경칩이 며칠 남았는데 벌써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목청껏 울어댔다. 양지 녘엔 어느덧 초록빛 담배 나물이 너풀너풀 자랐다. 나도 모르게 ‘동무들아 오너라.…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보자.’라는 동요가 저절로 나왔다. 노래처럼 그 옛날 바구니 들고 나물 캐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아이들은 봄이 올 즈음이면 멀리 아중리 저수지 근처로 나물을 캐러갔다. 나물 캔다는 핑계로 나들이 갔다. 남노송동에서 걸어서 마당재를 지나 갓바우 마을을 돌아 나물을 하나둘 캐며 저수지 끝자락 왜망실까지 갔다.
나물이 눈에 띄지 않을 때는 자갈을 들추어 병아리 솜털 같은 노란 어린 쑥을 캐냈다. 언덕배기에서 냉이와 쑥부쟁이를 캐고 논에서는 벌금자리, 자운영을 바구니에 담았다. 해가 설핏해져 산 그림자가 저수지로 내려오면, 봄나물 원정대는 다 못 찬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지 간으로 들어서며 의기양양한 소리로 “엄마! 아중리서 나물 캐왔어.” “아직은 추운디 그 먼디를 갔다냐? 손이 터서 깜밥이구만. ”
하며 어머니는 나를 따뜻한 아궁이 앞에 앉혔다. 부지깽이로 불을 허적거리는 엄마 품에 기대어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어머니는 쌀뜨물에 된장을 풀어 묵은김치를 숭숭 썰어 쑥국을 끓이고 나물무침을 하셨다. 김칫국만 먹다가 모처럼 쑥국에 나물 반찬을 먹으면 밥이 입안으로 그냥 넘어갔다.
지금도 나물 캐던 어린 시절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시골집에 가면 가끔 뒤란 메실 밭에서 냉이와 달래를 바구니에 담으며 나물 캐는 계집애로 돌아간다. 봄볕에 돋아난 연둣빛 들풀처럼 순순한 아이 마음을 오래도록 가슴에 지니고 싶다. 순수함을 잃지 않은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해맑게 웃을 수 있어, 우리네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주고 주름살을 다림질해 주리라. 모악산 기슭 밭이랑 사이로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머지않아 산야의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다투어 피어나 서로 다른 봄빛을 내뿜으리.
봄 언덕에 꿈의 빗장을 풀고 상큼한 바람이 머문다. 어둠의 그늘을 벗어 노래하는 눈부신 햇살의 춤은 시간의 회로를 돌리고 다가선 발걸음마다 물오른 나무마다 꽃, 꽃들이 핀다. 견딜 수 없는 음지마다 그래도 살겠다고 생명을 틔우는 이름 없는 들풀조차도 살같이 고운 연둣빛 여린 잎마다 안개가 머물다 간 곳에 이슬 머금은 세수를 하고 아지랑이 아른대는 저, 해 말간 미소
산모퉁이에서 사온 쑥으로 국을 끓였다. 쑥 냄새가 그 옛날처럼 입안에서 봄 향기로 피어난다.
움츠렸던 어깨 펴고 싱그러운 봄기운을 담은 푸릇푸릇 알싸한 생명력이 내 안에서 솟구치는 봄 향기, 눈 꽃잎 머리 위에 사르르 감추지 못하는 설레임으로 피어나는 봄 향기가 피어난다.
* 박일천 수필가는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토지문학 수필 부문 대상> 을 수상했으며 한국문협 회원, 샘문학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바다에 물든 태양> , <달궁에 빠지다> 가 있다. 달궁에> 바다에> 토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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